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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삶의 원형은 어디에 있을까?

일본 큐슈로의 나홀로 기차여행 2

등록|2009.03.20 19:14 수정|2009.04.06 10:10
둘째 날

 부산역에 도착한 시간이 그러니까 다섯 시 반경이었어요. 여전히 깜깜나라입니다. 역을 빠져나오자 젤 먼저 저를 맞이한 것은 오싹한 추위였습니다. 남쪽 나라의 매서운 한파! 이 럴때 멈추면 얼어버릴 거 같아 쭉쭉 앞으로, 하지만 몇 걸음 걷는데도 맞바람이 만만치 않네요. 다행히 역 앞 길 건너 조그마한 음식점 '김밥천국'이었어요. 천국이었습니다! 뜨끈한 떡라면 한 그릇을 마주하고 아주 천천히 떠먹습니다. 국물이 완전히 식어서 미련 없이 일어서고 싶을 때까지 앉아있을 요량이었지요. 주인 아지매의 눈치를 살짝 보면서 말이죠. 다행히 아지매는 오히려 뜨거운 물을 컵에 가득 가져다 주십니다. 키득~

 자갈치시장을 향해 걷고 있습니다. 거리는 아직 어둠이 걷히기 전, 휘이잉 비닐 봉지 하나가 바람에 날려 쏜살같이 달려가는 택시를 따라잡곤 금방 뒷 유리에 부딪고 맙니다. 으스스, 궁하면 통한다고 배낭 속에서 스포츠타월을 꺼내 목을 칭칭 감으니 한결 따뜻하네요. 저만치 할머니 한 분이 큼직한 손가방하나와 짐보따리를 양손에 부여잡고 걸어가시는데, 저런 힘에 붙이셨는지 멈추시고 구부정 주저 앉아버리시네요. 이 틈에 여쭤봅니다.

 "저기 할머니 자갈치 시장이 이 근처라던데요. 어디로 가나요?"
"엉~ 내를 따라 가이소."
"그래요? 잘 됐어요. 할머니 그런데 가방 무거우신 거 같은데. 제가 하나 들고 갈까요?"
할머니 망설임 없이...
"아니오...괜않소. 이리 내시오...!"
단호하십니다.
"하하하. 할머니, 저 그 보따리 들고 튀지 않아요."

 그래도 막무가내 아예 대꾸가 없으세요.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커다란 손이 보입니다. 딱지처럼 굳은살이 맺혀있는 손가락 마디마디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시나 봅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마음만은 여전히 강인한 자갈치시장 아지매이십니다.

 "할머니, 자갈치 시장에서 오래 일하셨나봐요?"
"그러오."

 자갈치 시장은 막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골목마다 축축한 바닷내가 진동합니다. 이곳 자갈치 시장 거리에까지 질펀한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거 같습니다. 지붕으로 하늘만 가린 광장 만한 커다란 수산 장터 입구 앞을 지나다가 그만 멍하니 멈춰 서버렸습니다. 천정에는 노란 전등빛이 넘실거리고, 그 불빛아래 소리 없이 민첩한 저 움직임들 때문이었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방한복에 작업복을 둘둘 걸친 새벽 자갈치 시장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침착하고 묵묵한 손놀림은 어느 한 동작 하나 버릴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곳은 엄청난 생명 에너지의 저장소 입니다. 저분들의 몸 어딘가에서 내재되어있는 생의 종소리가 한꺼번에 울리면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뿜어져 나오는 생명 에너지들! 그 앞에 선 제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코 끝에서 비린내가 납니다. 저기 누군가 생선나무상자를 뽀개어 장작불을 피우고 있군요.

 새벽 자갈치 시장.
아지매들이 떴네.
쉼 없는 저 손놀림,
곰삭은 숨소리,
설푸른 하얀 입김은 가늘게 떨리는데,
근처 장작불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꽃송이.
저 혼자 딱딱거리며 신명나게 춤추네.
아지매들의 눈 속에 잠시 핏빛이 도네.

자갈치 시장 뒤 멀리 검은 실루엣의 산동네에 촘촘히 박힌 불빛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반짝입니다. 저 불빛들이 완전히 꺼질 무렵이면 태양은 뿌옇게 떠오르고 이곳 자갈치 시장에도 사람들의 북적대는 발길로 아지매들의 얼굴에 환한 불빛이 따뜻하게 빛나게 되겠지요.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 후에도 완전히 날이 밝지 않은 이른 시각. 새 날이 찾아오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드디어 출국수속을 마치고, 일본 하카타행 코비호에 승선, 창가에 자리 잡았습니다. 끝없는 검푸른 바다의 넒은 출렁임 사이로 투명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이제 날이 확실히 밝아오나 봅니다. 대단하네요.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은 또 다른 빛과 만나 거듭 밝아지며 하늘 가득 펼쳐지고 있습니다. 눈 앞의 공간이 탁 트이자 가슴이 열리고 자동으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그 만큼 다시 깊이 숨을 모아 내쉽니다. 잠시 눈을 감고 물위에 떠가는 선체의 출렁임을 기분 좋게 느껴봅니다.

"왝~우왝~꾸역꾸역~~"
정신없이 토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여러 차례입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자리에 준비되어있는 봉투의 입구를 꼭 막아 틀어쥔 손목이 시립니다. '고통의 바다여~~' 제 옆자리 일본분께 너무 미안합니다.
"일본분이시군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역하실 텐데요. 괜찮으세요?"

 그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껌을 하나 건네주네요. 하지만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결국 2층으로 자리를 옮겨 앉습니다. 기운이 바닥 수준입니다.

 멀리 육지인지 섬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카타항 도착을 알리는 선내 방송. 일본친구와 나란히 배에서 내리고 있습니다.

 "고마웠어요. 이젠 살 거 같아요...하하...어! 보세요. 눈이 오고 있어요.....제겐 환영인사 같은데요..."
"하이~하하하...그러네요...일본에 오신 거 축하합니다...아이구 추워라....! 하하하... "
기분 좋은 작별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하카타항에 드뎌 도착했습니다! 감개무량하네요! 하아~ 흐음~ 기분 좋다! 이 때의 상태란 뭐 고저~ 눈앞에 뵈는 게 없지요. 눈이 나풀거리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빙그레 한 바퀴 돌아봅니다.

일본의 공기!
눈이 나리다!
초속 5센티미터!
호레이~~

 갑자기 붕~ 그동안 매여 있던 시간의 굴레란 제약에서 벗어나 휘이릭~ 다른 차원의 공간에 뛰어 들어온 거 같은! 우리는 이런 짧은 순간을 '초월'이라 하나요? 인간 정신영역에도 마음의 블랙홀이 있지 않을까요? 아무튼 지금 이 순간의 기분 좋은 느낌을 어떻게든 기록해두고 싶을 뿐입니다.

  11번 버스를 타고 하카타 기차역으로 이동합니다. 미도리 녹색창구에 가서 기차 지정석을 다섯 장(나중에 미야자키에서 하카타역까지의 야간열차표 외엔 쓸모가 없게 되고 말았지만.) 과 아소산관광 순환버스표를 예약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 지정석을 챙기고 나서부터 왠지 낯선 일본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살짝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자신감이 슬며시 두려움을 대신하는 걸 알아챈 그 첫 번째 순간이었습니다.

 하카타역은 그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고 흥미로웠습니다. 오가는 일본사람들의 옷차림새와 표정을 살펴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우리네 조선족과 닮은 듯, 하지만 서로 섞여지지 않는 그 부분들. 눈에 조금씩 잡히더군요. 일본만화책 한 페이지에서 방금 튀어 나온 거 같은 일본 여학생들! 재밌어요. 짧은 교복치마길이와 무릎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타킹, 목에 두른 목도리, 머리에 앙증맞게 꽂은 분홍머리핀, 가방에 치렁치렁 매달린 각종 캐릭터가 새겨진 액세서리들. 그리고 오늘이 성년식의 날이라네요. 이 지역의 20살 처녀들은 모두 어느 회관에 모이나 봐요. 길에 쏟아져 나온 그녀들은 허연 분을 잔뜩 찍어 바른 짙은 화장에, 기모노를 차려 입고 가이샤처럼 화려한 장신구를 꽂은 올린 머리를 하곤 게다를 신고 옴찔옴찍 움직입니다! 너무 귀여웠어요. 제 눈엔, 움직이는 일본제 인형들인 거죠!

 역 안을 돌아다녀봤어요. 비록 일본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체계가 참 잘 잡혀있다는 걸 알겠더군요. 안내판이나 방향표시가 분명하면서도 적절한 공간에 배치되었다는 것도요. 신속한 표 예매를 위해 자판기를 활용하면서도, 녹색창구를 바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유리 칸막이로 쾌적하게 따로 배치하여 역내 소음으로부터 분리시켜놓은 것도 좋고요. '참 연구 많이 하고, 신경 많이 썼겠구나.' 역내마다 관광안내소가 있는 것도요.

 날개 모양으로 좌우로 넓게 펼쳐져있는 쇼핑몰은 안으로 들어 갈수 록 눈이 휘둥그레지더군요. 각종 먹거리에서 부터 크고 작은 잡화에 이르기까지 한 결 같이 그 색채가 밝고 따뜻하고요, 디자인이 넘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한 마디로 정교한 손길인데요. 다만 장인정신 하나론 뭔가 설명이 되지 않는 거 같았죠.

 일본의 첫 인상은 뭔가 엄격한 룰?이 뒤에서 받쳐주는 사회 같은 거였습니다. 그 룰이 뭔지, 어떤 성격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예요. 그런데 더욱 알 수없는 것은 역내 일본인들의 외모는 적어도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품들에 비해 그렇게 세련되거나 멋쟁이스럽지 않았다는 점이예요. 오히려 정반대로 땅딸하고 촌스럽고 투박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사람들이 정말 이 잘난 물건들을 만들어 냈을까요? 그러니까 참 이상하죠? 정작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데 이들 주변 풍경들은 아주 잘 보이는 이상한 구조! 그러니까, 이들 일본인들에게서 삶의 중심이 되는 부분, 그 힘은 겉으로는 잘 안 보인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럼 어디에 숨어져있는 걸까요? 부산 새벽 자갈치 시장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과 견줄만한 일본인들의 근원적 삶의 원형을 확인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1시 52분. 구마모토로 가는 신칸센열차를 탔습니다. 우와~~ 드디어란 말! 절로 나옵니다.

 자리를 잡고 "치이이...덜컹...뿌우우...."

기차 출발신호가 나자 일본의 기차소리는 우리의 것과 어떻게 다를까? 귀를 기울려 봤지요. 그런데, 잘 모르겠더라구요..ㅋㅋㅋ...

 네, 꿈의 일본열차를 탄 것이예요! (정말 이 때 신났었어요!) 기차의 천국 일본에서 일본제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갑니다! 그곳이 어디든지 지금은 중요하지 않을 거 같아요. 잠시나마 이대로 새롭습니다. 그러니까 저 역시 일본인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보통 한국인만큼 갖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일본인들의 기차사랑이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알 수없는 공감 같은 것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 공감함에서 오는 좋은 느낌을 직접 기차를 타봄으로서 실제하는 것으로 확인받는 거 같았다고나 할까요? 마치 그림자와 실제가 서로 만나 합체되는 듯한!

 기차 창밖으로 휙휙 마을 풍경들이 지나고 있습니다. 도심을 벗어나자 조용하고 한적한 농촌 마을풍경이 우리네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로소 배낭을 어깨에서 벗어내고 좀 더 안락한 자세로 느긋하게 바깥풍경에 마음을 건네 줍니다. 길고 깊게 숨이 쉬어지는 행복한 느낌입니다.

 기차 안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자리는 비어있고 승객들은 다들 조용히 시간을 맞이하고 있네요. 몇몇 젊은이들은 핸드폰에 빠져있고, 지긋이 나이든 사람들이 오히려 얌전한 아이들 모양 '대기 모드'로 순둥이들 같이 앉아있네요. 이 평화로운 분위기! 아무도 서로를 흘낏거리지 않고 모두들 각자 넉넉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났어요.

'떠나온 거 맞네. 아~ 좋구나...난 지금 새로운 곳으로 멀찌감치 벗어난 것 맞아!'

그것은 또 한동안 허기져 있던 '나만의 시간'을 비로소 찾은 것 같은 고요한 희열이었습니다. 또한 이번 여행만큼은 '세상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서 제 자신과 좀 더 가깝게 만나고 싶다는 바램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잔잔한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구마모토역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에끼벤을 사먹습니다. 고로케와 닭고기튀김과 맨밥과 양념한 밥. 그리고 단무지. 깔끔하고 맛있습니다. 가격대비 만족도 매우 높은 편입니다. 구마모토시내에서 가장 맘에 드는 건 역시 전차였어요. 색깔이 명랑하고 다양해서 원색에 가깝게 빨갛고 노랗고 파랗고요, 모양도 근대와 현대적 이미지를 각각 개성 껏 살린 귀연 전차(버스 길이만한)들이 시내 한복판을 누비고 다닙니다. 정말 귀여워요. 기차와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기차가 마치 어른 같은 무게감이 느껴진다며 전차는 어린 아이들스런 약간은 익살스럽고 동화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자전거족들도 꽤 많이 눈에 뜨이구요. 그래서 일까요? 왠지 정감 있는 도시로 비춰보였어요.

 일단 오늘 첫날밤을 보낼 숙소를 먼저 정해야한다는 생각에 스이젠지(수전사)공원가는 전차를 탔습니다. 수전사 근처의 유스호스텔이 오늘 저의 목적지입니다. 시간이 되는 데로 스이젠지공원를 둘러볼 수도 있을 테고요. 해가 떨어지는지 찬바람이 슬슬 불고 회색공기가 주위를 감돌기 시작합니다. 약간 마음이 다급해 지는 거 같더군요.

 공원 바로 앞에 화과자를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오늘 장사를 끝내고 가게 문을 닫으려는지 잠시 일손을 놓고 계시던 세 아주머니께서 제게 시선을 빌려주시는 바람에 근처를 배회하다 의기소침해 있던 전 용기를 내어 여쭈어봅니다.

 "저기, 이 지도에 나와 있는 유스호스텔을 찾아가려하는데요....좀 봐주시면.."

 영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 그 분들이지만 그냥 무관심하게 물러서지 않으시더군요. 중년을 훌쩍 넘긴 꽤죄죄한 - 그러나 제게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신사다운 신사셨습니다! - 아저씨 한분을 모셔오고 (이분은 스이젠지 공원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수 십년간 사진을 찍어오신 이 공원의 터줏대감이십니다.) 그 중년의 신사와 지도를 사이에 놓고 주거니 받거니 신나게 오래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저는 그냥 곁에 서있을 뿐입니다. 정말 저는 그냥 서있기만 했어요. 보는 것 만두 재밌더라구요. 때론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오호.....떼스까?" "오호...데스네..하이!" 뭐 이러시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간혹 이 분들은 돌아가며 저를 잊지 않고 한마디씩 묻고 가십니다.

"칸코구데스까?"
"유스호스텔데스까?"
"춥습니까?"

 마침내 그 중년의 신사는 유스호스텔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셔선 위치를 확인하셨는데 문제는 제게 설명을 하실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하다하시며 공원 근처의 지역기념품가게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자분을 모셔오시더군요. 이 분이 이은용씨입니다. 이분은 일본인과 결혼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사시는 젊고 아름다운 미모의 한국인이십니다. 은용씨는 친절하게도 상세지도를 한 장 복사해서 색연필로 선을 그어가며 가는 길을 분명하게 지도위에 표시해주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라며. 반드시 주유소 바로 지나 5거리를 놓치지 말라 당부하시며.

 이분 들과 작별하고 다시 혼자 걷습니다. 잠시 홀로 여행자의 넋두리입니다.

 '홀로 여행자는 홀로여서 당연히 외롭습니다. 오늘 같이 사소하지만 '결핍함'이 있을 때 특히 외롭고 힘듭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홀로 여행자는 자신의 틀을 깨고 주위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게 됩니다. 본능적으로요. 그 부름이 주변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해질 때 이 홀로 여행자의 존재를 주위사람들이 금방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다가와 홀로 여행자의 손을 단단히 잡아줍니다. 그 손은 언제나 따뜻합니다. 그리고 홀로 여행자는 그 따뜻한 손길에 고마움과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감사함이 뜨겁게 올라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 뭔가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혼자 싸우기를 멈출 때 오히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비록 그 결핍의 상황이 끝나고, 다시 홀로 길을 떠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예요. 그럼으로 제게 있어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오히려 제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는 축복이며, 그를 통해 에너지를 내적으로 쌓아가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이고 싶습니다. 이 순간을 사랑합니다.'

 스이젠지(水前寺) 공원 쪽을 갸웃뚱 바라보다 아무래도 아쉬워 한번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입장권을 사고 1시간 후에 문 닫는다는 안내를 받고 공원 안을 들어섰습니다.

 수전사공원에 들어서자 마자 물의 정원과 정면으로 초록의 인공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참으로 평화롭고 시원한 느낌이었어요. 이 인공산은 작은 언덕에 가까운데 후지산을 모방한 것이라고 해요. 역시 인공으로 조성된 호수 곁에 우두커니 앉아 오리와 붕어들이 무심히 노니는 것을 무심코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일어나 천천히 걸어봅니다. 신사가 나오고, 돌다리가 나오고, 약수터가 나오고, 호수에 떠있는 작은 인공 섬들 그리고 바위들, 키 작은 소나무들을 그리고 다시 모형 후지산을 봅니다. 산을 한 바퀴 돈 셈이네요.

그러고보니 일본식 정원의 멋과 그 한계에 대해 어느 책에선가 읽은 내용이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어요. 지금 이 공원을 봐도, 우선 자연의 요소들 간의 균형 잡힌 배치가 인상적입니다만, 첨 마주쳤을 때가 가장 멋져 보여요. 엽서나 화폭속의 그림 같은. 하지만 다시 보게 되면 재미없어 지는 그런 그림이네요. 뭔가 규격화 된 듯 답답함이 있습니다. 순수한 자연과 비교되는 거 같아요. 자연이라면 언뜻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볼수록 새롭고, 그러다 어느 순간 말이죠, 예를 들면 새소리, 아니면 바람에 나뭇잎 하나 떨어지는 모습에도 이 모든 무질서가 갑자기 완벽하게 경이롭고 신비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해요. 그것은 본디 신비의 영역이란 형상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란 그 형상들을 통해 신비에 닿는 그 순간을 일컫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를 우리는 경이로움이라 한다죠. 그럼, 일본식 정원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시작해서 다만 형상으로 끝나는 거로군요.

지도를 따라가니 구마모토 유스호스텔에 어렵지 않게 도착합니다. 다다미방입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전통적인 단아한 일본여성이십니다. 거실로 안내하시며 따뜻한 석유난로 앞에 앉혀주시네요. 한쪽에 마련된 커피와 포트가 있습니다.

 커피 한 잔 진하게 타서 난로 앞에 바짝 다가가 앉아 불꽃을 바라봅니다. 불과 어젯밤 부산행 기차를 탔고, 배로 일본을 건너와 다시 이곳에 오기까지의 시간이 무자개 길게 느껴지더라구요, 글쎄. 늘 그렇듯이 이 순간에도 이 순간을 실감하기엔 아직 시간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커피를 오래오래 한 모금 한 모금 입안에 두고 느리게 느리게 마십니다. 그러다가 '지금 이 순간 너무 좋아!' 코 끝이 시려오더니 눈물이 핑 도네요. 행복합니다.

 다다미방은 바닥에 온기가 없고 천장에 가까운 벽에 붙어있는 온풍기로 난방을 대신하는 모양입니다. 당장은 싸늘한 느낌이어서 영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더군요. 잠자리를 봐두고는 다시 살그머니 거실로 나옵니다.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 두 분만 사시는 모양이예요. 인기척소리에 아주머니와 아저씨께서 다시 나오시고, 거실에 간단한 다과상을 차려 주세요. 이럴 때 뭔가 간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일이라든가 가족, 뭐라도 이야기를 나누어야할 거 같은데요. 하지만 곧 우리 사이에 언어로는 아무것도 통할 수 없었어요. 말귀를 못 알아 들으니 그 사이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나 봐요. 그걸 나중에 의식하곤 잠시 무안해 지면서 갑자기 깔깔거리며 세 사람이 웃기 시작했어요. 이럴 때 참 통쾌해요. 저는 그냥 아주머니를 껴안고 "아리가또 고자이 마스! 아리가또!"를 연신 읖조렸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며 흐뭇해 하셨습니다. 곁에서 아저씨 역시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서로의 마음을 이미 읽어버린걸요.

  그리고, 일본인의 삶의 원형은 어쩜 일상 생활의 평범함 속에서 찾아야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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