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창가의 단풍 나무 세 그루
단풍나무가 자랄수록 저의 꿈도 함께 자랍니다
출근을 서두르는 아침입니다. 눈을 뜨면 습관처럼 켜는 라디오에서 오늘의 날씨를 전해 줍니다. 오후에 전국적으로 비가 오겠다며 우산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빗물이 들이칠까 열어놓은 창문을 닫으려는데, 창틀에 놓여진 화분의 단풍나무 세 포기가 바람에 한들한들 기분좋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단풍나무 세 포기. 그 단풍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2007년 11월초, 전국 이곳 저곳 흩어져 지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담양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딸과 창원에서 직장을 다니는 남편 그리고 저는 서울에서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의 학교에 방문도 하고, 단풍잎이 곱기로 유명한 백양사의 단풍도 보고싶어 여름부터 남편에게 백양사로의 가을여행을 제의했습니다.
그 해 백양사의 단풍은 소문만큼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줄 지어 선 단풍나무를 보면서 나는 쉬지않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말이 없기로는 남에게 뒤지지않을 과묵한 남편도 단풍나무의 수령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가늠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홍단풍이야기, 애기단풍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백양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을 때에도, 먼 산을 바라볼 때에도, 어느곳으로 눈을 돌리던지 단풍의 선명한 빛은 저의 눈을 가득 채웠습니다. 딸은 미술숙제를 해야 한다며 온전하고 빛깔 고운 단풍잎을 양 손 가득 주웠습니다.
온 가족이 백양사 근처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위해 다시 양으로 가는 길. 양쪽 길 가에 가로수로 심어진 단풍나무는 더욱 화려한 빛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편에게 좀 더 나이가 들면 마당이 넓은 집에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당에는 텃밭도 가꾸고, 저렇게 빛깔 고운 단풍나무 한그루쯤 울타리가에 심어져 있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남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집안에 홍단풍 한 그루쯤 있으면 좋지' 했습니다.
학원에 근무하고 있기에 일반 직장과는 달리 오전 늦으막한 시간에 15분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는 저는, 도보로 출근하는 여러 길 중에서 마포 염리초등학교 옆을 걸어가는 출근길을 좋아합니다.
봄에는 초등학교 앞에 길게 선 벚나무의 벚꽃이 아름답고, 여름이면 학교 옆 담가에 나란히 서 있는 일곱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늘여뜨린 서늘한 그늘이 좋고, 가을이면 수북히 쌓인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걷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그 길이 참 좋습니다.
2008년 8월, 그날도 은행나무 그늘을 지나 학교 옆담을 끼고 뒷길로 막 돌아섰을 때 였습니다. 염리초등학교 담과 보도블럭 사이 틈에 이름모를 잡초와 함께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가 몇포기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곳에서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웠는지 어른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단풍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고 짓밟혀서인지, 서너개의 이파리가 찢겨진 모양새였지만, 아무튼 단풍나무는 단풍나무였습니다.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웬지 망설여지는 그 단풍나무들을 발견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단풍나무를 뽑았습니다. 한 포기 한 포기 뽑다보니 네 포기가 되었습니다.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얻은 양 단풍나무 네 포기를 들고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빈 종이컵을 찾아 들었습니다. 산세베리아가 심겨진 화분 귀퉁이에서 흙을 퍼 종이컵에 담고 단풍나무를 심은 후 촉촉하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학원의 선생님 한분이 묻습니다.
"어머 단풍나무 아니예요? 어디서 났어요? 뭐하시게요?"
"오늘 출근하면서 길에서 뽑아왔어요. 그대로두면 잡초처럼 뽑혀져 버려지거나 사람 발길에 밟혀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것 같아서요. 내가 잡초가 아닌 온전한 나무로 키워 보려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보도블럭 틈에서 단풍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어쩌면 저는 지난 가을여행에서 보았던 백양사의 오래된 수령의 빛깔 고운 단풍나무와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 올렸던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종이컵에 심겨진 단풍나무 네 포기를 집에 가져와 빈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화분을 두고 조심스레 물을 주고는 했지만, 과연 단풍나무가 무럭 무럭 잘 자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후 어느날, 출근을 서두르며 잠시 잊고 있던 화분을 들여다 보았더니, 네 포기 중 한 포기는 바짝 말라버렸고 나머지 세 포기는 서로 소리없는 시합이라도 벌이듯 연한 연둣빛 이파리를 보기좋게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솜털처럼 보드라운 어린아이의 손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단풍나무잎을 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없이 기쁨의 웃음을 지었습니다.
요즘 저는 꿈을 꿉니다. 지금은 비록 작은 화분 속에서 서로의 잎을 부비며 오손 도손 자라고 있는 세 포기의 단풍나무를 보면서.
한 포기 두 포기로 불리우지 않고, 각자 한 그루의 당당한 단풍나무로 우뚝 서기 위해 하루 하루 자라는 크기만큼 저의 꿈도 조금씩 확실한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두 아이들이 다 자라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 후, 남편과 나는 서울이 아닌 어느 한적한 고장에 집은 아담하지만 마당은 제법 넓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당 한켠에는 여러 종류의 채소가 잘 가꾸어진 작은 텃밭도 있습니다. 텃밭 가장자리와 울타리 가에는 계절마다 제 스스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야생화도 있고, 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낮은 울타리가에는 작은 단풍나무 세 그루가 보기 좋게 심어져 있습니다.
강산이 몇 번 더 변했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 어느 늦은 가을날, 저는 우리 아이들의 손주 손녀의 단풍잎같은 손을 잡고 유난히 화려한 빛깔의 단풍나무를 올려다 보며 서 있습니다.
그때 맑고 투명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단풍나무 가지를 흔들고, 울타리 넘어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면 더 기쁘겠지요?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은 어색해 보이는 단풍나무 세 포기. 그 단풍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2007년 11월초, 전국 이곳 저곳 흩어져 지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전남 장성에 있는 백양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담양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딸과 창원에서 직장을 다니는 남편 그리고 저는 서울에서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딸의 학교에 방문도 하고, 단풍잎이 곱기로 유명한 백양사의 단풍도 보고싶어 여름부터 남편에게 백양사로의 가을여행을 제의했습니다.
그 해 백양사의 단풍은 소문만큼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줄 지어 선 단풍나무를 보면서 나는 쉬지않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말이 없기로는 남에게 뒤지지않을 과묵한 남편도 단풍나무의 수령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가늠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홍단풍이야기, 애기단풍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백양사 대웅전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을 때에도, 먼 산을 바라볼 때에도, 어느곳으로 눈을 돌리던지 단풍의 선명한 빛은 저의 눈을 가득 채웠습니다. 딸은 미술숙제를 해야 한다며 온전하고 빛깔 고운 단풍잎을 양 손 가득 주웠습니다.
온 가족이 백양사 근처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위해 다시 양으로 가는 길. 양쪽 길 가에 가로수로 심어진 단풍나무는 더욱 화려한 빛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편에게 좀 더 나이가 들면 마당이 넓은 집에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당에는 텃밭도 가꾸고, 저렇게 빛깔 고운 단풍나무 한그루쯤 울타리가에 심어져 있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남편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집안에 홍단풍 한 그루쯤 있으면 좋지' 했습니다.
▲ 단풍나무출근길에 염리초등학교 뒷길에서 만난 보도블럭 틈사이의 어린 단풍나무 ⓒ 한명라
학원에 근무하고 있기에 일반 직장과는 달리 오전 늦으막한 시간에 15분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는 저는, 도보로 출근하는 여러 길 중에서 마포 염리초등학교 옆을 걸어가는 출근길을 좋아합니다.
봄에는 초등학교 앞에 길게 선 벚나무의 벚꽃이 아름답고, 여름이면 학교 옆 담가에 나란히 서 있는 일곱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늘여뜨린 서늘한 그늘이 좋고, 가을이면 수북히 쌓인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걷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그 길이 참 좋습니다.
2008년 8월, 그날도 은행나무 그늘을 지나 학교 옆담을 끼고 뒷길로 막 돌아섰을 때 였습니다. 염리초등학교 담과 보도블럭 사이 틈에 이름모를 잡초와 함께 자라고 있는 단풍나무가 몇포기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 곳에서 씨앗이 날아와 싹을 틔웠는지 어른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단풍나무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고 짓밟혀서인지, 서너개의 이파리가 찢겨진 모양새였지만, 아무튼 단풍나무는 단풍나무였습니다.
나무라고 부르기에는 웬지 망설여지는 그 단풍나무들을 발견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서 단풍나무를 뽑았습니다. 한 포기 한 포기 뽑다보니 네 포기가 되었습니다.
무슨 소중한 보물이라도 얻은 양 단풍나무 네 포기를 들고 학원에 들어서자마자 빈 종이컵을 찾아 들었습니다. 산세베리아가 심겨진 화분 귀퉁이에서 흙을 퍼 종이컵에 담고 단풍나무를 심은 후 촉촉하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학원의 선생님 한분이 묻습니다.
"어머 단풍나무 아니예요? 어디서 났어요? 뭐하시게요?"
"오늘 출근하면서 길에서 뽑아왔어요. 그대로두면 잡초처럼 뽑혀져 버려지거나 사람 발길에 밟혀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것 같아서요. 내가 잡초가 아닌 온전한 나무로 키워 보려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보도블럭 틈에서 단풍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어쩌면 저는 지난 가을여행에서 보았던 백양사의 오래된 수령의 빛깔 고운 단풍나무와 우리 가족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 올렸던 것 같습니다.
▲ 단풍나무 화분같은 날, 같은 시간 한 집안 한 식구가 된 단풍나무 세포기. ⓒ 한명라
그날 저녁, 종이컵에 심겨진 단풍나무 네 포기를 집에 가져와 빈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화분을 두고 조심스레 물을 주고는 했지만, 과연 단풍나무가 무럭 무럭 잘 자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후 어느날, 출근을 서두르며 잠시 잊고 있던 화분을 들여다 보았더니, 네 포기 중 한 포기는 바짝 말라버렸고 나머지 세 포기는 서로 소리없는 시합이라도 벌이듯 연한 연둣빛 이파리를 보기좋게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솜털처럼 보드라운 어린아이의 손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단풍나무잎을 만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리없이 기쁨의 웃음을 지었습니다.
▲ 단풍나무 화분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벌어지는 성장 속도. 이제 곧 다른 화분으로 분가를 시켜줘야 할 것 같습니다. ⓒ 한명라
요즘 저는 꿈을 꿉니다. 지금은 비록 작은 화분 속에서 서로의 잎을 부비며 오손 도손 자라고 있는 세 포기의 단풍나무를 보면서.
한 포기 두 포기로 불리우지 않고, 각자 한 그루의 당당한 단풍나무로 우뚝 서기 위해 하루 하루 자라는 크기만큼 저의 꿈도 조금씩 확실한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두 아이들이 다 자라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 후, 남편과 나는 서울이 아닌 어느 한적한 고장에 집은 아담하지만 마당은 제법 넓은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당 한켠에는 여러 종류의 채소가 잘 가꾸어진 작은 텃밭도 있습니다. 텃밭 가장자리와 울타리 가에는 계절마다 제 스스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야생화도 있고, 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낮은 울타리가에는 작은 단풍나무 세 그루가 보기 좋게 심어져 있습니다.
강산이 몇 번 더 변했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 어느 늦은 가을날, 저는 우리 아이들의 손주 손녀의 단풍잎같은 손을 잡고 유난히 화려한 빛깔의 단풍나무를 올려다 보며 서 있습니다.
그때 맑고 투명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단풍나무 가지를 흔들고, 울타리 넘어 멀리까지 퍼져 나간다면 더 기쁘겠지요?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 블러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