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내일은 조금 덜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전남 담양 교육연수원에서 보내는 편지(3)

등록|2009.03.21 14:11 수정|2009.03.22 18:17

영어심화연수 전남교육연수원에서 읽은 영문판 서적들. 대개는 비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쉬운 영어로 줄거리만 간추린 것이어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다. ⓒ 안준철


봄입니다. 어제도 봄이었고 오늘도 봄입니다.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하루하루가 매일 봄이겠지요. 일년을 사계절로 구분하여 지금 이 꽃 시절을 우리는 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계절의 순환을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봄 다음에 여름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어제의 봄 다음에 또 오늘 봄, 그리고 내일의 새로운 봄이 온다는 사실은 잘 알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곳 연수원도 봄이 한창입니다. 매화와 산수유가 앞을 다투어 피더니 지금은 목련과 개나리도 덩달아 난리입니다. 연수원 뒷산(성산)에 올랐더니 노란 생강나무가 일 년 만에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 오기도 했습니다. 생강나무가 피었으니 진달래가 피는 것은 금방이겠지요. 요즘은 꽃 보는 재미로 매일 아침 지름길을 버리고 산길을 지나 식당으로 갑니다.  
       
아침에 식당에서 원어민들을 만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나눕니다. 하루는 원어민 Pill과 이런 식으로 인사를 나누었지요. 
 
"Hello, Mr. Ahn."
"Hello. Pill."
"How are you?"
"Too happy."

"too happy."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너무 행복해요.'가 됩니다. 말이 될 것도 같은데 사실은 틀리거나 어색한 표현입니다. 이런 경우는 'so happy'라고 해야 맞습니다. 우리말 표현으로는 '정말 행복해요.'나 '너무 행복해요.'나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too'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요.  

그걸 알면서도 제가 "too happy."라고 한 것은 지금 제 행복이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너무 행복한 것이 조금은 저의 건강에 좋지 않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에서 부정적 의미가 담긴 'too'를 쓴 것이지요. Pill과는 워낙 허물없이 지내다보니 '쿵'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린 줄 압니다.            

전남교육연수원 영어심화연수 3주째 일정을 마감하는 지난 금요일 오후 마지막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유머 감각(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신소리를 잘하는)이 남다른 원어민 Keven이 "Mr. Ahn."하고 저를 호명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갈지(之)자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전날 수면을 충분히 취하지 못한 탓으로 몸이 많이 피곤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걸음걸이가 뒤틀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가 발표할 내용과 연관된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것이었습니다. 

"Good afternoon, everyone! Today, you know? I'm a little, umm…tired and sad."
(안녕하세요! 오늘 저, 조금 음… 피곤하고 슬픕니다.)

영어에는 읽기(Reading), 말하기(Speaking), 쓰기(Writing), 듣기(Listening) 네 가지 기술(skill)이 있습니다. 그날 Keven의 수업은 말하기 기술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말이 도중에 끊어지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사이사이에 의미 없는 말(a filler: you know, umm… 등)을 집어넣는 그런 별스럽고 재미있는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었습니다.

화자가 청중들과의 교감을 위해 가끔씩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한 기술 중 하나입니다. 그날 저와 동료영어교사들과의 사이에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제가 피곤한 것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잠을 자지 못했을까요?"
"저 때문인가요?"
"아니오. 그대(you)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잠자리에 불편해서요?"
"아니요. 사실은 너무 행복(too happy)해서입니다. 그런데 제가 잠을 자지 못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빙고!"

일종의 연애소설인 '폭풍의 언덕'은 만 서른 살에 요절한 영국의 소설가 겸 시인인 에밀리 브론테가 남긴 단 한편의 유일한 작품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이 고교시절이었는지, 대학시절이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그날도 책을 읽다가, 혹은 책장을 덮고 난 뒤에 잠을 설쳤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 후 적잖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이 지경인데, 과도한 낭만성이랄까 문학적 감수성이랄까 하는 것이 몸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시절이니 오죽했을까 싶은 것이지요. 
  
제가 읽은 영문판 폭풍의 언덕은 비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줄거리만 간추려서 쉽게 다시 씌어진 책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하루나 이틀만에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그런 분량이지요. 하지만 밤늦게까지 진행되는 빡빡한 연수 일정과 다음날 수업 준비 때문에 닷새 정도 잡아 읽을 요량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바로 다음 대목을 접한 순간 눈이 번쩍 띄였습니다. 갑자기 잠이 사라지고 만 것이지요.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넬리,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He is more myself than me).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똑같아. 하지만 린튼의 영혼은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이 다르듯 우리와는 다르지."

3월 2일부터 8월 21일(1개월 해외연수 포함)까지 운영될 전남교육연수원 6개월 영어심화연수 프로그램에는 Reading Club(독서클럽) 시간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영문판 도서를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이나, 혹은 인상적인 대목이 나오면 그 인용문을 노트 왼 편에 적고, 노트 오른 편에는 이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어두었다가 Reading Club 시간이 돌아오면  원어민 강사를 만나 그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그런 형식입니다.

쉬운 영문판 소설이나 에세이를 꾸준히 읽는 것이 영어구사능력을 키우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책상에는 읽어야할, 아니 읽고 싶은 책이 세 권이나 놓여 있습니다. 그 중 두 권은 연애소설입니다. 그 책이 자꾸만 눈에 띄어 오늘 편지는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접어야할 것 같습니다.

아, 오늘도 새로운 봄이 왔고, 내일도 또 봄이 올 것입니다. 또한 오늘 읽은 책과 작별하면 내일은 또 다른 책이 저를 기다릴 것입니다. 소설 속이긴 해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아리따운 여인이 지금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일은 조금은 덜 행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수가 6개월 일정인데 좀 천천히, 그리고 오래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