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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지역의 문화유적 찾기(2)

영월암과 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

등록|2009.03.21 14:27 수정|2009.03.21 14:27
이천지역의 불교 유적은 볼거리가 너무 많아 외지에서 찾으면 하루 만에 다 둘러 보지 못할 정도이다. 지정된 유적은 얼마 되지 않지만 알려지지 않은 비지정 문화재는 더욱 더 그러하다.

이평리 석불입상

덕평 나들목에서 청강대학으로 가는 진입로를 가다 왼쪽 도로변에 이평 한우촌이란 식당이 보인다. 바로 옆 도로변 노천에 있다.

이평리 석불입상이평리 석불입상은 이평 한우촌 옆에 있다. ⓒ 김환대



이 석불은 무릎 밑이 절단되어 있거나 아님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얼굴이 마멸되어 불완전한 편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된다. 미륵불로 불리며 얼굴은 길고 풍만하여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 붙어 어깨가 내려오고 있어서 목은 보이지 않는다. 두 손을 앞에 댄 부자연한 모양과 가슴 두꺼운 통견의 법의는 경직되어 보인다.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

설봉서원

이천시 관고동 산에 위치한 보물 제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은 영월암 뒤편에 있다. 아래는 설봉공원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설봉서원이 도로변에 있다. 현재 복천 서희 선생, 율정 이관의 선생, 모재 김안국 선생, 소요재 최숙정 선생 등 네 분을 모신 설봉서원은 조선 13대 명종 19년(1564)에 이천 부사였던 정현공이 유림의 공의에 따라 지금의 이천시 안흥동 주변에 세운 서원으로서 당시에는 안흥정사라 불리우다가 선조 25년(1592)에 설봉산 아래로 옮기면서 설봉서원으로 되었다고 한다.

설봉서원설봉서원은 영월암 아래에 있다. ⓒ 김환대



현재 건물들은 근래에 다 복원된 건물이다.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영월암 대웅전 뒤편에 높이 8m의 자연 암석을 다듬고 바위면 전체에 꽉 채워 조각한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와 양 손은 얕은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고 옷 주름 등은 선으로 조각되었다.

원만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며 지그시 감은 듯 한 눈과 굵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에서 힘차고 후덕한 고승의 느낌을 갖게 한다. 양 손은 가슴에 모아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으며, 손바닥이 밖을 향하고 있는 설법하는 모양이다.

영월암 마애불영월암 마애불 ⓒ 김환대



영월암 마애불 입상영월암 마애불 ⓒ 김환대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부드러운 사선을 그리며 흐르고, 끝에서는 지그 재그 모양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옷주름선은 소박한 모습이며, 스님의 얼굴에 어울리는 은은한 덕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한이나 고승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유례가 드문 형태이다. 마애불 아래 계단에는 복원된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옆으로는 석조광배와 연화대좌가 있는데 새로 광배 앞에 불상을 제작해 놓았다.

영월암 석불좌상과 광배영월암 석불좌상과 광배 ⓒ 김환대



영월암 석불좌 대좌영월암 석불좌상 대좌의 가릉빈가 ⓒ 김환대



광배와 대좌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특히 안상 속에 새겨진 가릉빈가나 연화문 표현은 조각이 아주 우수하다. 장방형의 석조도 있어 사찰의 역사를 엿 볼 수 있다.

삼형제 바위

이천 9경 중 3경이며, 설봉산 중턱에 있는 바위로 효성이 지극한 삼형제의 전설이 전해진다. 오랜 옛날 가난한 집에 늙은 어머지와 우애, 효성이 지극한 삼형제가 살았는데, 어느 날 설봉산으로 나무를 하러간 세 아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산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들은 어머니가 없자 산으로 갔고 온 산을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니 수십길 낭떠러지 아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쫒기고 있는 것이었다.

삼형제 바위삼형제 바위 ⓒ 김환대



삼형제 바위삼형제 바위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 ⓒ 김환대



 이를 발견한 삼형제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똑같이 절벽을 뛰어내렸는데 그 순간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내려오는 길과 올라가는 길은 등산로처럼 잘 정비되어 있어 편하며 내려오는 길 가에는 탑재의 갑석도 보인다. 차로 올라가는 것 보다 등산로로 올라가면 가볍게 몸도 운동이 된다.

관고동 5층 석탑

 설봉 저수지 서쪽 이천 시민의 탑 옆에 있으며 원래는 관고리 저수지 윗쪽 밭에 도괴되어 각 부재가 흩어져 있던 것을 1978년에 수습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관고동 오층석탑관고동 오층석탑은 설봉 공원내에 있다. ⓒ 김환대



 4개의 몸돌이 모두 없어진 채 단층 기단 위에 1층 몸돌이 놓여 있고, 그 위에 5개의 지붕돌이 쌓여 있는데 이 부재들이 모두 동일 석탑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전체적인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석리 석불입상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연화정사 경내의 노천에 있는데 예로부터 이곳은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 눈 · 코 · 입이 작게 표현되어 있고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자석리 석불입상자석리 석불입상은 연화정사내 있다. ⓒ 김환대



고려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관음보살이 용을 타고 가는 그림이 작은 법당에 그려져 있다. 아마 용왕당으로 보이나 수정각이란 현판이 걸려 물과 관련된 법당으로 추정된다.

수정각연화정사내 수정각 그림 ⓒ 김환대




관고리 석불입상

 이천 소방서 옆에 있으며 미륵골이라 불리던 산골짜기 안의 밭 중앙에 위치해 있던 것을 87년 12월 18일 현재 법왕정사 경내로 옮겨다 놓았다고 한다.

관고동 석불입상관고동 석불입상 이천 소방서 옆 법왕정사에 있다. ⓒ 김환대



관고동 석불입상관고동 석불입상 옷주름과 손 표현 ⓒ 김환대



 이 석불은 규모가 큰 여래입상으로 머리는 나발로 작은 육계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는 원만하다. 귀는 매우커서 양어깨에 까지 길게 흘러내렸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손은 옆으로 곧게 펴서 내리고 왼손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배 앞 부분에서 구부렸는데, 몸체에 비해 손이 큰 편이며 이 지역 지방의 불상 특징으로 보인다. 등 복판에는 사각 구멍이 뚫려 있는데, 두광을 장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학자에 따라 고려 초기에서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도로변에 보물 제982호 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커다란 화강암벽 전면에 걸쳐 얕게 돋을새김 한 고려시대 마애보살상이다. 높은 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관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로 보인다.

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 ⓒ 김환대



반가상의 자세로 오른발은 내려 대좌 위에 놓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보살상이 새겨진 바위 뒷면에는 명문이 적혀 있어 고려 경종 6년(981)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태평 흥국명 마애보살좌상 바위면 명문 ⓒ 김환대



전반적으로 지방색이 짙고 조각 기술이 다소 떨어지지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천의에, 높은 보관을 쓰고 연꽃 가지를 손에 든 독특한 형식으로 김천 광덕동 석조 보살입상(보물 제679호)과 고령 개포동 마애보살상과 함께 비교되는 중요한 불상으로 보인다. 현재 보존처리 중에 있다.

이천지역에는 이외에도 많은 불교 유적이 있으나 다 둘러볼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고 돌아온다. 지방화된 불상이 많아서인지 다들 저마다 특징이 보이며, 그 형태들은 다소 다 독특한 표현을 하고 있어 눈여겨 볼 만하였다. 이천지역 불상을 찾아서란 테마로 몇 차례 더 둘러보러 가야 할 곳 같다.  오는 길에 식사로 이천 쌀밥을 먹고 돌아왔다.

이천 쌀밥이천 쌀밥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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