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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입맛을 위해 '숫처녀'가 된 아내

"자기 냉잇국 끓여주려고 어제 캔 거예요"

등록|2009.03.23 10:09 수정|2009.03.23 10:12
"봄이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
나물 캐러 간다고 아장아장 들로 가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아리랑타령이 절로 난다 흥~"

영화배우 최민수씨 외할아버지(故 강홍식)가 불러서 대 히트했던 유행가 '처녀총각'의 1절 가사입니다. 어렸을 때 귀가 따갑도록 듣던 노래인데요. 작고한 원로코미디언  서영춘·백금녀 콤비가 불렀던 노래라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 병원 뒷산에서 캐온 냉이를 다듬는 아내. 잊어버릴 만하면 티격태격 하지만 이제부터는 ‘남편 입맛을 위해 숫처녀가 된 아내’로 불러야 할 모양입니다. ⓒ 조종안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봄철 음식이 미식가들의 입맛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해산물로는 주꾸미와 꽃게, 조기 등이 입맛을 돋우고, 겨우내 얼어 있던 땅에서는 냉이와 달래, 상추 등 상큼한 봄나물과 싱싱한 채소가 도망간 밥맛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춘분(春分)이 지나면 밤보다 낮이 길어지고 활동량이 증가하면서 겨울보다 비타민 소모량이 5배 이상 늘고, 다른 영양소 요구량이 많아져 나른함과 피곤함을 자주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춘곤증이라고 하지요.

일에 의욕을 잃고 짜증만 느는 춘곤증은 끼니를 거르지 말고, 몸에 맞는 적당한 운동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식사가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요. 봄나물로는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고 입맛도 되찾아주는 냉이, 달래, 씀바귀 등이 좋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제 밥상도 봄나물과 채소가 빠지지 않는데요. 시금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을 일주일 가까이 먹고 있습니다. 국물에 찹쌀고추장을 조금 풀면 개운한 맛이 더하는데요. 맛이나 영양가를 따지기에 앞서 소화가 잘 되고 뱃속이 편해서 좋습니다.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고 합니다. 일일이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많지만, 다이어트와 춘곤증에 좋다는 된장과 봄나물은 하늘이 내린 짝꿍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물을 무칠 때나 국을 끓일 때나 된장이 빠지면 제 맛을 낼 수 없으니까요. 

예로부터 우리 조상은 '소가 먹어서 탈이 없는 풀(草)은 사람이 먹어도 몸에 해롭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산과 들에서 나는 풀 한 포기도 우리 건강을 지켜주는 소중한 먹을거리입니다. 정성이 깃든다면 보약에 버금가는 음식이 될 것입니다.

아내가 병원 뒷산에서 캐온 냉이

냉이에 대해 얘기하려니까, 고향동네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나승구'라는 친구가 떠오르네요. 냉이를 '나숭개'라고도 하는데요, '나숭개나물'이라고 부르며 놀려댔거든요. 40대 중반까지도 집에 놀러 왔었는데 소식을 몰라 궁금합니다. 

▲ 아내가 무쳐놓은 ‘냉이무침’. 된장과 고추장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서 다가오는 쌉싸래한 맛은 별미 중에 별미였습니다. ⓒ 조종안


어제는 퇴근하는 아내가 현관을 들어서면서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큰 소리로 부르더군요. 깜짝 놀라 스프링에서 튀어 오르는 고무공처럼 벌떡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급히 열고 얼굴이 마주치니까, 무언가 가득 담긴 시커먼 비닐봉지를 번쩍 들어 보이며 웃고 있었습니다.

"어, 그게 뭔데 그래?"
"응, 이거? 냉이에요 국 끓여 먹는 냉이. 자기가 된장국 좋아해서 냉잇국 끓여주려고, 어제 낮에 김 여사하고 병원 뒷산에서 캔 거예요." 

엊그제 아내가 출근하면서 "며칠을 계속 집에서 출·퇴근 했더니 몸이 피곤하네, 쓰던 글 마무리도 해야 하니까, 하루는 못 올 것 같네요"라고 했을 때는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냉이를 보는 순간, 고마운 마음으로 바뀌더군요. 그런 게 사람 마음인 모양입니다.

"하이고, 올봄에도 시금칫국만 먹고 지나가는가 혔는디, 상큼한 냉잇국 먹어보겠네그려. 그런디 병원에도 나물이 자랄만한 장소가 있남?"

"그럼요, 병원에서 조금만 나가면 봄나물이 지천인 들녘이거든요. 김 여사는 '땅이 좋아서 질기지 않고 맛도 좋을 것 같다'면서, 내가 자기 냉잇국 끓여주려고 캔다니까, '신랑에게 그렇게 잘하느냐?'며 웃더라고요."

"그럼 자기는 냉이로 열녀가 됐고 '나물 캐러 가는 숫처녀'도 됐다는 얘기네··· 하하. 하여간 맛있게 끓여보라구, 고맙게 실컷 먹어줄 거니까." 

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내는 TV 앞에 앉아 냉이를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보는 광경이지만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고,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들녘에서 댕기를 늘어뜨린 채 쪼그리고 앉아 나물 캐는 숫처녀를 상상하며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비용이 안 드는 꿈과 상상은 자유이니까요.

그런데 저녁을 먹으면서 보니까 냉잇국이 아니라 냉이무침을 해놓았더라고요. 시금칫국이 많이 남아 있는 걸 보고 나물을 무쳐놓은 것 같았는데요. 정성이 담긴 음식이라서 그런지 맛이 더욱 상큼하고 향도 좋았습니다.  

결혼해서 10년이 넘도록 셋째 누님이 김치를 담가줄 정도로 요리와는 담을 쌓고 지낸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는 누님들 솜씨를 앞지르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머니 손맛을 이어가는 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요. 쌉싸래한 냉이무침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결혼해서 27년 살아오는 동안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가가 시골이지만, 어렸을 때 나물을 캐러 다녔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거든요. 닭살이 돋을 것 같아서 아내에게 전화는 못 하겠고, 기록하는 것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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