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71) 깜빡쟁이

[우리 말에 마음쓰기 587] ‘남는돈-잉여금’,‘다섯 가지-오대 요소’

등록|2009.03.23 15:21 수정|2009.03.23 15:21

ㄱ. 깜빡쟁이

.. "맞다, 요츠바, 초대받았지." "응! 요츠바, 초대받았어." "그래, 내일이었군. 아주 깜빡하고 있었는데." "아빠는 깜빡쟁이구나." ..  《아즈마 키요히코/금정 옮김-요츠바랑! (8)》(대원씨아이,2009) 33쪽

 어떤 일을 잘 '잊어버리는' 사람을 두고 '건망증'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주자주 잊어버리면 건망증이 심하다고 합니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다"는 말도 쓰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건망'과 '건망증'이라는 낱말 씀씀이가 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건망(健忘)
 │  (1) 잘 잊어버림
 │  (2) = 건망증
 │   - 요즘에는 건망이 더 심해져서 걱정이다
 ├ 건망증(健忘症) : 경험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느 시기 동안의 일을
 │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드문드문 기억하기도 하는 기억 장
 │   - 건망증에 걸리다 / 건망증에 빠지다
 │
 ├ 깜빡쟁이 / 깜박쟁이
 ├ 잊기쟁이 / 잊음쟁이
 └ 까마귀 고기를 먹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말을 잊는 줄'도 모르면서 우리 말을 잊습니다. 우리 글을 잃는 줄조차 모르며 우리 글을 잃고 있습니다. 대입논술에 따르는 글쓰기 학원은 있어도, 우리 삶을 북돋우는 글쓰기 가르침이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무엇을 나누면 좋을까를 잊었기 때문일까요.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 하나 이어받은 가운데 다 함께 어우러지면서 무엇을 즐기면 좋을까 하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일까요.

 깜빡해 버리는 사람이라 '깜빡쟁이'입니다. 깜박깜박한다면 '깜박쟁이'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건망증이 심하다면 '건망증자'일까요? 아니면, '건망증 환자'일까요?

 으레 잊기 마련이라 '잊기쟁이'입니다. '잊음쟁이'이기도 합니다. 깜빡하기에 '깜빡쟁이'요, 잊어버리니 '잊기쟁이'이듯, 생각을 잘하면 '생각쟁이'요, 슬기로운 마음을 품으며 살아간다면 '슬기쟁이'입니다.

 꿈 같은 소리일는지 모르나, 우리 스스로 깜빡쟁이나 잊기쟁이가 아닌, 생각쟁이나 슬기쟁이로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깜박쟁이나 잊음쟁이가 아닌, 꿈쟁이나 살림쟁이로 새로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키우고 생각을 여미며 슬기를 북돋우는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ㄴ. 남는돈

.. 아마 기업가는 갈수록 재산이 불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남는 돈을 가지고 다른 곳에도 투자하기 시작할 거예요 ..  《강수돌-지구를 구하는 경제책》(봄나무,2005) 167쪽

 "불어날 것입니다"는 "불어나게 됩니다"나 "불어나리라 봅니다"나 "불어날 터입니다"로 다듬습니다. "투자(投資)하기 시작(始作)할 거예요"는 "쏟아붓게 됩니다"나 "쏟아부을 터입니다"나 "쏟아붓겠지요"로 손질합니다.

 ┌ 남는돈 : 남게 되는 돈. 남아서 넉넉히 더 쓸 수 있는 돈
 ├ 잉여(剩餘) : 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로 순화
 │   - 잉여 물자 / 잉여 농산물
 ├ 잉여금(剩餘金) : 기업의 자산 가운데에서 법으로 정해진 자본금을 초과하는
 │    금액. '남은 금액', '남은 돈'으로 순화
 │
 ├ 잉여자산
 └ 잉여재산

 남기에 '남는돈'입니다. 또는 '나머지 돈'입니다. 그러나 이 낱말 '남는 돈'은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남게 되는 돈"을 한자로 옮긴 '잉여금'이라는 낱말은 국어사전에 실립니다. 그러면서 토가 붙습니다. '잉여금'은 '남은 금액'이나 '남은 돈'으로 고쳐쓰라고.

 '금액(金額)'이란 "돈 크기"를 가리킵니다. 이 자리에서는 '돈'과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남은 금액"이나 "남은 돈"이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굳이 이렇게 갈라 쓸 까닭이 없습니다.

 ┌ 남은돈 / 남는돈
 ├ 나머지돈
 └ 남게 된 돈 / 남아도는 돈

 경제를 하건 정치를 하건 말로 생각을 펼칩니다. 나라살림을 꾸리건 집살림을 꾸리건 우리 살림입니다. 우리가 가꾸는 삶터요 우리가 어우러지는 삶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삶터에서 우리 삶을 보듬는 동안 우리가 나눌 말이란 '우리 말'입니다. '다른 나라 말'이나 '바깥말'이 아닌 '이 나라 말'과 '이 땅에 뿌리내린 말'로 생각을 주고받으면서 함께할 노릇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삶터를 가꾸고 있지요? 우리는 어떤 말로 생각을 나누고 있지요? 우리 삶터는 날마다 어떤 모양새로 달라지고 있는가요? 우리는 어떤 말에 우리들 생각과 자취와 일놀이를 실어 보이고 있나요?

 "잉여금 = 남은돈"이라고 가르치는 우리들입니다. 처음부터 "남은 돈이니 '남은돈'이라 하면 되겠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가르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글 하나를 써도 '글쓴이'나 '글쟁이'나 '글꾼'이 아닌 '文筆家'요 '라이터(writer)'입니다. 글 하나를 썼으나 '글'이 아닌 '隨筆'이나 'essay'나 '文章'이 됩니다.

 껍데기가 넘칩니다. 겉치레가 득시글거립니다. 겉껍데기가 흐릅니다. 겉발림이 가득합니다. 꾸미고 바르고 감추고 속이는 글이 온통 휘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눈은 껍데기와 겉발림을 알아채지 않습니다. 알아채려고도 않습니다. 어쩌면 껍데기만으로도 흐뭇하다고 느끼고, 겉발림이 한결 즐겁다고 여기는지 모릅니다. 알맹이를 맛본 적이 없어 알맹이로 가닿지 못하고, 속알이 어떤 맛인가 느껴 보지 못하여 속알을 차리는 길을 안 걷는지 모릅니다.


ㄷ. '다섯 가지'와 '오대 요소'

.. 그것은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인 '몸, 감수성, 상상, 행동, 의식' 등은 모두 고정된 실체가 없고 원인과 그것에 따라 일어나는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체가 실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야마오 산세이/이반 옮김-여기에 사는 즐거움》(도솔,2002) 231쪽

 "인간(人間)을 구성(構成)하고 있는"은 "사람을 이루고 있는"이나 "사람을 이루는"으로 다듬고, '등(等)'은 '들'로 다듬으며, "고정(固定)된 실체(實體)가 없고"는 "붙박힌 모습이 없고"로 다듬습니다. '원인(原因)'은 '까닭'이나 '뿌리'나 '바탕'으로 손보고, "인연(因緣)에 의(依)해"는 "인연에 따라"나 "만남으로"로 손봅니다.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는 "만들어지기 때문에"로 손질하고, '실(實)은'은 '알고 보면'이나 '가만히 보면'으로 손질하며, "없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는 "없음을 뜻한다"로 손질해 봅니다.

 보기글을 통째로 고쳐써 봅니다. "이는 우리 사람을 이루는 다섯 가지인 '몸, 마음, 생각, 몸짓, 느낌' 들은 모두 어느 하나로 못박히지 않고, 어떤 뿌리와 이에 따라 맺어지는 만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참모습은 알고 보면 없음을 뜻한다"쯤으로. 그러나 이렇게 고쳐쓰고 다시 읽어 보지만, 글쓴이가 처음 말하려고 했던 뜻을 고이 담아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일본말을 우리 말로 옮길 때에 좀더 우리 한국사람 넋과 얼을 우리 말과 글로 실어내려고 애써 주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좀더 찬찬히 느끼고 샅샅이 살피어, 글 한 줄이라 하여도 오래도록 곱씹으면서 풀어내 주었다면 얼마나 반가웠으랴 싶습니다. 얄궂거나 아쉬워 보이는 낱말이 드러나는 일도 말썽이지만, 나라밖 글쓴이가 무엇을 나누고 싶어서 이러한 글을 썼는지 곰곰이 되돌아볼 수 있게끔, 옮긴이 스스로 몇 번씩 거듭거듭 마음을 쏟고 땀을 바치고 품을 들여 주었어야지 싶습니다. 일본말 못지않게 한국말을 익히고, 일본 문화 못지않게 한국 문화를 꾸준히 새로 배워야지 싶습니다.

 ┌ 다섯 가지 요소 (△)
 ├ 다섯 가지 (o)
 ├ 다섯 가지 큰 대목 (o)
 │
 ├ 다섯 요소 (△)
 └ 5대 요소 (x)

 책을 읽다가 이 글월 하나에서 오래도록 눈이 머뭅니다. 옮김말이 영 아쉽기도 했지만, 얄궂은 낱말과 글월 사이에 낀 "다섯 가지 요소"라는 대목에서 생각을 가누어 봅니다. "다섯 가지 요소(要素)"에서 '요소'는 '가지'와 같은 뜻으로 쓰여 겹말이니, "다섯 요소"나 "다섯 가지"로 고쳐써야 합니다. 그러나 '다섯'이라 하고 '5대(五大)'라 안 한 대목은 반갑습니다.

 ┌ 세 가지 영양소 ← 3대 영양소
 ├ 두 리그 ← 양대 리그
 ├ 일곱 가지 수수께끼 ← 7대 불가사의
 └ …

 문득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뒤적여 '칠대(七大)'를 찾아봅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낳는 일곱 가지 요소"라고 풀이말이 달립니다. '오대(五大)'도 실렸나 궁금하여 다시 뒤적입니다. "모든 물질에 널리 존재하여 물질을 구성하고 생성하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의 다섯 가지 큰 요소"라고 풀이말이 달립니다. 두 풀이말 모두 "일곱 가지 요소"와 "다섯 가지 요소"라고 적힙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부터 겹치기입니다.

 국어사전을 덮고 책을 덮습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가슴에 북받치고 올라옵니다. 번역을 한다는 사람이나 국어학을 한다는 사람이나 매한가지로군요. 글을 쓴다는 사람이나 책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람이나 매한가지일까요. 글을 써서 신문을 내고 말을 하며 방송을 엮는 사람이나 매한가지일까요.

 무엇이 옳은 줄 모르고, 무엇이 바른 줄 모르며, 무엇이 알맞는 줄 모르는 이 굴레는 이 모습 그대로 우리 말 문화요 우리 삶자락이라고 여겨야 할는지요. 무엇이 그른 줄 모르고, 무엇이 잘못인 줄 모르며, 무엇이 어긋난 줄 모르는 이 쳇바퀴는 이 모양 그대로 우리 터전이요 우리 매무새라고 생각해야 할는지요.

 제길을 잃은 말과 제자리를 잊은 글은 제때 제뜻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제대로 제걸음을 걸으며 제날 제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언제나 제자리걸음입니다. 아니, 뒷걸음입니다. 옆걸음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