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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촌지 받아 보셨어요?"

요즘 아이들 당돌하게 대놓고 묻는다

등록|2009.03.25 09:28 수정|2009.03.25 09:32
새학기마다 하는 고민들 - 올해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종합선물 세트바구니에 갖가지 차종류와 껌에 비스킷까지 다양한 선물. 세심하게 신경썼음이 느껴진다 ⓒ 송진숙


새학기라 부모님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걱정이 많은 시기인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할 테고 입학을 시킨 경우엔 학교생활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것은 아이 못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학부형총회가 있었다. 어머님들이 많이 오셨다. 아버지는 한 분도 안 오신 걸로 안다. 그 중 한 분이 회의 전에 먼저 상담을 하시겠다고 날 찾아 왔다. 예쁜 바구니를 안고 오셨다. 친절히 열어서 보여 주셨다. 갖가지 차 종류, 한과 몇 개, 껌, 레모나 1봉지, 비스켓 과자 1개 등 다양한 것을 채워서 오셨다. 같이 나눠 먹으라는 뜻으로 알고 고맙다고 했다.

선물상담이 끝날 무렵에 내려 놓은 쇼핑백 ⓒ 송진숙


아이에 대해서 이것 저것 물어봐서 대답해 드렸는데, 끝날 무렵쯤 쇼핑백 하나를 내려 놓는다. 별 뜻없이 받아들며 고맙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용물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미처 못했다. 이 분은 찾아 뵐 분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셨다. 그때서야 아차 싶어 쇼핑백을 확인해보니 지갑이 있었다. 지갑을 열어봤더니 만 원짜리 신권이 들어있었다. 세 보진 않았지만 대략 20만 원쯤 되어 보였다.









고민할 것 없이 꺼내서 흰 봉투에 넣었다. 휴대전화를 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이어서 차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만나서 봉투를 재킷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촌지, 안 주고 안 받자

촌지지갑 안에 빳빳한 신권이 들어 있었다 ⓒ 송진숙


"교직 그만 두는 날까지 받을 수 없어요. 20년 이상 되었지만 받아본 적 없어요. 저의 이런 의지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어머님."


"죄송해요. 제가 결례를 했나봐요. 제가 일 때문에 바빠서 아이도 못챙기고, 모시고 식사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식사 한 끼 하시라는 뜻이었는데…."

"이 동네에 제 소문이 아직 안 났나요? 허긴 이번 학교에선 담임 하는 게 두 번째라서 소문이 돌지 않았나 보네요. 어머님 뜻 오해하지 않고 좋은 뜻만 감사히 받을게요."

홀가분했다.

내 아이가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지금은 둘 다 고등학교를 마친 상태임) 가끔 담임선생님의 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믿음이 갔다. 필자도 학부모님들께 학급경영관이나 촌지 근절에 대해서 통신을 보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이 둘을 졸업시키는 동안, 봄에는 쑥 뜯으면 쑥인절미 해서 나눠드시라고 넉넉히 보내 드렸고, 요즘처럼 진달래 필 때는 찹쌀가루에 진달래꽃 넣은 예쁜 화전 부쳐서 도시락에 보내드리고, 밤 나올 땐 밤을 쪄서 보내 드리기도 했다.

필자 어릴 적에(1960년대) 엄마는, 농사짓는 촌아낙이 드릴 게 뭐 있을까마는 공부좀 한다는 딸 면이라도 세워주시려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어리숙한 늦둥이 딸을 가르쳐주시느라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이 고마우셨는지 한여름에 참외 한 바구니 이고 학교에 찾아오셨던 적이 있었다.

어느 때고 마음은 성의는 이처럼 늘 같은 것 아닐까? 한 번은 큰 아이 고등학교 때 담임샘께 고맙다는 짤막한 편지와 초콜릿 선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소한 선물에 감동하신 담임선생님의 답장이 고마왔다. 선물이란 서로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진정한 선물이지 않을까 한다.

요즘엔 굳이 학부모님께 통신문을 일일이 보내지 않아도 정보를 많이 접해서 그런지 이런 일들이 별로 없었고 또 이런 경우 한 번만 돌려 보내면 일 년이 편안했다. 고민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쯤 되면 아이들이 더 잘 파악한다. 어떤 사람인지.

담임 안 할 땐 이런 일로 신경쓸 일이 없어서 편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담임을 맡은 경우에도 한 번만 이렇게 돌려 보내고 나면 소문이 나서, 거절하고 서로 찜찜해할 일도 없다.

아직도 촌지를 주고 받는 우리사회, 언제쯤 달라질까?

초임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초임발령은 전북 계화군의 한 학교로 났다. 그 당시만(1986년 무렵) 해도 가정방문이 거의 의무적(?)이어서 대부분의 담임교사는 3월에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가정방문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가정방문 할 아이의 집에 아이와 같이 가보면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학부모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만난 학부모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둑어둑해져 귀가하려는 젊은 선생인 내게 학부모는 일하던 손으로 차비하라고 천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신다. 싫다고, 아니라고 거절을 해도 택시를 잡아 태워주시며 차 안으로 돈을 넣어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고창에 있을 땐(칠거리수박이라는 상표로 유명한 곳이다) 학부모가 큼지막한(12-13Kg정도) 수박 두어덩이를 보내오면 삼사십 명의 교직원이  한여름의 더위를 한방에 날릴 수 있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싱그러운 수박을 먹으며 고마워했던 시절이다. 고창은 짧게 머물러서 그런 기쁨을 한두 번밖에 맛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여름이면 그 시절이 생각나 침이 삼켜지곤 한다.

그리고 몇 년후 서울로 오면서 다짐을 했다. 언제 관둘 지 모르지만 촌지는 안 받겠노라고!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 몇 년을 더 할 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지켜지리라 믿는다. 내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가르치는 아이에게도 웃으며 두 눈 마주치며 얘기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당돌하게 대놓고 묻는다.
"샘 촌지 받아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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