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달여 전에 출연했던 모 방송국의
퀴즈 프로그램 출연료가 어제 마침내 입금되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설과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그건 당초 예상했던 액수가 아니라 겨우 54,260원의 소액인 때문이었다.
예상과는 사뭇 달리 너무도 적은 액수였기에
나의 고심은 다시금 심연처럼 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어제 통장으로 들어온 모 퀴즈 프로그램의
출연료가 최소한 기십만 원은 되리라 예상하였던 바
그 금액 모두를 아들에게 용돈으로 주리라고 미리부터 호언장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겨우 6만 원도 안 되는 액수였으니
어찌 아들을 보기에도 면구스럽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튼 어제 퇴근길엔 은행에 들러 비록 '대실망'의
저액(低額)이나마 그걸 인출하여 약속한대로 아들에게 주기는 했다.
"방송에 출연하느라 들어간 경비에도
턱 없이 부족한, 정말이지 소문만 잔치에 먹을 게 없는 격이군요!"
라는 아들의 당연한 지적에도 나는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두 달여 전 그 프로그램에 출연할 적만 하더라도 나의 '야심'은 대단했었다.
그 야심의 핵심은 바로 그 방송의 하이라이트인
'달인'이 되어 무려 천만 원대의 거액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처럼 매달 줘야 하는 월세를 아니 줘도
되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할 수도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 빵빵한 기대감의 애드벌룬과는 달리
겨우 예선 1차전에서 4등의 저조한 성적이란 결과의 분루를 삼키고야 말았다.
그러했기에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그 방송에
출연하고자 사 입은 옷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느라 쓴
경비에도 현저하게 부족한 그야말로 조족지혈의 출연료가 아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제 통장에서 54,260원의 출연료를 인출하면서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지만 엄연하고 냉혹한 현실을 어쩔 것인가.
내게 있어 세상살이는 늘 그렇게 산보다 높고 험하기만 했음을.
나는 여전히 집 없는 서민의 비애를 가득
안으며 애면글면 힘겹게 살아가야 할 팔자인 것을.
#2.
작년에 고향친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으러 시외로 나가는 중이었다.
변두리에서 시공 중인 아파트의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헌데 그 규모가 대단하였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최소한 40평 이상의 아파트이지 싶었다.
한 친구가 먼저 심통을 부렸다.
"저렇게 큰 집엔 대체 누가 들어와서 살까?
그리고 나는 언제가 되어야 저런 집에서 한 번 살아보나?"
그러자 대단히 현실론적인 친구 하나가 일침(一鍼)을 가했다.
"꿈 깨라. 너나 나나 죽을 때까지 저런 집에선 못 살 테니..."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돈이라는 건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집을 살 만치는 벌어둬야 한다.
왜냐면 여전히 살인적인 공,사교육비의 부담으로
말미암아 수입의 대부분이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아이를 하나 낳아 대학까지
마치는데만 2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고까지 했을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나는 진즉부터 내 집 마련이란 '신기루'를 버렸다.
그건 자고로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만 이치에도 맞는 때문이다.
애초부터 없이 살았던 기반과 불학(不學)의 취약성이란
원초적 구조는 이중의 악재로 늘 내 앞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한 때는 꽤 돈을 모으기도 했으나 그건 잠시 뿐이었다.
그리고 불멸하게 이어진 건 지지부진의 생업과 허덕거림의 일상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온 건 지난 8년 전이다.
당시 장사를 하다가 쫄딱(!) 망하고 나서
쫓기듯 이사를 온 곳이 현재도 살고 있는 이 집인 것이다.
지은 지가 20년도 더 된 이 집은 그러나
구옥(舊屋)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단열이 안 되어
여름엔 푹푹 찌고 겨울엔 반대로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모기장을 설치한 창문을
거의 다 열어놓을 정도로까지 집 전체를 외부에 '개방'하고 산다.
그 때문으로 도둑을 당하여 크게 놀란 적도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거실의 마루에 연탄난로를 설치해 동장군과 싸워온(왔)다.
거실은 마루로 돼 있는데 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울컥거리는 반동의 소음이 아무래도 올 여름쯤엔
죄 뜯어내고 새 마루로 설치해야 할 성 싶다.
이같은 연유는 마루 역시 그 수명이
거의 다 된 20년 이상의 기나긴 긴 삶을 산 때문이다.
#3.
작년 12월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한동안 생업에 몰두하지 못 하였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운 가정경제엔
더욱 암울하고 눅진한 먹구름이 잔뜩 끼게 되었다.
가해자가 가입한 보험회사와 합의를 해야만
비로소 합의금을 받을 수 있는 까닭으로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덜컥 합의를 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완쾌가 안 된 몸을 이끌고 출·퇴근을 하는
즈음인데 다리가 다시 또 더 아파오고 있어 걱정이 적지 않다.
아무튼 8년 째 살고 있는 이 집도 머지않아 재개발구역에 편입될 공산이 농후하다.
이미 우리 동네의 전후좌우는 재개발이 완료되었거나 한창 그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리 되면 우리 가족들도 다른 동네의
우리 형편에 맞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막상 '그 때'가 닥친다면 또 어디서
돈을 마련하여 이사를 해야 할 지 무겁게 걱정이 되는 건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대한주택공사에서 광고를 낸 전세임대주택 지원(금)이란 걸 보았다.
그렇지만 그 또한 나로서는 강 건너의 꽃구경에 다름 아닌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한국인의 '내 집 마련'이란 화두는 어쩌면 필생의 염원이자 불변의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작은 땅 덩어리에 5천만 명이나 되는
많은 국민이 살다보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집값이 비싸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부익부빈익빈의 심화와 더불어
날개를 달고 고공행진 중인 가파르게 높은 가격의
주택(아파트)은 그예 다음과 같은 '낙착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그건 바로 우리네 서민 세입자들을 이제는
내 집 마련의 대열에서 아예 탈락시키는 구조로 변화시켰다는 얘기다.
아이들 가르치고 먹고살기도 바쁜 터에 언감생심 무슨 내 집이란 말인가!
내 집이라고 있어본 지는 아버지가 돈을 잘 버셨던 과거의 불과 2~3년 기간 뿐이었다.
그러니까 얼추 5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을
내 집 없이 남의 집 세입자로만 힘겹게 살아온 것이다.
그 세월동안 다달이 집주인에게 월세로 지급된 돈만
모았더라도 최소한 30평이 넘는 아파트는 진즉에 장만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근데 이러한 회한과 궁상은 막차가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의 격화소양(隔靴搔癢)에 다름 아니므로 말짱 소용없는 짓이다.
아무튼 이 집에 살면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두 아이를 모두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련하고 부족하기만 한 이 아비보다는
훨씬 똑똑하고 재주 또한 남다르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내 집을 각자 마련하는 '수훈'까지 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함에 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는 것이다.
내 맘대로 벽에 못 하나를 박을 수 없었고
아이가 운다고 옆방의 주인이 야단을 칠까 봐서
아이의 목에 빈 젖병까지를 집어넣으며 그 소리를 막았던
지난날의 아픈 기억은 세입자라면 누구라도 겪어야 했던 어떤 기본옵션이었다.
이 나이에 내 집을 장만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대단히 어불성설이다.
하여 그런 건 꿈조차 꾸지 않겠으되 다만 내 생업이 보다 잘 되고
또한 가족들이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만큼은 남들처럼 가져보는 최소한의 여망(餘望)이다.
'꽃보다 남자'가 아니라 나로서는 '집보다 생계(生計)'가 여전히 급선무의 과제다.
두 달여 전에 출연했던 모 방송국의
퀴즈 프로그램 출연료가 어제 마침내 입금되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설과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예상과는 사뭇 달리 너무도 적은 액수였기에
나의 고심은 다시금 심연처럼 깊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어제 통장으로 들어온 모 퀴즈 프로그램의
출연료가 최소한 기십만 원은 되리라 예상하였던 바
그 금액 모두를 아들에게 용돈으로 주리라고 미리부터 호언장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겨우 6만 원도 안 되는 액수였으니
어찌 아들을 보기에도 면구스럽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는가?!
아무튼 어제 퇴근길엔 은행에 들러 비록 '대실망'의
저액(低額)이나마 그걸 인출하여 약속한대로 아들에게 주기는 했다.
"방송에 출연하느라 들어간 경비에도
턱 없이 부족한, 정말이지 소문만 잔치에 먹을 게 없는 격이군요!"
라는 아들의 당연한 지적에도 나는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두 달여 전 그 프로그램에 출연할 적만 하더라도 나의 '야심'은 대단했었다.
그 야심의 핵심은 바로 그 방송의 하이라이트인
'달인'이 되어 무려 천만 원대의 거액을 쟁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처럼 매달 줘야 하는 월세를 아니 줘도
되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할 수도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 빵빵한 기대감의 애드벌룬과는 달리
겨우 예선 1차전에서 4등의 저조한 성적이란 결과의 분루를 삼키고야 말았다.
그러했기에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그 방송에
출연하고자 사 입은 옷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느라 쓴
경비에도 현저하게 부족한 그야말로 조족지혈의 출연료가 아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제 통장에서 54,260원의 출연료를 인출하면서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렇지만 엄연하고 냉혹한 현실을 어쩔 것인가.
내게 있어 세상살이는 늘 그렇게 산보다 높고 험하기만 했음을.
나는 여전히 집 없는 서민의 비애를 가득
안으며 애면글면 힘겹게 살아가야 할 팔자인 것을.
#2.
작년에 고향친구들을 만나 점심을 먹으러 시외로 나가는 중이었다.
변두리에서 시공 중인 아파트의 공사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헌데 그 규모가 대단하였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최소한 40평 이상의 아파트이지 싶었다.
한 친구가 먼저 심통을 부렸다.
"저렇게 큰 집엔 대체 누가 들어와서 살까?
그리고 나는 언제가 되어야 저런 집에서 한 번 살아보나?"
그러자 대단히 현실론적인 친구 하나가 일침(一鍼)을 가했다.
"꿈 깨라. 너나 나나 죽을 때까지 저런 집에선 못 살 테니..."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돈이라는 건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집을 살 만치는 벌어둬야 한다.
왜냐면 여전히 살인적인 공,사교육비의 부담으로
말미암아 수입의 대부분이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아이를 하나 낳아 대학까지
마치는데만 2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고까지 했을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나는 진즉부터 내 집 마련이란 '신기루'를 버렸다.
그건 자고로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만 이치에도 맞는 때문이다.
애초부터 없이 살았던 기반과 불학(不學)의 취약성이란
원초적 구조는 이중의 악재로 늘 내 앞을 가로막는 장벽이었다.
한 때는 꽤 돈을 모으기도 했으나 그건 잠시 뿐이었다.
그리고 불멸하게 이어진 건 지지부진의 생업과 허덕거림의 일상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온 건 지난 8년 전이다.
당시 장사를 하다가 쫄딱(!) 망하고 나서
쫓기듯 이사를 온 곳이 현재도 살고 있는 이 집인 것이다.
지은 지가 20년도 더 된 이 집은 그러나
구옥(舊屋)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단열이 안 되어
여름엔 푹푹 찌고 겨울엔 반대로 얼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모기장을 설치한 창문을
거의 다 열어놓을 정도로까지 집 전체를 외부에 '개방'하고 산다.
그 때문으로 도둑을 당하여 크게 놀란 적도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거실의 마루에 연탄난로를 설치해 동장군과 싸워온(왔)다.
거실은 마루로 돼 있는데 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울컥거리는 반동의 소음이 아무래도 올 여름쯤엔
죄 뜯어내고 새 마루로 설치해야 할 성 싶다.
이같은 연유는 마루 역시 그 수명이
거의 다 된 20년 이상의 기나긴 긴 삶을 산 때문이다.
#3.
작년 12월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한동안 생업에 몰두하지 못 하였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운 가정경제엔
더욱 암울하고 눅진한 먹구름이 잔뜩 끼게 되었다.
가해자가 가입한 보험회사와 합의를 해야만
비로소 합의금을 받을 수 있는 까닭으로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덜컥 합의를 보고 말았다.
그 때문에 완쾌가 안 된 몸을 이끌고 출·퇴근을 하는
즈음인데 다리가 다시 또 더 아파오고 있어 걱정이 적지 않다.
아무튼 8년 째 살고 있는 이 집도 머지않아 재개발구역에 편입될 공산이 농후하다.
이미 우리 동네의 전후좌우는 재개발이 완료되었거나 한창 그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리 되면 우리 가족들도 다른 동네의
우리 형편에 맞는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막상 '그 때'가 닥친다면 또 어디서
돈을 마련하여 이사를 해야 할 지 무겁게 걱정이 되는 건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대한주택공사에서 광고를 낸 전세임대주택 지원(금)이란 걸 보았다.
그렇지만 그 또한 나로서는 강 건너의 꽃구경에 다름 아닌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한국인의 '내 집 마련'이란 화두는 어쩌면 필생의 염원이자 불변의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작은 땅 덩어리에 5천만 명이나 되는
많은 국민이 살다보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집값이 비싸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여기에 더하여 부익부빈익빈의 심화와 더불어
날개를 달고 고공행진 중인 가파르게 높은 가격의
주택(아파트)은 그예 다음과 같은 '낙착의 결과'를 도출해 냈다.
그건 바로 우리네 서민 세입자들을 이제는
내 집 마련의 대열에서 아예 탈락시키는 구조로 변화시켰다는 얘기다.
아이들 가르치고 먹고살기도 바쁜 터에 언감생심 무슨 내 집이란 말인가!
내 집이라고 있어본 지는 아버지가 돈을 잘 버셨던 과거의 불과 2~3년 기간 뿐이었다.
그러니까 얼추 5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을
내 집 없이 남의 집 세입자로만 힘겹게 살아온 것이다.
그 세월동안 다달이 집주인에게 월세로 지급된 돈만
모았더라도 최소한 30평이 넘는 아파트는 진즉에 장만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근데 이러한 회한과 궁상은 막차가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의 격화소양(隔靴搔癢)에 다름 아니므로 말짱 소용없는 짓이다.
아무튼 이 집에 살면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두 아이를 모두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련하고 부족하기만 한 이 아비보다는
훨씬 똑똑하고 재주 또한 남다르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내 집을 각자 마련하는 '수훈'까지 세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함에 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는 것이다.
내 맘대로 벽에 못 하나를 박을 수 없었고
아이가 운다고 옆방의 주인이 야단을 칠까 봐서
아이의 목에 빈 젖병까지를 집어넣으며 그 소리를 막았던
지난날의 아픈 기억은 세입자라면 누구라도 겪어야 했던 어떤 기본옵션이었다.
이 나이에 내 집을 장만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대단히 어불성설이다.
하여 그런 건 꿈조차 꾸지 않겠으되 다만 내 생업이 보다 잘 되고
또한 가족들이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만큼은 남들처럼 가져보는 최소한의 여망(餘望)이다.
'꽃보다 남자'가 아니라 나로서는 '집보다 생계(生計)'가 여전히 급선무의 과제다.
덧붙이는 글
‘세입자 이야기’ 응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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