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이명박 정부의 '입법 속도전', 기준이 없다

등록|2009.03.24 19:43 수정|2009.03.25 17:17
법제처는 지난 24일 '2009년 임시국회 법률안 처리대책 및 하위법령 조기 마련대책'을 국무회의에 보고했다. 4월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되어야 하는 법률안 역시 함께 보고했다. '임시국회 통과추진 법률안' 89개에는 감세법안인 소득세법, 법인세법 등이 들어있다. 작년말 정부와 여당은 단독으로 예산을 통과시켰다. 그 후 2달도 되지 않아 추가경정예산의 필요성을 강변했다. 지난 23일에는 GDP의 3%에 이르는 28.9조여원의 추경예산안을 내놓았다.

아다시피 추경예산 중 11.2조원은 '부유층 감세법안'으로 인한 세입결손 보전이다. 그럼에도 4월 임시국회에서 정부가 정한 '경제살리기 법안'에는 다시 '감세법안'이 포함되어 있다. '4월국회 감세법안'은 이번 추경의 세입결손 보전에 포함되어 있을까? 기획재정부 조세분석과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세입결손 보전의 추정기준은 지난 2월 임시국회 통과법안까지다. 정부의 '1% 부유층'을 향한 충성심, '1% 부유층 감세'를 위한 조급증이 대단하다.

뿐만 아니다. 같은 보고에서 법제처는 민생개혁 법률안의 하위법령 입법기간을 40일 정도 단축하겠다고 했다. '국회 속도전'과 '용산 속도전', 촛불사건에서의 '사법 속도전'에 이은 '행정절차 속도전', '정부입법 속도전'이다.

입법권은 국회에 속하는 것

우리 헌법은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제40조)'고 규정함으로써 국회입법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 규정이 국회단독입법의 원칙이나 국회독점입법의 원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헌법은 제52조에서 정부의 법률안 발의권을 규정하고, 제53조에서 대통령의 법률안공포권 내지 법률안 거부권을 통해 다른 통치기관의 입법과정참여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헌법질서 내에서 국회가 가장 중심적인 입법기관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헌법원칙이다. 따라서 정부 입법에는 국회의 입법과정과는 다른 별도의 제한절차가 있다.

▲ 국회 홈페이지 정보광장의 <국회의 입법과정> 중 정부입법과정 ⓒ 한상범




먼저 정부의 입법과정을 그림을 통해 보자(국회 홈페이지 정보광장, <국회의 입법과정>). 이와 같은 정부의 입법과정은 의무적 절차다. 정부의 법령 제개정은 행정절차법이나 대통령령인 법제업무운영규정을 통해 그 절차가 정해져 있다. 이와 같은 법령이 있는 것은 국회 입법의 원칙을 나타내는 징표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입법과정은 행정절차법과 법제업무운영규정 등을 통해 규율된다. 먼저 정부입법계획수립 등을 규정한 법제업무운영규정의 목적은 "법령의 제정ㆍ개정 또는 폐지 등 정부입법활동과 기타 정부의 법제업무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입법참여기회를 확대하고 법령의 실효성을 높여 효율적인 국가정책수행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의 권익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동규정 제1조).

아다시피 법제처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법령안의 입법계획을 총괄ㆍ조정(법제업무운영규정 제4조)하는 곳이다. 그런데 법제처에서 '경제위기극복과 민생개혁 법률안'의 하위법령 입법기간 단축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와 같은 법제처의 업무계획은 국회 중심 입법을 규정하면서 정부의 법령입법을 제한하고 있는 현행헌법질서체계에 부합할까?

'법안'을 근거로 한 하위법령 기간단축

법제처는 기간단축을 위한 구체적 대책으로 ▲ 법률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하면 입법예고 단계로 진행되도록 하위법령 사전 준비하고, ▲ 국회 통과 이전에 시행령(안) 마련하여 부처협의를 진행하며, ▲ 국회 상임위 통과 후 입법예고 등 입법절차 진행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정부 제출 법률안이든, 의원 발의 법률안이든 그 법안이 국회 본회의의 의결, 정부 이송, 공포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이는 '법안'이지 '법률'이 아니다. 그런데 법제처는 상임위 통과만으로 하위법령을 사전준비하고, 부처협의를 진행하며, 입법예고 등 입법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한다. 법률에 근거를 두지 않은 하위법령이 존재할 수 있을까? '법안'만을 근거로 하여 법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 공무원의 행정행위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물론 의회의 절대과반을 점한 한나라당을 여당으로 둔 이명박 행정부 입장에선 '법안 = 법률'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양도세 중과 폐지를 조기 적용해 입법부를 무시했다는 지적에 대해 윤영선 기획재정부 실장은 "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는 경우는 가정 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윤증현 장관의 '깽판국회' 발언에 버금가는 정부 관료의 말이다.

특히 입법예고와 관련하여 법제처는 '이견이 없고 시급한 시행이 필요한 경우 법제처 협의를 거쳐 부처협의기간 및 입법예고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겠다고 했다. 입법예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20일 이상의 기간으로 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국민의 일상생활과 관련이 없거나 긴급을 요하는 경우, 상위법령 등의 단순한 집행을 위한 경우 등에는 입법예고를 하지 아니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행정절차법 제41조 제1항).

해당 규정을 형식적으로 따르자면 법제처가 '시급한 시행'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심지어는 입법예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법제처는 입법예고를 생략하겠다는 업무계획을 발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입법예고제도는 선출된 대의기관이 아닌 행정기관이 국민을 규율하는 행정입법을 행함에 있어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그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법제처의 최소한의 양심이 작용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미FTA에서는 입법예고기간을 늘리려던 정부

정부는 '중점추진 및 핵심개혁 법률안의 하위입법'에 있어 기간단축을 이야기한다. 이 대목에서 지난 2007년 4월 타결된 한미FTA 당시의 입법예고기간 관련 논의를 보자.


▲ 한미FTA 중 입법예고 관련 최종 타결내용 ⓒ 한상범




한미FTA협정문에 따르면, 정부입법절차 과정에서 법령안에 대한 의견제출 기회보장의 제고를 위해 우리의 법령입법예고 기간을 현행 20일 이상에서 40일 이상으로 연장하도록 했다. 정부는 위와 같은 합의에 따라 한미FTA 타결 후인 2007년 11월 6일 행정절차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제출했다. 미국 측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주권제약적'인 법률개정이라는 비판을 감안하여 정부는 이와 같은 입법예고 연장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를 덧붙인다. 당시 법안에 대한 국회 검토보고서의 일부다.

"▲ 그간 경제사회협력기구(OECD) 등 국제기구 및 국내학계 등을 중심으로 입법예고 기간이 짧아 국민들의 의견수렴 절차가 미흡하기 때문에 의견제출 기회의 보장을 위해 선진국 수준(일본 30일, 미국 60일, 영국 90일 등)으로 입법예고 기간의 연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음. ▲ 입법예고 기간을 연장하려는 개정안의 내용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이행사항의 준수를 통해 양국 간 신뢰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소극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제기준(Global Standard)에 부합되게 국민의 입법참여 제도를 선진화함으로써, 입법과정의 민주성 및 절차적 정당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봄."

'국민들의 의견제출 기회의 보장'을 강조하는 한편, 현행 입법예고기간 20일 규정은 글로벌 기준에 비해 짧다라는 검토보고서의 내용이 새롭게 다가온다. 참고로 한미FTA를 벤치마크(기준)으로 한 한-EU FTA 합의에서는 입법예고기간과 관련하여 '충분한 시간'으로 합의가 되어 있다.

입법예고기간 연장은 '대통령 재가'사항

한미FTA 후속입법을 위한 행정절차법 일부개정법률안(입법예고 기간 20일에서 40일로 연장)은 18대 국회에서도 지난 2008년 10월 10일 정부발의 법안으로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지난 2008년 9월 29일 외교통상부 보고자료에 의하면 이 법안에 대해 '대통령 재가'까지 났다. 그렇다면 법제처의 오늘 국무회의 보고는 무엇인가? 한미FTA의 조속한 비준동의와 '글로벌 스탠다드'를 주창해온 이명박 행정부에 반하는 보고다.

아다시피 한미FTA와 관련하여 이명박 행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줄기차게 '선비준'을 주장했다. 작년 12월 국회에 이어 이번 4월 국회에서도 한미FTA 재협상 논의를 차단한다는 미명 하에 한미FTA 비준동의안은 이른바 '쟁점안건'일 가능성이 높다. 법제처는 '4월 임시국회 법률안 처리대책자료'에서 '국가성장동력확보'를 위한 안건 중 하나로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적시했다. 정부와 한나라당 주장대로 한미FTA가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법제처의 '하위법령 입법기간 단축' 대책은 무위로 돌아가는 걸까?

한미FTA 비준동의안은 아직 국회의 비준동의를 거치지 않지만, 정부와 한나라당이 과반을 점한 제18대 국회에서는 이미 국내법적 효력이 부여된 조약으로 취급된다. 한미FTA로 인한 제개정이 필요한 24개의 법률 중 외국법자문사법, 관세법,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불공정무역행위조사 및 산업피해구제에 관한 법률 등 4개의 법률 개정안은 이미 국회를 통과했다.

행정절차법 역시 한미FTA로 인해 제개정이 필요한 법률이다. 한미FTA 합의사항 준수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국민들의 의견제출 기회를 보장하고 국제적 기준에 맞춰 선진화해야 한다던 행정절차법의 개정목적은 어디로 사라졌나? 세계적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견제출 기회'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도 아니면 한미FTA 재협상이 현실이 된 지금, 한미FTA 후속법률은 잠시 제쳐둬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이명박 행정부의 조급증은 끝간데 없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