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목, 그의 운명이 참으로 가혹하다
뉴라이트의 상품으로 소모된 한 노동운동가의 죽음
노동운동을 하다가 정치권이나 떡고물이 있는 권력 주변으로 떠난 사람들이 제법 있다. 재야운동권에서 한나라당으로 극과 극의 변신을 했던 이재오나 김문수처럼.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변신한 노동운동가들은 그 행보가 별다른 뉴스도 되지 못할 정도로 이동이 잦았다. 이재오, 김문수는 한나라당을 택했기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지난 10년 동안은 이른바 개혁정권이라는 겉모습 때문인지 민주당이나 열린우리당 정도의 '전향'은 슬쩍 눈감아주거나, 때로는 들어가서 잘 해보라는 격려까지 받으며 떳떳하게 옮겨가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권용목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이끌었던 걸출한 노동운동가에서 민주당, 정몽준의 국민통합 21, 이인제 캠프, 결국 뉴라이트로 끝을 맺기까지 극단의 변절 행보를 보인 권용목. 그런 권용목이 지난 2월 13일 죽었다.
2005년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이었던 윤재건의 상가에서 데면데면하다 말 한마디 없이 헤어진 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러나 한때 노동운동의 동지이자 친구였던 권용목의 죽음은 내게 남다를 수밖에 없다.
변절한 노동운동가의 상징으로 회자되던 권용목. 그는 1987년 이후 10년은 뛰어난 노동운동가로 살았고, 10년은 언저리 정치인과 사업가로 떠돌다, 결국 뉴라이트의 배웅을 받고 눈을 감았다. 노동자를 배신하고 권력의 품을 좇아간 변절자라고 욕하기는 쉽지만,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부침 많은 인생을 살았던 권용목의 경우 여느 변절자들과는 같으면서 다른 점이 있다. 왜 권용목과 같은 뛰어난 노동운동가가 뉴라이트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을까?
존경받았던 노동운동가 권용목
권용목은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큼 신중하고 착한 노동자였다. 나는 중공업과 엔진이 합병되기 전인 1988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교섭위원을 맡았을 때 엔진노조 전 위원장이었던 권용목을 처음 만났다.
당시 권용목은 엔진노조 파업투쟁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해고자로 지내고 있었다. 1987년에 엔진에서 노조를 만들면서 바닷가 끝쪽에 있던 엔진공장에서 공장 안쪽으로 투쟁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중공업의 많은 조합원들이 엔진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보며 술렁거렸다. 공장 안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은 엔진노조의 선도투쟁으로 물꼬를 텄고 결국 중공업도 민주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권용목이 있었다.
당시 권용목은 엔진투쟁을 밖에서 지휘하고 있었는데, 중공업 교섭위원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엔진의 투쟁 상황을 설명하고 교섭방법이나 회사 상대하는 법도 가르쳐 주면서 처음 시작하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1988년 시작된 128일 파업도 함께 하게 되었다.
128일 파업 도중에 1.8 테러 사건이 일어난 날, 권용목은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사무실에서 회사에서 보낸 구사대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엔진노조와 현중노조에 대해 3자 개입금지법으로 3번이나 구속당했다. 그러다가 1990년 골리앗 투쟁이 있기 직전 현대엔진과 중공업이 합병이 되었고 노조도 통합이 됐다. 나는 이때 현대중공업 노조 사무국장으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엔진노조는 남은 조합비를 엔진의 해고자였던 오종쇄(현 현중노조 위원장), 권용목, 사영운 세 사람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노조비를 한 푼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당시 현중노조에서는 논의 없이 조합비를 청산하고 온 엔진노조에 대해 비판이 있었다.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이 구속수배 상태여서 사무국장인 내가 대의원대회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해고자들의 생계비 지원과 관련해 엔진노조 해고자들 문제가 논의되었다. 나는 해고자들에게 준 것은 뭐라 할 수 없다, 이미 준 것은 문제 삼지 않지만, 앞으로 중공업노조의 해고자로 정식 인정하고 생계비를 지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하는 대의원들과 4시간이나 논쟁을 벌여 결국 설득했다. 당시 나에겐 사명감이 있었다. 해고자에 대한 지원이 없다면 앞으로 아무도 노동조합 일에 나섰다 구속되고 해고되는 일을 감수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해고자 지원 문제는 중요했다.
1993년 연말 현대중공업 8대 위원장 선거 당시, 위원장 출마가 결정된 후 권용목과 단둘이 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몇 년 동안 해고자 생활을 하고 있던 권용목에게 뭔가 할 일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중의 활동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주전의 어느 바닷가 횟집에서 밥을 먹으며 나는 '내가 위원장이 되면 현중노조의 문제는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맡기고, 1995년에 있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경남도의원으로 출마해서 노동운동을 정치로 계속 이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권용목은 그 제안에 즉답을 피했다.
그는 행여 정치판으로 간다는 오해를 받을까 선뜻 대답을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권용목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맡긴다면 알아서 하겠다. 이는 너의 정치 행보를 돕는 게 아니라 노동운동을 현실정치에 연결시키는 임무를 권용목이 맡고 가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오랜 시간 얘기한 끝에 결국 권용목도 이에 동의했다. 나는 해고자가 밖에서 지원활동을 하다가 어영부영 운동을 끝내면 활동가가 재생산될 수 없다고 바라본 탓에, 이를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 권용목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실력과 신의를 인정받는 노동운동가인데다 지역에서도 인지도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지자체 선거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권용목과 약속했던 일을 추진하려던 차에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1994년 68일 골리앗LNG파업으로 덜컥 내가 구속된 것이다. 내 뒤에 들어선 윤재건 집행부는 권용목 문제를 나처럼 추진할 의사가 없었고, 더구나 윤재건 선거 때 그를 지지했던 조직은 1995년도 지자제 선거를 염두에 두고 이미 현장 안에서 선거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구속되어 있던 상황에서 권용목의 진로에 대한 얘기를 윤재건에게 전했으나, 윤재건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후보를 정리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1995년도에 현대중공업노조의 지원으로 노동자가 아닌 지역의 활동가를 도의원에 당선시켰다.
권용목의 이름을 거론한 나... 그건 실수였다
1997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광역시가 되면서 시장, 구청장 선거가 진행됐다. 인지도나 조합원 정서로 봐서는 당연히 권용목이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당시 권용목은 그를 지지하고 지켜줄 만한 세력이 없었다.
울산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중공업노조가 움직이고 지원해야 일이 되는데, 현중노조엔 아직 바깥쪽의 정치선거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정치의식이 부족하던 때였다. 당시 도의원이었던 한 인사는 바깥의 학생운동 출신 세력들과, 현중노조 선거를 지원하면서 현장에서 조직한 노동자 세력을 규합해서 지자체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1994년도에 내가 현대중공업 위원장에 당선되었을 때, 어느 날 그가 연락을 해 와 만난 일이 있다. 당시 나는 그를 잘 몰랐고 바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 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본인은 앞으로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하고 싶다, 도와 달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미 권용목과 정치진로에 대한 얘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노동운동을 할 것이고, 노동자 중에서 권용목이 정치를 하도록 도울 것이다. 당신도 열심히 하라'고만 얘기했다. 그때 나는 도의원이었던 그 친구를 학생운동을 하다가 정치에 뜻을 품은 열혈 청년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권용목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권용목의 정치 진출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동시에 동구의 투쟁에서도 몹시 중요한 문제였다. 권용목이라는 동구 노동자의 상징이 자본가와 맞서 싸우는 구도를 생각한다면, 권용목은 누구의 반대나 견제도 없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밖의 선거에 나갈 수 있게 해줬어야 했다. 이는 현중노조 집행부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고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내가 조용히 있다가 노조에서 결정해서 내보냈다면 아무 문제 없이 권용목은 자신의 몫을 해냈을 것이다. 그런데 덜컥 내가 본의 아니게 권용목을 견제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상황은 권용목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1995년 말 민주노총이 건설되면서 윤재건과 현총련은 권용목을 민주노총 중앙의 사무총장으로 추대해서 올려 보냈다. 그런데 권용목은 1년도 못 가 노동운동의 중앙판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권용목은 현총련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돌아오겠다고 요청하였으나, 당시 현총련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에서 중도 하차한 권용목은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울산으로 다시 내려오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일을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1998년 울산동구청장 선거에는 학생운동 출신의 도의원이 출마했다. 현총련의 당시 집행부는 권용목이 아니라 구청장에 출마했던 도의원과 같은 조직이었고, 나는 민주노총 선거를 준비하느라 그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결국 권용목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내가 권용목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노동자와 멀어지게 된 권용목... 뉴라이트로 옮겨간 그
학생운동 출신의 그 활동가가 1998년 동구청장에 당선된 후 한 달만에 영남위 사건으로 구속되고 1999년 보궐선거에서 그의 부인이 출마했을 때, 권용목은 처음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그때 권용목은 상대후보였던 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영남위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권용목은 노동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민주당 후보가 떨어지고 권용목은 러시아, 동남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해고자 생활을 청산하면서 받은 위로금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돈도 경험도 없는 노동자가 갑자기 사업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권용목은 그렇게 노동운동을 떠났고, 이후 계속된 사업 실패와 선거 실패 등 연이은 실패를 겪더니 민주당 이인제 캠프에도 몸을 담갔다가, 결국은 자신을 테러하고 구속과 해고와 고통으로 몰아넣은 현대중공업의 총수 정몽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극단으로까지 몸을 옮겼다. 거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한나라당이 집권하자 뉴라이트라는 수구보수들의 집단에 노동운동가라는 이름을 팔아 들어가기까지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나는 권용목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권용목을 '배신자다,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자본의 개가 되었다'는 식으로 거칠게 욕하기엔 내가 권용목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또는 우리 노동자가 지금 정도의 정치의식만 갖췄어도 권용목은 훌륭한 노동자 정치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1994년도 현중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자마자 권용목의 역할에 대해 공론화하고 확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노동자 정치참여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 정치인으로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정치활동을 운동의 연장선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사회 일반의 의식처럼 개인적인 출세나 권력을 지향하는 행위로 보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일 것이다. 낮은 정치의식과 기우 때문에 이를 적극 추진하지 못한 결과가 결국 탁월한 능력과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을 품었던 활동가 한 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끼리는 서로 지켜줘야 한다. 유혹에 너무 쉽게 노출되는 게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쫓겨난 후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찾아주는 사람 없고, 몸 하나밖에 없는 쇳물 만지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권용목 같은 경우 정치행보를 보이면서 돈을 챙겼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생계가 어려워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는 우리 해고자들이 너무나 흔하게 겪는 일이다. 개인이 감내하라고 하기엔 너무 큰 고통들인데, 현장은 현장대로 닥친 일에 맞서 싸우기 바쁘고 조합원들은 일터에 없는 해고자들에게 당연히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다. 회사는 해고자와 조합원을 분리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꾸준히 벌인다. 이런 사면초가 상태에서 우리가 지켜주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권용목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못 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권용목처럼 노동운동에서 명망 있는 사람은 자본이 활용할 가치도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조차 우리가 챙기지 못한 마당에 권용목을 배신자라고 욕하고 비난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문상을 가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권용목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왕회장이라 불리던 정주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활동가 하나가 조문을 가자고 했을 때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싫다고 했는데, 권용목의 조문은 고민이 됐다.
예전 정주영의 장례식에는 현중노조 위원장-어용이 아닌 민주노조의-이 문상을 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던, 테러와 해고와 구속과 온갖 탄압을 일삼던, 당시 우리 눈앞의 가장 커다란 '적'이었던 자본가의 상가에도 인간적인 도리라며 문상을 갔던 사람들. 그의 아들 정몽헌이 죽었을 때도 통일운동 진영의 운동가들이 조의를 표하고 문상을 갔다. 우리가 그토록 투쟁했던 대상, 자본가 계급의 가장 적나라한 표상이었던 둘의 죽음에 운동진영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조문을 가는 마당에, 살을 맞대고 함께 피를 흘렸던 한때 둘도 없는 동지가 죽었는데, 나는 문상을 가지 못했다.
갈등도 많이 했다. 내가 아는 그의 옛 동지들도 많이 갈등했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동지이고 아까운 인물인데'라는 통한의 감정을 토해냈다. 하지만 끝내 가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팔아먹고 출세에 눈이 먼 '적'이어서가 아니라, 뉴라이트시민사회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장례식의 위원장이 지금 현중노조의 조합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오종쇄라는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오늘 그를 칭송하는 건 자본가와 수구 보수들이고, 그를 욕하는 건 이른바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이다. 권용목을 일컬어 영욕의 세월을 살다 간 사람이라 한다. 그가 누렸던 '영'은 과연 무엇인가. 뉴라이트신노동연합의 대표가 그가 누린 영은 아닐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끈, 한국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주역이라는 타이틀이 그가 누린 유일한 '영'이다. 나머지는 모두 욕된 세월이었다. 그건 권용목 개인의 탓도 있지만 그가 누렸던 '영'을 우리 모두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결국 '욕'으로 옮겨가게 한 탓도 있다.
지금 노동운동을 '영'이라 생각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권용목에 대해서는 싸잡아 '욕'이라 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과 목숨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칼을 꽂은 그를 그래서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조차 뉴라이트의 상품으로 소모되고 있는 그의 운명이 어찌 보면 참으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권용목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이끌었던 걸출한 노동운동가에서 민주당, 정몽준의 국민통합 21, 이인제 캠프, 결국 뉴라이트로 끝을 맺기까지 극단의 변절 행보를 보인 권용목. 그런 권용목이 지난 2월 13일 죽었다.
2005년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이었던 윤재건의 상가에서 데면데면하다 말 한마디 없이 헤어진 게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러나 한때 노동운동의 동지이자 친구였던 권용목의 죽음은 내게 남다를 수밖에 없다.
변절한 노동운동가의 상징으로 회자되던 권용목. 그는 1987년 이후 10년은 뛰어난 노동운동가로 살았고, 10년은 언저리 정치인과 사업가로 떠돌다, 결국 뉴라이트의 배웅을 받고 눈을 감았다. 노동자를 배신하고 권력의 품을 좇아간 변절자라고 욕하기는 쉽지만,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부침 많은 인생을 살았던 권용목의 경우 여느 변절자들과는 같으면서 다른 점이 있다. 왜 권용목과 같은 뛰어난 노동운동가가 뉴라이트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을까?
존경받았던 노동운동가 권용목
▲ 29세의 청년 권용목은 한국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
당시 권용목은 엔진노조 파업투쟁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해고자로 지내고 있었다. 1987년에 엔진에서 노조를 만들면서 바닷가 끝쪽에 있던 엔진공장에서 공장 안쪽으로 투쟁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중공업의 많은 조합원들이 엔진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보며 술렁거렸다. 공장 안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은 엔진노조의 선도투쟁으로 물꼬를 텄고 결국 중공업도 민주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권용목이 있었다.
당시 권용목은 엔진투쟁을 밖에서 지휘하고 있었는데, 중공업 교섭위원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엔진의 투쟁 상황을 설명하고 교섭방법이나 회사 상대하는 법도 가르쳐 주면서 처음 시작하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1988년 시작된 128일 파업도 함께 하게 되었다.
128일 파업 도중에 1.8 테러 사건이 일어난 날, 권용목은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사무실에서 회사에서 보낸 구사대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엔진노조와 현중노조에 대해 3자 개입금지법으로 3번이나 구속당했다. 그러다가 1990년 골리앗 투쟁이 있기 직전 현대엔진과 중공업이 합병이 되었고 노조도 통합이 됐다. 나는 이때 현대중공업 노조 사무국장으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엔진노조는 남은 조합비를 엔진의 해고자였던 오종쇄(현 현중노조 위원장), 권용목, 사영운 세 사람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노조비를 한 푼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당시 현중노조에서는 논의 없이 조합비를 청산하고 온 엔진노조에 대해 비판이 있었다.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이 구속수배 상태여서 사무국장인 내가 대의원대회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해고자들의 생계비 지원과 관련해 엔진노조 해고자들 문제가 논의되었다. 나는 해고자들에게 준 것은 뭐라 할 수 없다, 이미 준 것은 문제 삼지 않지만, 앞으로 중공업노조의 해고자로 정식 인정하고 생계비를 지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하는 대의원들과 4시간이나 논쟁을 벌여 결국 설득했다. 당시 나에겐 사명감이 있었다. 해고자에 대한 지원이 없다면 앞으로 아무도 노동조합 일에 나섰다 구속되고 해고되는 일을 감수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해고자 지원 문제는 중요했다.
1993년 연말 현대중공업 8대 위원장 선거 당시, 위원장 출마가 결정된 후 권용목과 단둘이 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몇 년 동안 해고자 생활을 하고 있던 권용목에게 뭔가 할 일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중의 활동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주전의 어느 바닷가 횟집에서 밥을 먹으며 나는 '내가 위원장이 되면 현중노조의 문제는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맡기고, 1995년에 있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경남도의원으로 출마해서 노동운동을 정치로 계속 이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권용목은 그 제안에 즉답을 피했다.
그는 행여 정치판으로 간다는 오해를 받을까 선뜻 대답을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권용목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맡긴다면 알아서 하겠다. 이는 너의 정치 행보를 돕는 게 아니라 노동운동을 현실정치에 연결시키는 임무를 권용목이 맡고 가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오랜 시간 얘기한 끝에 결국 권용목도 이에 동의했다. 나는 해고자가 밖에서 지원활동을 하다가 어영부영 운동을 끝내면 활동가가 재생산될 수 없다고 바라본 탓에, 이를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 권용목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실력과 신의를 인정받는 노동운동가인데다 지역에서도 인지도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지자체 선거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권용목과 약속했던 일을 추진하려던 차에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1994년 68일 골리앗LNG파업으로 덜컥 내가 구속된 것이다. 내 뒤에 들어선 윤재건 집행부는 권용목 문제를 나처럼 추진할 의사가 없었고, 더구나 윤재건 선거 때 그를 지지했던 조직은 1995년도 지자제 선거를 염두에 두고 이미 현장 안에서 선거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구속되어 있던 상황에서 권용목의 진로에 대한 얘기를 윤재건에게 전했으나, 윤재건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후보를 정리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1995년도에 현대중공업노조의 지원으로 노동자가 아닌 지역의 활동가를 도의원에 당선시켰다.
권용목의 이름을 거론한 나... 그건 실수였다
▲ 2002년 11월 국민통합21 노동특위 발대식에 참석한 권용목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울산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중공업노조가 움직이고 지원해야 일이 되는데, 현중노조엔 아직 바깥쪽의 정치선거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정치의식이 부족하던 때였다. 당시 도의원이었던 한 인사는 바깥의 학생운동 출신 세력들과, 현중노조 선거를 지원하면서 현장에서 조직한 노동자 세력을 규합해서 지자체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1994년도에 내가 현대중공업 위원장에 당선되었을 때, 어느 날 그가 연락을 해 와 만난 일이 있다. 당시 나는 그를 잘 몰랐고 바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 중의 하나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본인은 앞으로 노동자를 위한 정치를 하고 싶다, 도와 달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미 권용목과 정치진로에 대한 얘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노동운동을 할 것이고, 노동자 중에서 권용목이 정치를 하도록 도울 것이다. 당신도 열심히 하라'고만 얘기했다. 그때 나는 도의원이었던 그 친구를 학생운동을 하다가 정치에 뜻을 품은 열혈 청년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권용목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권용목의 정치 진출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생각을 바꾸는 동시에 동구의 투쟁에서도 몹시 중요한 문제였다. 권용목이라는 동구 노동자의 상징이 자본가와 맞서 싸우는 구도를 생각한다면, 권용목은 누구의 반대나 견제도 없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밖의 선거에 나갈 수 있게 해줬어야 했다. 이는 현중노조 집행부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고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내가 조용히 있다가 노조에서 결정해서 내보냈다면 아무 문제 없이 권용목은 자신의 몫을 해냈을 것이다. 그런데 덜컥 내가 본의 아니게 권용목을 견제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상황은 권용목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1995년 말 민주노총이 건설되면서 윤재건과 현총련은 권용목을 민주노총 중앙의 사무총장으로 추대해서 올려 보냈다. 그런데 권용목은 1년도 못 가 노동운동의 중앙판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권용목은 현총련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돌아오겠다고 요청하였으나, 당시 현총련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노총 초대 사무총장에서 중도 하차한 권용목은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울산으로 다시 내려오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일을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결국 1998년 울산동구청장 선거에는 학생운동 출신의 도의원이 출마했다. 현총련의 당시 집행부는 권용목이 아니라 구청장에 출마했던 도의원과 같은 조직이었고, 나는 민주노총 선거를 준비하느라 그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결국 권용목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내가 권용목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노동자와 멀어지게 된 권용목... 뉴라이트로 옮겨간 그
▲ 정몽준 캠프의 권용목지난 대선에서 권용목은 정몽준 캠프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학생운동 출신의 그 활동가가 1998년 동구청장에 당선된 후 한 달만에 영남위 사건으로 구속되고 1999년 보궐선거에서 그의 부인이 출마했을 때, 권용목은 처음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그때 권용목은 상대후보였던 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영남위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권용목은 노동자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민주당 후보가 떨어지고 권용목은 러시아, 동남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해고자 생활을 청산하면서 받은 위로금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돈도 경험도 없는 노동자가 갑자기 사업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권용목은 그렇게 노동운동을 떠났고, 이후 계속된 사업 실패와 선거 실패 등 연이은 실패를 겪더니 민주당 이인제 캠프에도 몸을 담갔다가, 결국은 자신을 테러하고 구속과 해고와 고통으로 몰아넣은 현대중공업의 총수 정몽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극단으로까지 몸을 옮겼다. 거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한나라당이 집권하자 뉴라이트라는 수구보수들의 집단에 노동운동가라는 이름을 팔아 들어가기까지 했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나는 권용목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권용목을 '배신자다, 탐욕스러운 인간이다, 자본의 개가 되었다'는 식으로 거칠게 욕하기엔 내가 권용목을 지켜주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또는 우리 노동자가 지금 정도의 정치의식만 갖췄어도 권용목은 훌륭한 노동자 정치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라면 1994년도 현중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자마자 권용목의 역할에 대해 공론화하고 확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노동자 정치참여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이 정치인으로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정치활동을 운동의 연장선에서 바라보기보다는 사회 일반의 의식처럼 개인적인 출세나 권력을 지향하는 행위로 보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일 것이다. 낮은 정치의식과 기우 때문에 이를 적극 추진하지 못한 결과가 결국 탁월한 능력과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을 품었던 활동가 한 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끼리는 서로 지켜줘야 한다. 유혹에 너무 쉽게 노출되는 게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쫓겨난 후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찾아주는 사람 없고, 몸 하나밖에 없는 쇳물 만지던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권용목 같은 경우 정치행보를 보이면서 돈을 챙겼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생계가 어려워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이는 우리 해고자들이 너무나 흔하게 겪는 일이다. 개인이 감내하라고 하기엔 너무 큰 고통들인데, 현장은 현장대로 닥친 일에 맞서 싸우기 바쁘고 조합원들은 일터에 없는 해고자들에게 당연히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다. 회사는 해고자와 조합원을 분리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꾸준히 벌인다. 이런 사면초가 상태에서 우리가 지켜주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권용목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못 팔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권용목처럼 노동운동에서 명망 있는 사람은 자본이 활용할 가치도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조차 우리가 챙기지 못한 마당에 권용목을 배신자라고 욕하고 비난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문상을 가지 못했다
▲ 권용목 뉴라이트 신노동연합 상임대표가 현대엔진 노조위원장일 때 회장으로 있었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권용목 상임대표를 격려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나 나는 권용목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왕회장이라 불리던 정주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활동가 하나가 조문을 가자고 했을 때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싫다고 했는데, 권용목의 조문은 고민이 됐다.
예전 정주영의 장례식에는 현중노조 위원장-어용이 아닌 민주노조의-이 문상을 갔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던, 테러와 해고와 구속과 온갖 탄압을 일삼던, 당시 우리 눈앞의 가장 커다란 '적'이었던 자본가의 상가에도 인간적인 도리라며 문상을 갔던 사람들. 그의 아들 정몽헌이 죽었을 때도 통일운동 진영의 운동가들이 조의를 표하고 문상을 갔다. 우리가 그토록 투쟁했던 대상, 자본가 계급의 가장 적나라한 표상이었던 둘의 죽음에 운동진영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조문을 가는 마당에, 살을 맞대고 함께 피를 흘렸던 한때 둘도 없는 동지가 죽었는데, 나는 문상을 가지 못했다.
갈등도 많이 했다. 내가 아는 그의 옛 동지들도 많이 갈등했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동지이고 아까운 인물인데'라는 통한의 감정을 토해냈다. 하지만 끝내 가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팔아먹고 출세에 눈이 먼 '적'이어서가 아니라, 뉴라이트시민사회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장례식의 위원장이 지금 현중노조의 조합원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오종쇄라는 이야기를 듣고 더더욱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오늘 그를 칭송하는 건 자본가와 수구 보수들이고, 그를 욕하는 건 이른바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이다. 권용목을 일컬어 영욕의 세월을 살다 간 사람이라 한다. 그가 누렸던 '영'은 과연 무엇인가. 뉴라이트신노동연합의 대표가 그가 누린 영은 아닐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끈, 한국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주역이라는 타이틀이 그가 누린 유일한 '영'이다. 나머지는 모두 욕된 세월이었다. 그건 권용목 개인의 탓도 있지만 그가 누렸던 '영'을 우리 모두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결국 '욕'으로 옮겨가게 한 탓도 있다.
지금 노동운동을 '영'이라 생각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이 권용목에 대해서는 싸잡아 '욕'이라 하고 있다.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고 자신과 목숨까지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칼을 꽂은 그를 그래서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조차 뉴라이트의 상품으로 소모되고 있는 그의 운명이 어찌 보면 참으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다.
민주노총 충격보고서? '뉴라이트 안습 찌라시' |
▲ 이른바 [권용목보고서] 출간기념회뉴라이트의 신지호가 권용목이 '썼다는' 뉴라이트 보고서 출판보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유성호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권용목이 썼다는 괴이한 책 한 권만이 그가 죽은 후에 세상을 떠돌고 있다. <민주노총 충격보고서>라는 제목을 단 기이한 이 책은 별다를 것 없는 내용으로 급조한 티가 역력한 책이다. 나는 이런 조잡한 책을 정말 권용목이 썼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권용목이 죽은 후에 언론에서는 '권용목이 민주노총의 비리에 대한 글을 쓰던 중이었다'고 보도했다. 현대중공업의 위원장 오종쇄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원고를 곧 책으로 출간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런데 권용목이 죽은 지 한 달 만에 급하게 나온 '전직 민주노총 간부의 충격적인 고백 : 민주노총 충격보고서'란 책을 보니 어디에도 권용목의 이름이 없다. 이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도 아닌 '뉴라이트전국연합'이라는 우익단체가 펴냈다. 온갖 언론에서는 이 책을 권용목이 쓴 책이라고 보도하지만, 뉴라이트는 책을 쓴 민주노총의 전직간부가 누구인지 책에서 끝내 밝히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건 권용목이 쓴 것도 아니고 안 쓴 것도 아닌 '같기도' 보고서다. 뉴라이트는 이 책에 값을 매기지 않고 후원금을 받아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념문제를 제쳐두고 봐도 그 수준이 '안습'이다. 비리문제는 이미 언론과 검찰에서 재탕, 삼탕까지 말한 것을 그대로 옮긴 뒤에 '충격'이란 말을 덧붙였을 뿐이고, 그 사건들의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선정적인 대목만 부각시켜서 주목을 끈 뒤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묻지 마'식 나열이 이 책의 서술 방식인가? 거기에 노동운동을 10년 넘게 한 민주노총 간부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실수들이 눈에 띤다. 민주노총의 조직도를 그리면서 부설기관인 '고용안정센터'를 생뚱맞게 '교통안정센터'로 적는다든지, 현대중공업 해고자로 복직투쟁 중인 나에 대해 현대중공업 '복지' 활동 중이라고 적는 것은 그야말로 애교 수준이다. 노동전선이라는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는 나를 '노동전선'의 중앙위원이라고 버젓이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사실 왜곡뿐 아니라 노동운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그 수준이 상식 이하다. 정파 구도 등은 이미 언론에 보도된 것을 베낀 수준이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는 식상한 내용이다. 뉴라이트가 이미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중파에 모두 보도되거나 때론 심층 분석까지 다 당한 바 있는 사실들을 새삼 '충격'이란 말을 써가며 급조해서 내놓은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한 축인 노동운동의 위상을 떨어뜨려 민주화의 역사를 부정하고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의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진보진영의 성찰과 변화도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진보가 자기 성찰에 게으른 건 어쩌면 뉴라이트처럼 경쟁력 없는 우익들이 그 대치점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준 낮은 보수들이 있어, 아무리 잘못해도 쟤네보단 낫다는 그런 긴장감 없는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진보만큼 제대로 된 보수도 우리 사회엔 정말 필요하다. 그러나 조잡한 '안습' 찌라시나 내고 있는 뉴라이트가 새로운 보수를 표방하고 나선 마당이니 이 땅에서 정말 진정한 보수를 기대하기는 아직 이른 모양이다. |
덧붙이는 글
이갑용 기자는 현대중공업노동조합 위원장, 민주노총2대 위원장, 울산동구청장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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