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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지은 거야, 궁궐을 지은 거야

<하원마을2> 법화사, 동아시아 정벌을 꿈꾸던 원제국의 전초기지

등록|2009.03.28 12:23 수정|2009.03.28 12:23

법화사최근에 법화사가 복원되어 옛 명성을 되찾고 있다. ⓒ 장태욱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 일대에는 조선시대 폐사된 옛 법화사지에 새롭게 복원 중창한 법화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하원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시작이 이 법화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법화사의 입구에 들어서면 장수의 형상을 띤 흰색 석상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석상을 받치는 기단에는 '해신 장보고(海神 張保皐)'라고 적혀 있다. 이 절의 이름이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에 세웠던 법화사와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 절을 장보고 장군과 연관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법화사를 장보고 장군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은 그 연관성의 근거로 하원마을 인근에 있는 대포(大浦) 포구를 든다. 과거 대포의 이름이 당포(唐浦)였다는데, 이는 장보고 선단이 당나라와 교역할 때 근거지로 사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장보고 장군의 석상법화사 입구에 장보고 장군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법화사가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에 세웠던 사찰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절을 그와 연관시키려 한다. ⓒ 장태욱


그런데 법화사지 발굴 과정에서 나온 유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841년에서 846년에 당나라에서 제작된 개원통보(開元通寶)였다고 한다. 장보고 장군의 사망년도가 846년인 점을 감안하면 이 사찰을 장보고 장군과 연관시키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법화사지에 대해 그간 8차례의 발굴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로 고려시대 건물지, 조선시대 건물지, 초가 관련시설, 기와부지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유물로는 구름과 봉황과 용무늬가 있는 운봉암막새(봉황 구름무늬 기와) 및 운용문암막새(용구름무늬 기와), 명문기와, 분청사기, 명문 청동 등잔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법화사지 발굴과정발굴과정에서 보도가 노출된 모습이다.(국립제주박물관에서 촬영) ⓒ 장태욱


그런데 안타깝게도 법화사의 창건시기를 알려줄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대신에 이 절의 중창연대를 알려주는 기와가 출토되었다. 기와에 기록하기를 '지원 6년(원세조 6년, 1269년에 해당)에 중창을 시작해서 지원 16년(원세조 16년, 1279년에 해당)에 끝마쳤다'고 했다. 아마도 이전에 조그만 사찰이었던 것을 당시 10년간의 대공사 끝에 대가람으로 바꾸어 놓은 듯하다.

삼별초가 제주에 입도해서 여몽연합군에 패한 3년간의 저항이 1270년에서 1273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 삼별초 항쟁이 좌절된 이후 100년간 제주는 원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삼별초 항쟁 이전부터 몽고는 일본정벌을 목표로 제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염두에 두면 법화사를 10년 공사 끝에 대가람으로 바꾼 주체는 원 제국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법화사는 원당사(제주시 삼양동), 수정사(제주시 외도동)와 더불어 고려시대 제주도의 3대 사찰로 손꼽는데, 이 3대 사찰은 공통적으로 원제국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고려 초기까지도 민간신앙에 밀려 제주섬 안에서는 좀체 기를 펴지 못했던 불교가 원제국의 등장과 더불어 전성기를 맞았던 것이다.

암막새법화사지를 출토하는 과정에서 나온 기와의 파편이다.(국립제주박물관에서 촬영) ⓒ 장태욱


법화사지 유물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용과 봉황의 무늬를 띤 막새들이다. 이들은 당시 왕실 건축에만 사용되던 금기품이었기 때문이다.

법화사와 관련한 기록들도 눈길을 끈다. 우선, 법화사는 노비 280명을 거느리는 대가람으로 그 규모가 왕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법화사에는 원나라 양공이 제작한 아미타삼존불상이란 거대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훗날 원이 패망하고 명이 중원을 차지했을 때, 명나라 조정은 법화사에 있던 아미타불상을 본국으로 이송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 사찰이 중창될 당시는 원제국이 일본정벌을 위해 모든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주에 사찰을 대규모로 중창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학자들은 원제국이 법화사를 거대하게 중창한 이유가 제주를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제주섬을 교두부로 삼아 동아시아를 장악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왕실의 권위를 대표하는 전초기지가 필요했는데, 이런 필요에 의해 지은 것이 법화사라는 주장이다.

또, 원 제국이 일본과 남송을 정벌하기 위해 제주에 파견한 몽골인들은 물론이고 이들과 제주인들간 혼인에 의해 출생한 혼혈인들에게는 정신적 안식처가 필요했는데, 이런 현실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궁궐같은 대규모 사찰이 필요했다고 한다. 실제로 원이 망하고 원의 목호(말을 키우는 사자)들이 제주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목호들이 최영의 토벌군과 최후의 일전을 치른 장소로 범섬을 선택한 이유도 인근에 있는 법화사를 그들의 돌아갈 안식처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자 고려시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법화사는 그 찬란했던 역사를 마감했다. 1653년에 기록된 이원진의 <탐라지>에 '이미 폐사되어 초가 몇 채만 남았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를 방문한 김상헌은 <남사록(南槎錄)>에서 지지(地誌)의 기록을 인용하며 '제주 3읍이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역원이 없기 때문에 동서로 다니는 나그네는 모두 제주 월계사, 수정사, 조천관, 김녕소, 대정 법화사 및 이 관(영천관)에서 지나다 묶으며, 또한 절제사가 봄, 가을에 점마 때도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지금은 수정사의 정전(正殿)만이 남아 있는데 모두 낡고 무너지고 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즉 16세기 이전에 법화사에는 행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이 있었다는 기록인데, 하원마을의 이름이 처음에는 하원리(下院理)였던 것도 '원의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과원몰리조선시대 법화사 인근에 조정에 진상할 귤을 재배하던 법화과원이 있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과원이 있던 언덕을 '과원몰리'라 부른다. ⓒ 장태욱


법화사가 폐사된 이후에 이 법화사 주변에는 조정에 진상할 귤을 재배하는 과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 과원조(果園條)의 기록에는 제주 전체에 분포한 37개의 과원의 이름과 귤나무의 품종별 그루 숫자가 상세히 기록되었다. 당시 대정현에는 고둔과원, 동천과원, 병악과원, 별과원, 암림과원 등과 더불어 법화과원이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법화과원에는 석금귤 1그루, 유감 1그루, 유자 66그루가 재배되고 있었었다고 한다.

법화사의 서쪽에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언덕을 '과원몰리' 혹은 '과원모루'라고 부른다. '몰리' 혹은 '모루'는 '산등성이마루'를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 등성이에 과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조선 초기에 폐사되었던 법화사가 복원된 것은 1914년의 일이다. 비구니 안봉려관과 도월선사가 법화사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4.3사건을 거치면서 복원된 사찰마저 소실되고 말았다.

최근에는 당시 소실된 자리에 다시 법화사가 복원 중창되어 불자들은 맞고 있다. 서방 극락정토를 상징한다는 구품연지가 조성되어 있어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방문객들을 평화롭게 하고, 복원된 대웅전이 옛 법화사의 위용을 떠올리게 한다. 새로 복원된 법화사가 이 일대 농민들의 고단한 삶에도 위안을 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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