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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람] 맥아더의 원폭 주장 찬성한 이승만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27] '사과벌레' 편

등록|2009.04.02 18:15 수정|2009.04.02 18:15
"한편 해방지구마다 역사적인 인민위원회 선거와 세기적 과업인 토지개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악랄한 제국주의와 악덕지주와 자본가들에게 우리 인민이 얼마나 시달렸는지는 솔선· 자진하여 지원한 54만의 의용군 숫자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학생들뿐 아니라 선생들도 이 성스러운 대열에 속속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리과대학은 어떻습니까? 한 분도 의용군에 지원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괴뢰 시절에도 우리 학교는 명실상부한 최고학부로 자부하였고, 밖에서도 그렇게 인정을 해 주었는데, 최근의 행태는 참으로 한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하루바삐 옛 허울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를 호흡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하된 지상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만 이 대열에서 낙오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학자로 남을 것이며 이 학교가 어떻게 존립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지금 취할 길은 이 자리에서 전원 의용군 지원을 결의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원한다고 하여 일선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뜻과 다르게 심사에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심사는 우리의 생각보다 엄격합니다. 그러나 '전원지원'이라는 의사 표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하며, 이것만이 우리 학교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도입니다."

이어서 유응호가 일어났다. 그는 이명선의 제안이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동감입니다. 선생님들도 이의가 없을 겁니다. 있거든 말씀해 주십시오."

장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미라처럼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유응호가 채근하는 어조로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럼 전원 지원으로 결의합니다."

역시 아무도 말이 없었다. 김성식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명선과 유응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김성식을 노려보았다.

"사회자의 동의가 있었을 뿐, 재청다운 재청이 없었으니 결의라고 하기가 어렵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니, 시간을 갖고 토의하며 진정한 합의를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숨이 풀린 듯 여기저기서 말들이 터져 나왔다.

"옳습니다."
"좋은 의견이오."

순간 김성식은 이명선의 미간에 지는 깊은 주름을 보고 가슴이 조금 떨렸다. 사회자가 말없이 좌중을 둘러보자 다시 장내는 조용해졌다. 이때 영문과 젊은 교수가 손을 들었다.

"이것은 가정에도 중요한 문제이니, 집에 가서 아내와 의논해 보고 내일 표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국문학을 한다는 민 교수가 일어났다.

"우리의 결의 표명은 의용군 지원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대학 교수의 결의로 리이 UN 사무총장과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야만적인 폭격을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어떠할까요?"

사회자는 의용군 지원 문제를 거수 표결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두들 꺼벙꺼벙한 눈들을 하고 손을 올리고 있었다. 웬만큼 손이 올라가자 사회자는 서둘러 가결을 선포해 버렸다.

미군 공습 갈수록 험악해지다

조수현은 갈수록 심해지는 미 공군의 폭격을 예사롭지 않게 느끼고 있었다. 미군 비행기는 처음에 한강 주변을 폭격하더니, 얼마 전에는 용산을 집중 공략했다. 그러더니 차츰 도회 쪽으로 들어왔다가 폭격 반경을 넓혀 변두리에도 소이탄과 로켓포탄을 퍼부었다.

비행기는 서울 동부의 청량리와 최북단인 창동에까지 넘나들었다. 그저께는 미아리 유지공장이 화염에 휩싸였다고 했다. 미아리를 폭격할 때 비행기는 조수현의 지구대 건물 지붕을 굉음을 뿜으며 스치듯이 지나갔다.

상륙작전에 대비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정릉 골짜기에도 인민군 지구 사령부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정릉도 폭격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미군이 동경을 폭격할 때도 변두리부터 쓸고 들어갔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조수현의 지구대 업무가 부쩍 늘어났다. 정릉동 박광태에 대한 민원이 하나 제기되었지만 그녀는 처리를 늦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며칠 전부터 안질로 고생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그녀는 이두오를 만나러 가기가 어려웠다.

난데없이 미국이 서울에 원자폭탄을 쓸 것이라는 풍설이 나돌았다. 지구대 요원이 수거해 온 삐라에도 그와 비슷한 말이 쓰여 있었다. 주민들은 서울에서 최소 50리 밖으로는 피난해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들을 속닥거렸다.

"설마 원자폭탄을 쓸려고? 쓰더라도 서울에야 터트리지는 않겠지."

식량을 공출당하고 약속받은 배급도 받지 못해 가뜩이나 굶고 있는 주민들은 더욱 마음이 뒤숭숭해져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조수현은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악마의 소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국전쟁에 원자폭탄을 쓰려는 기도는 맥아더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는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부터 원자폭탄 사용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26개의 원자탄을 터트리면 전쟁 지연으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고 공산주의자들을 빨리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아더의 주장을 이승만은 곧장 받아들였다. 심지어 국무총리 대행 신성모는 미국에 원자폭탄을 사용해 달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미국의 원자탄 재고량이 적은 데다, 3차대전의 발발을 우려하여 맥아더의 건의를 최종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조수현은 업무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 이두오의 소식이 궁금했다. 굶지는 않는지, 아니면 불량한 좌익에게 적발되어 의용군으로 끌려가지는 않았는지 등 별의별 걱정이 그녀의 마음을 번다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수현은 안질이 낫는 대로 이두오를 찾아보기로 하고 우선 박광태에 관련된 민원서류를 열어 보았다. 민원 제기자는 은혜병원 간호사 오현자였다. 은혜병원은 의사 고정술이 지난 주 자취를 감춘 병원이었다. 고정술은 반동으로 지목받을 위기에 닥치자, 가족을 둔 채 야밤에 도주했다고 했다. 그래서 간호사 오현자가 병원을 지키며 간단한 치료를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박광태가 의사인 고정술과 연결시켜 그녀를 의심하고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은연 중 그녀를 유혹, 협박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조수현은 서류에 첨부되어 있는 오현자 성분 조사 보고서를 읽었다. 의외로 그녀는 순수한 공산주의자였다. 북에 애인을 둔 그녀는 서울 해방 직후부터 인민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며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민교양교육에도 빠짐없이 참석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 오현자를 유혹하다가 잘 안 되니까 박광태는 그녀를 협박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전선에 의무요원이 모자란다고 하는데 오양을 의용군으로 차출해야 하겠어."

이런 말을 노골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조수현은 오현자를 불러 진술을 들었다. 그녀는 먼저 박광태에게 엄중히 경고하라고 말했다. 그래도 안 되면 물증을 확보하라고 일렀다. 박광태는 이미 성북구에서 가장 힘을 쓰는 바닥빨갱이였다. 증거 없이 함부로 잡아넣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수현은 박광태의 딸 미애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눈치로 보아 미애는 이두오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두오는 미애를 이웃의 동생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이두오가 자기를 대하는 것과는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 그럴수록 미애의 눈빛은 이두오에게 언제나 애절함을 머금고 있었다. 조수현은 그런 미애에게 연민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던 차였다. 저급한 아버지를 둔 데다 응답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미애야말로 여자로서 가장 애틋하고 불행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소설은 이틀에 한 번 꼴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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