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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추억대행사(追憶代行士)

등록|2009.04.04 17:26 수정|2009.04.04 23:30

▲ 우리 할아버지. ⓒ 안병기


우리 할아버지께선
뛰어난 옛날 이야기꾼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어린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러나  당신께서 어떻게 삶을 꾸려오셨는지
아버지인 내 증조부께선 어떤 분이셨는지
내게 들려주신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께선 당신의 삶을 단 한 번도 추억하지 않으셨다

농한기가 돌아와
시간이 헐렁하게 돌아가는 겨울날에도 
절대 손을 놀리시는 법이 없으셨다
가마니를 짜거나 대나무 소쿠리를 엮거나
물에 축인 짚으로 덕석을 짜실 뿐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등
일찍이 한반도가 겪었던 어느 시기보다
신산한 삶을 사셨던 할아버지께선
사는 게 바빠서 당신의 생애를 추억할 할 틈이 없었을까
혹은 자신의 일그러진 삶을 추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셨던가
어쩌면 지나칠 적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던 두엄자리가
할아버지께서 버려둔 추억이 발효하는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께선 그렇게 끝내
당신의 삶을 추억하지 않으신 채 눈을 감으셨다
공식적으로는 물론 비공식적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일흔여섯, 바쁘고 고단한 생애였다는 걸 난 안다 
당신의 추억을 추억하지 못하신 채 세상을 뜨신 할아버지를 위하여
난 시간이 날 적마다 할아버지의 추억을 대신 추억해드리고 있다

장둥이감 몇 접 지게에 지고
금단동 고개 넘어 각화재 넘어
광주 서방시장으로 팔러 가던 일
일흔 살 넘어서까지도
나락 두 가마니 지게에 지고 뜀박질하던 모습
길고 징그런 구렁이 잡아
감나무 아래 약탕기 걸고 고아 드시던 일
오랜 가뭄에 옆 논 주인과 물꼬 싸움하시던 일

할아버지께선 세상 뜨시기 전 자신의 추억을 대신 추억해 줄
충직한 추억대행사 하나 남기시고 가셨다 
난 벌써 37년째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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