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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뚝딱! '바지 할머니'의 신기한 재봉틀

[인터뷰] 잠옷 바지로 봉사하는 이납순 할머니

등록|2009.04.05 17:31 수정|2009.04.05 17:37

▲ 오전 한나절. 이납순할머니는 오로지 바지만 만드신다. ⓒ 김정혜


"나? 돈도 없고 기술도 없어.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데 꼭 돈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야. 그저 마음이지. 이 마음이란 녀석이 참 신통해.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내주면 내줄수록 이 마음이란 녀석은 점점 차오르거든. 행복으로 말이야. 그런데 마음이 행복으로 그득해지면 그득해질수록 더 열심히 미싱을 돌리고 싶어져. 내주는 만큼 행복해지는 거, 그게 바로 마음인 것 같아."

올해 82세의 이납순 할머니. 지난 2일 오전. 할머니를 뵈러 가던 날도 할머니는 미싱 앞에 앉아 열심히 바지를 만들고 계셨다. 봄이라 꽃무늬 천으로 바지를 만드신다며 '할아버지들이 입기엔 좀 민망하지 않을까 싶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천생 열여섯 소녀 같다.

이납순 할머니가 처음 바지를 만들기 시작한 건 5년 전. 소일삼아 잠옷 바지를 만들어 이웃 노인들에게 몇 장 나누어 준 것이 계기가 됐다.

"경로당 친구들에게 잠옷 바지를 한 번 만들어 줬어. 그런데 이 노인들이 너무 편하고 좋대. 가만 생각해보니 이럴 게 아니라 좀 더 많은 노인들에게 이 바지를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집 근처에 치매양로원이 있어. 노인들이 한 40여 명 되는데 그곳 생각이 난 거야. 그래서 두 번에 걸쳐 40여 벌 만들어 줬는데 이 노인들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갈퀴 같은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맞잡는 그 노인들을 보며 가슴으로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불쑥 솟구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뜨거운 불덩이의 실체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할머니로 하여금 더 열심히 바지를 만들게 하셨다고.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값진 할머니표 잠옷 바지

▲ 동대문 시장에 직접 나가 사신 천으로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하신 '바지할머니'의 잠옷바지 ⓒ 김정혜


처음엔 만든 바지를 들고 집 근처 양로원과 독거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센터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바지를 나눠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는지라 4년 전부터는 할머니가 사시는 풍무동주민센터와 김포시노인복지회관을 통해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바지를 전달하고 계신다. 그리고 무시로 어려운 노인들 소식을 들으면 할머니는 바지를 들고 그 노인들을 찾아 나서신다.

할머니의 잠옷 바지를 정기적으로 기증받는 김포시노인복지회관 허현희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의 잠옷 바지는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에요. 온통 할머니의 정성으로만 만들어 지는 것이잖아요. 동대문 시장에 직접 나가 천을 사시고, 한 땀 한 땀 직접 바느질하시고, 그리고 손수 여기까지 들고 오시고…. 고귀한 사랑만으로 만들어진 할머니 바지가 진짜 명품바지 아닐까요?"

그런데 바지를 만드는데 드는 재료비도 만만치 않을 듯싶어 할머니께 물어봤더니

"노령연금이 한달에 8만 원 조금 넘게 나와. 그리고 자식들과 손자손녀들이 용돈을 주지. 그 돈으로 다 옷감을 사는 거야. 대신 나를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안 써. 나를 위해 한 푼이라도 써 버리면 만드는 바지장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잖아."      

할머니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시면서 까지 직접 동대문시장을 나가 옷감을 고른다고 하신다. 당신이 입을 게 아니라고 해서 아무 옷감으로나 바지를 만들지는 않는다고. 노인들 피부에 닿는 것이니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그렇게 꼼꼼하게 옷감을 고른 후 그 옷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집으로 오신다는 말씀이 대체 믿어지지 않는데, 할머니의 건강에 대한 말씀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내 몸 성한 데는 오른쪽 손목 밖에 없어. 교통사고와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온몸이 인공뼈 투성이야. 남들은 걸어 다니는 게 기적이라고 해. 그러니 참 고마운 일이지. 이렇게 걸어 다닐 수 있고, 오른쪽 손목이라도 성하니 미싱 돌리는데 지장 없고…. 이 미싱도 처음엔 발로 밟는 것이었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 손으로 돌리는 걸로 바꾸었어. 오른쪽 손목이라도 성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

한 땀 한 땀 이어갈 땐 몸도 새털처럼 가벼워져

▲ 50년도 넘은 묵은 친구 같은 할머니의 미싱. 미싱 앞에 앉으면 세상 부러울게 없다고 하신다. ⓒ 김정혜


25살에 결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0여 년이 넘었고 지금은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사신다는 할머니는 당신을 일러 '참 복 많은 할머니'라 하신다.

"영감 살아 있을 때는 영감그늘 밑에서, 영감 저 세상 가고는 자식그늘 밑에서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어.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내다버리는 이런 각박한 세상에 아들 며느리에게 이렇게 극진한 봉양을 받고 있으니 복 많은 할머니 아니야? 경로당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 하나같이 자식들한테 서운하다는 것이지. 평생을 자식들 위해 살았는데 이젠 뒷방 늙은이 취급한다는 거야. 외식하러 갈 때도 지들끼리만, 휴일에 나들이 갈 때도 지들끼리만…. 그런 자식들을 보면 얼마나 외롭고 허무하겠어. 별것 아닌 잠옷 바지 하나에도 눈물 글썽이며 좋아하는 노인들인데…. 그런 노인들에 비하면 난 정말 복 많은 늙은이야. 그래서 더 열심히 바지를 만들려고 해. 내 복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

▲ 이납순할머니는 당신을 일러 '복많은 할머니'라 하신다. 해서 그 복을 어려운 노인들과 나누고자 열심히 바지를 만든다고 하신다. ⓒ 김정혜

새벽 6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는 할머니는 오전 한나절을 바지 만드는 일에 몰두하신단다. 50년도 더 된 손때 묻은 낡은 미싱, 50여 년을 함께 한 묵은 친구 같은 미싱 앞에 앉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한 땀 한 땀 솔기를 이어갈 때면 어느 순간 구석구석 쑤시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신다니…. 이는 이미 이 바지를 들고 기뻐할 노인들로부터 행복을 미리 가불 받았기 때문이라는 할머니 말씀이 천진스럽기 그지없다.

"내 별명이 뭔 줄 알아? '바지할머니'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붙여 줬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를 '바지할머니'라고 불러 줄 때 얼마나 흐뭇한지 몰라.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내가 만든 잠옷바지를 입고 매일 잠자리에 든다는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내 사랑을 입고 잠자리에 든다는 이야기지. 사랑을 입고 잠자리에 들면 그 잠은 보나마나 꿀맛 아니겠어?"

긴 인터뷰였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해맑은 웃음이 가시지 않는 할머니의 얼굴이 봄날 활짝 핀 복사꽃만큼이나 곱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며, 그 사랑으로 인해 누군가가 기뻐하고 누군가의 기쁨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다시 돌려질 때 그게 바로 행복이라는 이납순 할머니.

여든을 넘긴 할머니의 얼굴이  아기처럼 해맑을 수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고 집을 나서는 길. 잔잔한 꽃무늬 천으로 만든 바지 하나를 기어이 손에 들려주신다. '바지할머니'의 명품잠옷바지로 인해 이봄 내내 밤이면 밤마다 꿀맛 같은 단잠에 빠져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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