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의 눈부심을 바라보는 2개의 시선
[시 더듬더듬 읽기 105]복효근 시 '목련꽃 브라자' 와 이병훈 시 '목련'
[기사수정 : 2011년 10월 9일 오후 2시 5분]
여기저기 하얀 목련이 피었다. 내게 목련은 일찍이 꽃보다 노래로 먼저 다가왔다. 고등학교 시절에 박목월 시·김순애 곡 '4월의 노래'를 처음 배웠다. 이 노래는 사춘기의 내게 꽤 커다란 정서적 파장을 안겨주었다.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내 마음의 장롱 안에서 고이 잠자던 행려 본능을 깨우는 데는 이 한 구절이면 충분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회색빛 우중충한 항구를 몽유병자처럼 배회하다가 도선장으로 나가 배를 타고 아무런 목적 없이 군산 - 장항 간을 오가기도 했다. 이 노래 한 소절이 내 사춘기의 봄을 몽유(夢遊)의 나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때 이후 목련은 내게 4월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유백색의 꽃이 내뿜는 성스럽고 순결한 이미지 때문일까. 정서적 더듬이가 예민한 이 나라 시인들 역시 목련 꽃에서 짜르르한 정서적 울림을 받는 듯하다. 봄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가운데는 유난히 목련 꽃을 노래하는 시가 많다. 가히 독과점이라 할만하다.
언어를 절제하는 시인의 힘이 낳은 아름다운 시
목련의 이미지 혹은 목련의 이미지를 차용해 다른 사물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 가운데 단연 군계일학은 지리산 자락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복효근 시인이 쓴 '목련꽃 브라자'가 아닐는지.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래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 복효근 시 '목련꽃 브라자' 전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복효근은 1991년 <시와시학>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등의 시집을 상자 했다. 시 '목련꽃 브라자'느 다섯 번째 시집인 <목련꽃 브라자>에 실린 시 가운데 한 편이다.
복효근 시인은 우리네 삶의 언저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친근한 어법으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심지어 삶의 거짓과 이중성을 비판할 때마저 사랑과 반성으로 따뜻하게 보듬는다. 일상적 소재에 빗대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시 '목련꽃 브라자'는 한 수줍은 소녀가 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흰 목련과 젖 가리개인 브라자는 둘 다 흰색이다. 하얀색이라는 이미지의 동질성을 매개로 봉긋 솟아오른 흰 목련 꽃봉오리와 부풀어 오르는 딸아이의 앞가슴을 감싼 브라자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환치한다.
시에 등장하는 선혜라는 소녀는 아마도 시인의 딸인 모양이다. "우리"라는 대명사가 그걸 암시해준다. 시인은 목련꽃의 아름다움과 목련송이처럼 벙그는 선혜 앞가슴 중 어떤 것이 더 예쁠까를 저울질한다. 그러나 저울질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시인은 이내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라고 뻐긴다. 어찌나 재빠르고 싱겁게 결론을 내리고 마는지 선혜의 아름다움을 극대화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하고만 목련꽃이 가엾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런데 시인은 어떻게 선혜 앞가슴이 품은 눈부신 아름다움을 아는 것일까. "내 볼까봐 기겁"을 하는데 말이다. 시인은 "빨래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안다고 귀띔한다. 이것을 혜안이라 해야 할는지, 주책이라 해야 옳을는지.
이 시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은 '벙그는'이라는 동사와 말없음표이다. 목련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가리키는 '벙그는'이라는 동사는 나날이 커가는 앞가슴의 이미지에 동적인 요소를 부여하고 끝 모를 감탄으로 말미암아 말을 끝맺지 못하는 말없음표는 앞가슴이 가진 눈부신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언어를 절제하는 시인의 힘때문이다.
행여 시의 감흥을 해치지나 않을지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둘 것이 있다. 목련과 백목련은 둘 다 목련과에 속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나무다. 우선 원산지부터 다르다. 목련은 한국이 원산이지만 백목련은 중국이 원산이다. 또 목련은 활짝 피면 6장의 꽃잎이 편평하게 펴져서 너풀거리면서 약간 산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9장의 꽃잎이 서로 겹쳐진 백목련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 핀다. 시인의 비유는 목련이 아닌 백목련의 모양을 염두에 둔 비유가 아닐까 싶다.
부치지 못하는 그리움이 낳은 아름다움
복효근의 시가 성장기 소녀의 앞가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목련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라면 목련을 직접 의인화한 시도 있다. 이병훈 시인이 쓴 '목련'이란 시가 바로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다.
꽉 동여맨 젖가슴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옷고름 살짝 풀었다
눈이 부신 속살
태양도 환장한 듯
구름 속을 들락거리며
슬쩍슬쩍 훔쳐본다
맘껏 부풀던 봉오리
숨만 크게 내 쉬어도
와르르 쏟아지는
뽀얗게 보고 싶은 얼굴
눈이 시린 봄날
양지바른 담장 아래
부치지 못한 엽서처럼
빛바랜 꽃잎 수북하다
-이병훈 시 '목련' 전문 <문학사계> 2008년 봄호
1925년 군산 옥산면 당북리에서 태어난 이병훈 시인은 1959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1970년 첫 시집 <단층>을 상자한 이래 <어느 흉년에>(1982), <멀미>(1983), <달무리의 作人들>(1986), 장편서사시 <녹두장군>(1991) 등 17권의 시집을 펴내는 등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왕성한 시작활동을 벌였다.
이병훈 시인은 기꺼이 삶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피폐된 현실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면서 올곧은 시각으로 비판함으로써 삶의 황폐함을 치유하려고 애쓴다. 최근에 펴낸 <물이 새는 지구>(2001) 등의 시집을 보면 말년에 이르러선 시인의 관심의 추가 생태주의적인 데로 크게 기울었음을 알 수 있다.
시 '목련'은 목련을 저고리 입은 여인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복효근의 시와는 달리 브라자를 차지 않은 전통적 여인상이다. 그냥 젖가슴을 옷고름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옷고름이 살짝 풀린 틈으로 눈부신 속살이 드러난다. 그 속살을 훔쳐보고 싶은 건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태양도 환장한 듯/ 구름 속을 들락거리며"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이다.
그러나 목련은 남들이 자신의 속살을 훔쳐보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뽀얗게 보고 싶은 얼굴" 생각에 골똘할 뿐이다. "숨만 크게 내 쉬어도/ 와르르 쏟아"질 만큼 위태로운 그리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목련의 그리움은 부치지 못하는 그리움이다. 그래서 목련의 발 아랜 "부치지 못한 엽서처럼/ 빛바랜 꽃잎 수북하"게 쌓이는 것이다.
봄이 되면 길가에 혹은 허물어져가는 돌담에 기대어 수줍게 피어난 목련은 이렇게 여러 가지 스펙트럼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겨우내 눌려있던 정서를 환기시킨다.
▲ 활짝 피어나기 직전의 목련 꽃 봉오리. ⓒ 안병기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회색빛 우중충한 항구를 몽유병자처럼 배회하다가 도선장으로 나가 배를 타고 아무런 목적 없이 군산 - 장항 간을 오가기도 했다. 이 노래 한 소절이 내 사춘기의 봄을 몽유(夢遊)의 나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때 이후 목련은 내게 4월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유백색의 꽃이 내뿜는 성스럽고 순결한 이미지 때문일까. 정서적 더듬이가 예민한 이 나라 시인들 역시 목련 꽃에서 짜르르한 정서적 울림을 받는 듯하다. 봄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 가운데는 유난히 목련 꽃을 노래하는 시가 많다. 가히 독과점이라 할만하다.
언어를 절제하는 시인의 힘이 낳은 아름다운 시
목련의 이미지 혹은 목련의 이미지를 차용해 다른 사물을 노래하는 수많은 시 가운데 단연 군계일학은 지리산 자락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복효근 시인이 쓴 '목련꽃 브라자'가 아닐는지.
▲ 시집 표지 ⓒ 천년의시작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 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래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 복효근 시 '목련꽃 브라자' 전문
196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복효근은 1991년 <시와시학>으로 문단에 나온 이래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등의 시집을 상자 했다. 시 '목련꽃 브라자'느 다섯 번째 시집인 <목련꽃 브라자>에 실린 시 가운데 한 편이다.
복효근 시인은 우리네 삶의 언저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친근한 어법으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심지어 삶의 거짓과 이중성을 비판할 때마저 사랑과 반성으로 따뜻하게 보듬는다. 일상적 소재에 빗대 자신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시 '목련꽃 브라자'는 한 수줍은 소녀가 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흰 목련과 젖 가리개인 브라자는 둘 다 흰색이다. 하얀색이라는 이미지의 동질성을 매개로 봉긋 솟아오른 흰 목련 꽃봉오리와 부풀어 오르는 딸아이의 앞가슴을 감싼 브라자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환치한다.
시에 등장하는 선혜라는 소녀는 아마도 시인의 딸인 모양이다. "우리"라는 대명사가 그걸 암시해준다. 시인은 목련꽃의 아름다움과 목련송이처럼 벙그는 선혜 앞가슴 중 어떤 것이 더 예쁠까를 저울질한다. 그러나 저울질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시인은 이내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라고 뻐긴다. 어찌나 재빠르고 싱겁게 결론을 내리고 마는지 선혜의 아름다움을 극대화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하고만 목련꽃이 가엾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런데 시인은 어떻게 선혜 앞가슴이 품은 눈부신 아름다움을 아는 것일까. "내 볼까봐 기겁"을 하는데 말이다. 시인은 "빨래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안다고 귀띔한다. 이것을 혜안이라 해야 할는지, 주책이라 해야 옳을는지.
이 시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것은 '벙그는'이라는 동사와 말없음표이다. 목련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가리키는 '벙그는'이라는 동사는 나날이 커가는 앞가슴의 이미지에 동적인 요소를 부여하고 끝 모를 감탄으로 말미암아 말을 끝맺지 못하는 말없음표는 앞가슴이 가진 눈부신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언어를 절제하는 시인의 힘때문이다.
행여 시의 감흥을 해치지나 않을지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분명히 밝혀둘 것이 있다. 목련과 백목련은 둘 다 목련과에 속하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나무다. 우선 원산지부터 다르다. 목련은 한국이 원산이지만 백목련은 중국이 원산이다. 또 목련은 활짝 피면 6장의 꽃잎이 편평하게 펴져서 너풀거리면서 약간 산만하게 보인다. 그러나 9장의 꽃잎이 서로 겹쳐진 백목련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 핀다. 시인의 비유는 목련이 아닌 백목련의 모양을 염두에 둔 비유가 아닐까 싶다.
부치지 못하는 그리움이 낳은 아름다움
복효근의 시가 성장기 소녀의 앞가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목련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라면 목련을 직접 의인화한 시도 있다. 이병훈 시인이 쓴 '목련'이란 시가 바로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다.
꽉 동여맨 젖가슴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옷고름 살짝 풀었다
눈이 부신 속살
태양도 환장한 듯
구름 속을 들락거리며
슬쩍슬쩍 훔쳐본다
맘껏 부풀던 봉오리
숨만 크게 내 쉬어도
와르르 쏟아지는
뽀얗게 보고 싶은 얼굴
눈이 시린 봄날
양지바른 담장 아래
부치지 못한 엽서처럼
빛바랜 꽃잎 수북하다
-이병훈 시 '목련' 전문 <문학사계> 2008년 봄호
1925년 군산 옥산면 당북리에서 태어난 이병훈 시인은 1959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1970년 첫 시집 <단층>을 상자한 이래 <어느 흉년에>(1982), <멀미>(1983), <달무리의 作人들>(1986), 장편서사시 <녹두장군>(1991) 등 17권의 시집을 펴내는 등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왕성한 시작활동을 벌였다.
이병훈 시인은 기꺼이 삶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피폐된 현실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면서 올곧은 시각으로 비판함으로써 삶의 황폐함을 치유하려고 애쓴다. 최근에 펴낸 <물이 새는 지구>(2001) 등의 시집을 보면 말년에 이르러선 시인의 관심의 추가 생태주의적인 데로 크게 기울었음을 알 수 있다.
시 '목련'은 목련을 저고리 입은 여인으로 의인화하고 있다. 복효근의 시와는 달리 브라자를 차지 않은 전통적 여인상이다. 그냥 젖가슴을 옷고름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옷고름이 살짝 풀린 틈으로 눈부신 속살이 드러난다. 그 속살을 훔쳐보고 싶은 건 비단 사람만이 아니다. "태양도 환장한 듯/ 구름 속을 들락거리며" 슬쩍슬쩍 훔쳐보는 것이다.
그러나 목련은 남들이 자신의 속살을 훔쳐보든 말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뽀얗게 보고 싶은 얼굴" 생각에 골똘할 뿐이다. "숨만 크게 내 쉬어도/ 와르르 쏟아"질 만큼 위태로운 그리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목련의 그리움은 부치지 못하는 그리움이다. 그래서 목련의 발 아랜 "부치지 못한 엽서처럼/ 빛바랜 꽃잎 수북하"게 쌓이는 것이다.
봄이 되면 길가에 혹은 허물어져가는 돌담에 기대어 수줍게 피어난 목련은 이렇게 여러 가지 스펙트럼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겨우내 눌려있던 정서를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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