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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스쿠터 두 눈으로 보니... '허걱'

[봄, 스쿠터는 달린다 ①] 이탈리안 스쿠터 동호인들을 만나다

등록|2009.04.12 13:09 수정|2009.04.12 15:02

▲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역을 맡은 오드리 햅번은 근사한 바이크를 타고 나타났다. 이탈리안 스쿠터 '베스파'였다. 이탈리아어로 '말벌'을 뜻하는 베스파는 60여 년동안 1700만 대가 넘게 팔릴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 파라마운트 픽처스


1997년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업무는 철가방 배달. 동네 지리도 모르고 모터사이클을 탈 줄도 몰랐지만, 자동차 운전면허증이 있다는 걸 믿고 "열심히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호언장담에 곧바로 채용. 한 달 동안 열심히 다녔다. 낯붉히는 일도 많았다. 민감한 손잡이를 잘못 당겨 오르막길에서 말처럼 '껑충' 뛰는 경험을 했는가 하면, 중심을 잡지 못해 허둥대다 철가방이 오그라드는 일도 겪었다. 그리곤 12년이 지났다.

케케묵은 기억을 떠올린 것은 이탈리안 스쿠터 동호회 취재를 하게 됐기 때문. 국산도 일본제도 아닌 이탈리안 스쿠터라니. 귀동냥을 해보니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탄 바이크가 바로 이탈리안 명품 '베스파'란다. 2007년 영화배우 미키 루크가 몰고 가다 음주운전으로 걸렸을 때의 그 바이크도 바로 베스파다. 말론 브란도, 찰리 채플린, 로버트 드 니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타이거 우즈 등 수많은 유명인들이 베스파 애호가다.

영화 수백편에도 출연한 베스파는 60여 년째 그 모양 그대로다. 어디 베스파뿐인가. 아프릴리아가 선보인 아바나(HABANA, 국내명 MOJITO)와 램브레타(LAMBRETTA) 등 이탈리안 스쿠터는 사람들 눈길 쏙 빼놓는 도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 이탈리안 스쿠터 베스파에 앉은 신지윤씨. ⓒ 김대홍

지난 5일 서울 남산 김구 동상 앞에서  기다리던 그들을 만났다. 모인 이들은 '이탈리안 스쿠터 클럽' 회원들. 여기에 이탈리안 바이크에 일가견이 있는 강호의 고수(?)들이 모였다. 대략 10여 명. 초등학교 딸과 함께 온 40대 아빠, 20대 대학생, 놀이기구 수리기사, 대학교 행정직원 등 다양하다. 바이크 이름을 물었더니  질레라(GILERA), 피아지오(PIAGGIO), 아프릴리아(APRILIA), 비너스, DNA 등 외국어가 쏟아진다. 음…, 통과다. 재미있는 사연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다 바이크로 만난 부부를 찾았다. 오호.

부인은 신지윤(31)씨. 사업을 하다 결혼해 지금은 전업주부다. 대학생이기도 하다. 베스파LX를 끌고 나왔다. 2007년에475만원을 주고 샀단다. 수많은 바이크 중 하필 베스파를 고른 이유를 물었다.

"아유, 이런 이야기 하면 욕먹을 텐데. 예쁘잖아요. '간지'가 최고예요. 게다가 중형차처럼 묵직한 느낌이 들어요. 예쁘면서 묵직한 바이크가 바로 베스파예요."

좋다. 욕먹을 일 아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푹 빠지는 것 아닌가. 신씨는 베스파를 거의 꾸미지 않았다. "너무 꾸미면 싼 티 난다"는 게 이유다. 이탈리아 명품 스포츠카 페라리가 그렇단다. PX125(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탄 바이크) 같은 경우 바구니를 다는 경우도 있단다.

▲ 바이크는 쉽게 꾸밀 수 있는 게 매력. 김민규씨는 독도 번호판을 달았다. ⓒ 김대홍


남편은 김민규(32)씨. 2005년 바이크 동호회에서 만났다. 김씨가 타는 기종은 아프릴리아 아레나51이다. 단종모델이다. 50cc인데도 100km/h의 속도를 낸다. 비슷한 기종이 50~60km/h를 내는 것에 비하면 거의 두 배다. 내 얼굴에 놀라는 표정이 비쳤는지 김씨가 술술 자랑을 쏟아낸다. 수냉식이라서 장거리에 유리하단다. 살 때만 해도 4사이클(대출력)에 쓰는 수냉식 엔진을 쓰는 2사이클(소출력) 바이크는 아레나51이 유일했다고.

다시 물었다. 이탈리안 바이크 매력이 뭐냐고.

"말괄량이 아가씨 같은 느낌? 내가 꾸미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해요. 물론 말괄량이 아가씨를 정숙한 아가씨로 만들 수도 있죠."

동호회 회장인 변상범(24)씨가 꼽은 이탈리안 스쿠터의 매력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특별함'이다. 부품이 귀하고, 정비하기 어려운데도 굳이 이탈리안 바이크를 타는 이유다. 비싸긴 하지만, 디자인, 성능이 빼어나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단다. 학생 신분인 변씨가 몇 백만원짜리 바이크를 사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터.

변씨는 중학교 때부터 바이크로 통학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2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다. 더 좋은 바이크를 사기 위해서다. 그렇게 모은 돈을 '총알'이라고 불렀다. 마음에 드는 오토바이를 사는데 쓴다. 이탈리안 바이크엔 총알 쓰는 게 전혀 아깝지 않다고 강조했다.

118km 속도에 3바퀴... 별의별 스쿠터들

▲ 질레라 디엔에이는 스쿠터면서 경주용 바이크 느낌이 난다. ⓒ 김대홍

바이크 성능에 계속 놀라던 내게 동호회원들이 "저기 진짜 명품"이 있다며 가리킨다.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다. 주인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다. 한국디지털대학교 행정직원인 홍석범씨다. 바퀴 크기는 스쿠터인데 모양은 경주용이다. 레플리카(경주용 슈퍼바이크) 모델인 질레라 DNA 125란다. 한국엔 30대 정도만 있는 걸로 알려진 희소 바이크다.

15마력으로 힘이 좋아 속도가 118km/h까지 나온다. 특이한 점은 기름탱크 부분이 수납공간이라는 점. 헬멧을 넣으면 '쏙' 들어간다. 2008년 4월 형에게 인수받았다.

심병준(40)씨가 타고 온 바이크는 세 바퀴다. 지난해 만들어져 올해 출시된 질레라 FUOCO500ie다. 모양이 특이한 이 바이크를 산 이유는 가족을 위해서다. 몇 해 전 질레라 넥서스를 타다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다. 이후 부인이 계속 불안해했단다.

고심 끝에 고른 게 바로 3바퀴 스쿠터. 지금 스쿠터급에선 피아지오와 질레라에서만 만든단다. 아이도 무서워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성이 높은 게 특징이다. 마침 이날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을 태우고 왔다.

심씨는 다른 나라 제품에 비해 이탈리안 바이크가 기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완충장치(서스펜션)와 엔진 등이 훌륭하며, 특히 균형유지장치가 우수해 휘어지는 구간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한다고. 개성 '철철' 넘치는 디자인은 기본이란다.

가격은 1000만원이 넘는다. 놀란 표정을 짓자, 심씨는 "더 비싼 제품도 많다"면서 "별종이 아니라 멋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상범씨가 말을 보탠다. 자신들은 이탈리안 바이크를 즐기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다고. 옷, 신발 등 꾸미는 데 돈을 쓰지 않고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다고. 풍족해서 이탈리안 바이크를 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속이 무척 깨끗해지겠다"고 말하자 "대신 살이 찐다"며 변씨가 웃었다. 동호회원들은 무엇보다 바이크 문화를 바꾸고 싶다고 강조했다. 바이크를 낚시나 등산처럼 대중 취미 가운데 하나로 만들고 싶단다. 변상범씨가 동호회를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탄다, 수신호는 기본

"중학교 시절부터 바이크를 탔는데 친척형이 무척 자세히 지도를 해줬어요. 바이크는 이렇게 타라, 안전장비가 중요하다, 헬멧과 장갑은 이런 걸 써야 한다, 라구요. 그 때 폭주족 학생들을 생각했어요. 친척형처럼 옆에서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그렇게 빠지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죠. 제가 폭주족 아이들과 진지하게 얘기 나눠본 적 있어요. 오토바이 타는 사람은 남들과 다른 무엇을 얻고자 하는 성향이 있어요. 이탈리안 스쿠터 동호회를 만들면 개성도 살리면서 경험, 정보를 나눌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그 때가 2007년 6월 13일. 지금 700명이 조금 넘는 회원이 가입했다.

비슷한 경험을 홍석범씨가 털어놓았다. 그는 고3 때 폭주족 문화 속에서 바이크를 배웠다. 그 때는 무조건 튀고 싶었다.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스쿠터 매력을 알게 됐다. 지금은 배움에 푹 빠졌다. 책도 많이 읽었다.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탈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이들은 바이크 문화를 바꾸기 위해 많이 고민한다.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단다. 바이크는 자동차와 달라 고출력 차의 경우 신호등에서 다음 신호등까지 순식간에 200km/h를 낼 수 있다. 장점이지만 양날의 검이다. 바이크족들을 위한 수신호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다.

변씨가 몇 가지 수신호를 소개한다. 왼팔을 직각으로 세우고 손가락 하나를 펴면 1열 주행, 두 개를 펴면 2열 주행이다. 왼팔을 직각으로 세우고 손바닥을 펴면 우회전, 왼팔을 쭉 펴면 좌회전이다. 이런 수신호가 대략 14가지 정도 된다.

바이크 얕보는 시선은 불만... 호텔·백화점선 박대

자동차를 타는 이들에겐 바이크라는 기계를 이해해줄 것을 주문했다. 변씨는 언젠가 큰 사고를 당했던 적이 있다. 새벽이었다. 직진하던 택시가 건너편 손님을 태우기 위해 갑자기 중앙선을 넘었다. 깜박이도 안 켠 상태였다. 택시는 바이크를 봤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했다. 바이크와 자동차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태도였다.

오토바이는 미끄러졌고 부딪혔다. 2바퀴와 4바퀴는 안정성이 다르다. 특히 돌발상황에서 그렇다.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그들은 바이크를 얕보는 시선에 대해서 불만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자동차를 타야 대접받는단다. 특히 고급자동차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고. 바이크를 타면 호텔이나 백화점 등에서 문전박대당하기 일쑤란다. 동호인들은 자동차와 바이크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쉽진 않을 듯하다. 차도야말로 정글과 같은 곳이 아닌가. 문득 변씨가 어떻게 갈 것이냐고 묻는다. 자전거를 가리켰다. 순간 눈을 번득인다.

"어, 나도 자전거 관심 있는데. 한 대 지르려고 고민 중이에요."

곧이어 저녁에 뭐 먹을지 갑론을박이다.

"우리 저녁 뭐 먹는 게 좋을까."
"순두부."
"에이, 순두부는 무슨. 고기 먹어야지."

평일엔 경기도 양평에 가서 칼국수를 먹고, 주말엔 춘천에 가서 닭갈비를 먹는 이들. 이탈리안 바이크 이야기를 하면 밤 새는 줄 모른다. 따분한 일상에 지쳐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본보기다. 호기심 많고, 멋에 대해선 과감하며, 인생을 즐기는 이들. 그들이 바로 이탈리안 스쿠터 동호인들이다.

▲ 자기 바이크에 앉은 동호인들. 주로 경기도 양평이나 강원도 춘천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바이크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밤 새도록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는단다. ⓒ 김대홍



내가 처음 바이크를 타시 시작한 이유는 고등학교 통학을 위해서였다. 집은 서울 노원구 공릉2동이었고 학교는 강남구 수서동에 있었기 때문. 그래서 난 그 때 첫 '애마'를 마련했다. 사실 1시간 20분이 걸리는 통학은 나에게 너무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차들의 행렬만 봐도 가슴까지 꽉 막힌다. 거기다 기름 값은 오죽 비싼가? 자동차를 타고 통학을 할 경우, 가정경제에 부담을 주는 건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스쿠터는 이런 모든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커버해줬다. 우선 아침마다 교통대란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기름도 적게 들어가서 경제적 타격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점은 매일 아침 상쾌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것과 매일 다른 얼굴로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태양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러 요소들은 학교생활과 입시 때문에 하루하루 찌들어가는 내 마음과 건강을 정화시켜줬다. 거기다 시원스런 스쿠터 엔진소리는 지루함과 답답함을 한방에 날려줬다.

어느덧 나에게 스쿠터는 단순히 출퇴근만을 위한 기계덩어리가 아닌, 나와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 같은 존재가 돼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다가 휴학한 뒤 유학을 가기 위해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지금까지도 스쿠터는 나의 이동수단이자 소중한 친구다.

그럼 이쯤에서 출근길에 목격한 사건 하나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평소와 같이 스쿠터를 타고 교대 근처에 있는 회사로 향하고 있던 나. 역시 그날도 도로 위에 있는 차들은 움직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택시 한 대가 손님을 내려주려는지 차들 사이를 비집고 인도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뒤를 스쿠터 한 대가 따르고 있었다. 인도에 가까이 접근한 택시 뒷문은 망설임 없이 벌컥 열렸고, 뒤를 따르던 스쿠터는 갑자기 열린 문과 충돌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리려던 손님은 놀랐는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택시 기사는 차 안에 앉아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넘어진 스쿠터 운전자를 돕지 않았다. 똑같이 스쿠터를 타는 입장이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사고 현장에는 손을 다친 스쿠터 운전자가 쓰러져 있었다. 나는 얼른 119에 신고하고 스쿠터 운전자를 한쪽으로 이동시킨 뒤 사고현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대부분 운전자들이 자신의 출근길에 방해가 되는 이 광경을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출근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날 사고는 이륜차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전한 택시기사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이륜차 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륜차 운전자들도 자동차 운전자들도 서로의 특성을 이해하고 도로교통을 지킨다면 이번 일과 같은 사고는 줄어들 것이다.

고유가와 환경오염에 효과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는 이륜차 이용을 위한 여건과 효율적인 도로환경을 위해 이륜차 운전자와 자동차 운전자 모두가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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