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연가' 부르며 떠나는 풍기구곡 탐방기
아름다운 소도읍, 영주시 풍기읍을 찾아 떠나는 여행
오랜 만에 청량리에서 중앙선 새벽 기차를 타고 3시간 20분 걸려서 경북 영주시에 있는 풍기역에 도착했다.
중앙선 기차타고 죽령터널 빠져나올 때면
인삼 내음 사과향기 꿈결 같은 내 고향 풍기
밤낮없이 흘러내려도 희방폭포 마르지 않듯
날이 갈수록 그리워지는 풍기로 가고 싶어라.
소백산 철쭉꽃이 울긋불긋 피어날 때면
인삼밭도 사과밭도 춤을 추는 내 고향 풍기
온천물에 몸을 씻으면 하늘처럼 푸르른 마음
인견 옷 입고 뛰놀던 그곳 풍기로 가고 싶어라.
풍기 출신의 수필가이며 시인, 작사가인 김하리 선생이 작곡가 안치행 선생과 함께 만든 <풍기연가>라고 하는 노래의 가사이다. 풍기가 고향인 사람이나 <사과향기 풍기는>이라는 풍기와 사과를 절묘하게 섞어놓은 '풍기사과' 브랜드로 사과를 팔고 있는 풍기농협 농특산물 판매장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을 대표할 수 있는 볼거리는 당연 소백산이지만, 풍기인들이 가장 자주 찾는 명소는 당연 삼가동, 욱금동 가는 옛길 가운데 있는 금선정(錦仙亭)이다.
요즘이야 비로사와 비로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삼가동 가는 길이 새롭게 생겨서 금선정으로 갈 일이 줄었지만, 삼가동저수지가 생기기 전인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반드시 비로봉 가는 길에 금선정을 둘러보고 가야했다.
풍기읍 금계2리 장선(長善)마을. 장선마을은 옛날엔 지형이 긴 배모양 같다고 하여 장선(長船)마을로 불리다가, 착한 사람이 많이 나고 번성하라는 의미에서 장선(長善)마을 혹은 효자가 많이 나서 효(孝)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마을을 안고 약 1.5㎞에 걸쳐 형성된 금선계곡은 소백산 비로봉과 연화봉에서 발원한 정안동(靜安洞)계곡과 욱금동천(郁錦洞天)이 만나는 곳으로 500년 넘는 수령의 소나무와 기암괴석, 맑은 물이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계곡 중간 지점의 물가 절벽인 금선대(錦仙臺) 위에 금선정이 위치하고 있다. 금선대라는 이름은 조선 인조 때의 인물로 풍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정한 이름이다. 공조좌랑,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지낸 청빈한 학자이며, 청백리 목민관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아 쉬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후 황준량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 칭하였다. 이 계곡을 금선계곡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금선정 서쪽 산 중턱에는 황준량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만년의 장수처로 삼고자 짓던 금양정사(錦陽精舍)이 있지만, 그는 생전에 집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공부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책상에 앉아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피로를 얻어 병이 날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계는 대학자 농암 이현보 선생의 손자사위로, 처가에서 퇴계를 처음만나 스승과 수제자 혹은 학문적 동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퇴계보다 17살이나 어렸던 금계는 병을 얻어 낙향하던 중, 퇴계보다 앞서 47세에 예천에서 임종했다는 소식은 들은 퇴계는 '실성하게 길게 부르짓으며 물을 짜내듯이 늙은이는 눈물을 흘렸다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득하여 목이 메는 구나. 그대가 물러나서 돌아오면 실로 오가면서 옛 우의를 다시 회복하자는 언약이 있었는데, 그대 늘 내가 늙고 병들어 견디기 어려울 것을 근심하더니 어찌 짐작인들 했으랴, 오늘 늙고 병든 내가 살아 있어 도리어 한창 나이인 그대를 곡하게 될 줄이야.'라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금계 황준량이 금선계곡을 유독 사랑한 이유는 그의 자연회귀적인 심성과 은둔의 여유와 즐거움을 익히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자연 속에서 도(道)가 생성,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금선계곡을 사랑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풍기에는 금계 선생이 있고,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 선생이 있다고 말을 할 정도로 금계 선생을 기리고 있다.
금계는 금선계곡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겼다.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 부질없이 헛되이 꾀할 수 없고
한번 꾼 한단지몽(邯鄲之夢)엔 아직 머리가 세지 않았다네
성품을 온전히 보전하려면 차라리 욕심을 조금 조릴 것이요
마음이 고요하니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원헌(原憲)은 가난이 병이 아니라 스스로 믿었고
범희문(范希文)은 물러나서도 근심을 했네
거문고와 책을 물리쳐 버리면 다른 일이 없으니
하늘에 노는 만물의 조종은 참으로 아름답네.
*한단지몽(邯鄲之夢): 노생(盧生)이 한단의 장터에서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는 동안 일생의 경력을 모두 꿈꾼 고사에서 나온 말로, 인간 일생의 영화는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을 비유한 말
*원헌(原憲) : 공자의 제자. 청빈의 대명사적인 인물
*범희문(范希文)은 <악양루기>에 나라를 생각하는 지사(志士)는 반드시 '천하의 걱정을 먼저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마지막에 즐기라'라는 뜻으로 '선우후락(先憂後樂)'이란 말을 남겼다.
이황 선생도 금계 생전에 이곳을 즐겨 찾으며 시를 한 편 남겼다.
신선 될 재주 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보네
얼시구 풍류 찾아 떠도는 손(客)들아
여기 자주 와서 세상 시름 씻어 보세
금선정을 뒤로 하고 욱금동 삼가저수지를 지나 삼가동을 둘러본 후 비로사(毘盧寺)로 향한다. 비로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진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진정은 의상대사가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이다.
신라 말 진공스님을 청해 이곳에서 살게 했는데, 그때 고려 태조 왕건이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진공대사는 신라 문성왕 17년인 서기855년에 태어났고 고려 태조 20년인 서기937년에 입적한 분으로, 나말려초에 활약하였던 지식인이다. 그는 신라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남종선(南宗禪)을 받아들인 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제자이다.
일찍이 호족 최선필과 왕능장 등과 인연을 쌓아 여러 가지 자문을 하였으며, 서기 931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직접 소백산의 산사를 찾아 자문을 받기도 하였고, 서기 937년에는 태조의 요청으로 직접 개경을 방문하여 만나는 등 고려의 건국과 국가체제 정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비는 대사 입적 후 2년이 지난 서기 939년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주요한 문화재는 진공대사보법탑비(경북유형문화재 4)와 석조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7),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6) 등이 있다.
고려의 통일국가 건립에 큰 기여를 한 진공대사 때문인지, 안동과 영주지역의 사람들이 고려를 많이 도와주어서 인지, 풍기가 <정감록>에도 나오는 조선 최고의 길지 중에 하나이여서 인지 고려왕조는 비로사 인근에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만들게 한다.
비로사 옆에 있는 달밭골을 지나 비로봉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10~1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다 보면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했다고 추정되는 300~400평 정도의 사고터가 나온다. 정규 등산로 옆에 있는 이곳은 주춧돌과 몇 개의 기단석 정도만 남아 있지만, 인근의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사고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아무런 안내표시판도 알림 표시도 없어 알고가지 않으면 쉽게 분간을 할 수 없어 아쉽다.
고려시대에는 비로사가 소백산에서 가장 큰 절중에 하나였고, 비로사 터와 절간의 모습은 고려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닮아있다. 언덕 위에 지어져 있고, 아래에서 보면 거대해 보이지만, 실제로 올라가 보면 그다지 크지 않은 모습이 고려왕궁의 모습인데, 흡사하다.
산을 내려와 다시 금계리로 향한다. 금계1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풍기인삼 시배지'와 비석이 나오고, 십승지 중에 최고의 길지임을 알리는 표식도 보니다.
풍기는 길지가 가지고 있는 좋은 조건을 전부 가지고 있다. 3봉 2수의 길지의 조건인 소백산의 도솔봉, 비로봉, 연화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천과 금계천이 풍기읍을 관통한다. 그 아래에 살면 가뭄, 홍수, 전쟁, 기근 등의 피해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구한말부터 정감록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많은 곳이다. 길지라서 그런지 외지인도 많지만, 풍기에는 교회도 절도 많다.
다음은 영주에 소재한 유일한 4년제 대학인 동양대(http://www.dyu.ac.kr)를 둘러 본 이후, 학교 옆에 있는 대한광복단 기념관(http://www.kwangbokdan.com)과 기념공원을 살펴본다. 구한말 혼란한 시기 정감록에 기록된 최고의 길지인 풍기를 찾은 외지인들은 상당히 많다. 현재도 풍기읍 인구의 1/4 정도는 그들의 후손이다.
특히 그들은 후손은 풍기읍 금계리에 터를 잡고 풍기인삼재배와 풍기인견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일제가 조선을 무단 점령한 초기인 1913년에 경상도 산골의 소도읍 풍기에서 설립된 대한광복단은 교통요지에 정감록을 보고 찾아온 외지인이 많아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기 편했고, 물산이 넘쳐 자금 확보도 쉬웠으며, 풍기지역의 반골정신과 충절의식이 쉽게 결합한 연유에서 인 것 같다.
이외에도 풍기는 인삼이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인삼, 홍삼, 산삼관련 기업들이 비트로시스(http://www.vitrosys.com), 천제명홍삼(http://www.v33.co.kr), 홍원인삼제조창(http://www.hanpungjung.com), 소백코리아(http://www.sobaekkorea.com) 등이 있고 인삼도소매시장만 해도 크게 4곳이나 있다.
아울러 최고의 여름옷이라 불리는 인견도 공장과 판매장이 100여 곳에 이르며, 블리스, 풍기인견백화점, 홍승애 풍기인견 등 유명 판매점도 여러 곳 있다. 영주의 명품 농특산물인 풍기인삼과 영주한우, 영주사과는 한국능률협회에서 전국 최초로 '웰빙인증'을 받았고, 풍기인견의 경우에도 전국 최초로 공산품 '웰빙인증'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소백산의 또 다른 절인 희방사와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 희방사 옛길, 죽령 옛길, '영주 소백산풍기온천'(http://www.sobaeksanpunggispa.or.kr)을 비롯한 관광지와 풍기인삼과 영주한우가 결합한 풍기인삼갈비, 영주한우마을, 영주축협 한우프라자, 약선당, 인천식당, 생강 인삼 허브 커피 도너츠를 만드는 정 도너츠 등 식당과 판매점 등이 있다.
그리고 소백산의 암반수를 개발한 지역 최초의 생수 브랜드 '소백산 산수'를 출시한 소백산 수(水)플러스 생수공장도 동양대 뒤편에 생겼다.
마지막으로 나를 즐겁게 한 곳은 수철리의 '소백산 희방 전통된장(http://www.sobaeksanhibang.com)'과 백1리의 '백일식품'된장 공장이다.
중앙선 기차타고 죽령터널 빠져나올 때면
인삼 내음 사과향기 꿈결 같은 내 고향 풍기
밤낮없이 흘러내려도 희방폭포 마르지 않듯
날이 갈수록 그리워지는 풍기로 가고 싶어라.
인삼밭도 사과밭도 춤을 추는 내 고향 풍기
온천물에 몸을 씻으면 하늘처럼 푸르른 마음
인견 옷 입고 뛰놀던 그곳 풍기로 가고 싶어라.
풍기 출신의 수필가이며 시인, 작사가인 김하리 선생이 작곡가 안치행 선생과 함께 만든 <풍기연가>라고 하는 노래의 가사이다. 풍기가 고향인 사람이나 <사과향기 풍기는>이라는 풍기와 사과를 절묘하게 섞어놓은 '풍기사과' 브랜드로 사과를 팔고 있는 풍기농협 농특산물 판매장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노래이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을 대표할 수 있는 볼거리는 당연 소백산이지만, 풍기인들이 가장 자주 찾는 명소는 당연 삼가동, 욱금동 가는 옛길 가운데 있는 금선정(錦仙亭)이다.
▲ 장자 금선정과 금선계곡 ⓒ 김수종
요즘이야 비로사와 비로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삼가동 가는 길이 새롭게 생겨서 금선정으로 갈 일이 줄었지만, 삼가동저수지가 생기기 전인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반드시 비로봉 가는 길에 금선정을 둘러보고 가야했다.
풍기읍 금계2리 장선(長善)마을. 장선마을은 옛날엔 지형이 긴 배모양 같다고 하여 장선(長船)마을로 불리다가, 착한 사람이 많이 나고 번성하라는 의미에서 장선(長善)마을 혹은 효자가 많이 나서 효(孝)마을이라고도 불린다.
마을을 안고 약 1.5㎞에 걸쳐 형성된 금선계곡은 소백산 비로봉과 연화봉에서 발원한 정안동(靜安洞)계곡과 욱금동천(郁錦洞天)이 만나는 곳으로 500년 넘는 수령의 소나무와 기암괴석, 맑은 물이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계곡 중간 지점의 물가 절벽인 금선대(錦仙臺) 위에 금선정이 위치하고 있다. 금선대라는 이름은 조선 인조 때의 인물로 풍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정한 이름이다. 공조좌랑, 호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지낸 청빈한 학자이며, 청백리 목민관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이곳을 자주 찾아 쉬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했다.
이후 황준량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 칭하였다. 이 계곡을 금선계곡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금선정 서쪽 산 중턱에는 황준량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만년의 장수처로 삼고자 짓던 금양정사(錦陽精舍)이 있지만, 그는 생전에 집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공부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책상에 앉아 밤을 새우는 일도 많았다. 하여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피로를 얻어 병이 날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계는 대학자 농암 이현보 선생의 손자사위로, 처가에서 퇴계를 처음만나 스승과 수제자 혹은 학문적 동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퇴계보다 17살이나 어렸던 금계는 병을 얻어 낙향하던 중, 퇴계보다 앞서 47세에 예천에서 임종했다는 소식은 들은 퇴계는 '실성하게 길게 부르짓으며 물을 짜내듯이 늙은이는 눈물을 흘렸다오. 하늘이 이 사람을 빼앗음이 어찌 이다지도 빠른가. 참인가. 꿈인가. 놀랍고 아득하여 목이 메는 구나. 그대가 물러나서 돌아오면 실로 오가면서 옛 우의를 다시 회복하자는 언약이 있었는데, 그대 늘 내가 늙고 병들어 견디기 어려울 것을 근심하더니 어찌 짐작인들 했으랴, 오늘 늙고 병든 내가 살아 있어 도리어 한창 나이인 그대를 곡하게 될 줄이야.'라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금계 황준량이 금선계곡을 유독 사랑한 이유는 그의 자연회귀적인 심성과 은둔의 여유와 즐거움을 익히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자연 속에서 도(道)가 생성,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금선계곡을 사랑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풍기에는 금계 선생이 있고,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 선생이 있다고 말을 할 정도로 금계 선생을 기리고 있다.
금계는 금선계곡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겼다.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 부질없이 헛되이 꾀할 수 없고
한번 꾼 한단지몽(邯鄲之夢)엔 아직 머리가 세지 않았다네
성품을 온전히 보전하려면 차라리 욕심을 조금 조릴 것이요
마음이 고요하니 다시 무엇을 구하리요
원헌(原憲)은 가난이 병이 아니라 스스로 믿었고
범희문(范希文)은 물러나서도 근심을 했네
거문고와 책을 물리쳐 버리면 다른 일이 없으니
하늘에 노는 만물의 조종은 참으로 아름답네.
*한단지몽(邯鄲之夢): 노생(盧生)이 한단의 장터에서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는 동안 일생의 경력을 모두 꿈꾼 고사에서 나온 말로, 인간 일생의 영화는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을 비유한 말
*원헌(原憲) : 공자의 제자. 청빈의 대명사적인 인물
*범희문(范希文)은 <악양루기>에 나라를 생각하는 지사(志士)는 반드시 '천하의 걱정을 먼저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마지막에 즐기라'라는 뜻으로 '선우후락(先憂後樂)'이란 말을 남겼다.
이황 선생도 금계 생전에 이곳을 즐겨 찾으며 시를 한 편 남겼다.
신선 될 재주 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보네
얼시구 풍류 찾아 떠도는 손(客)들아
여기 자주 와서 세상 시름 씻어 보세
▲ 저수지 비로사 가는 길에 있는 삼가동 저수지 ⓒ 김수종
금선정을 뒤로 하고 욱금동 삼가저수지를 지나 삼가동을 둘러본 후 비로사(毘盧寺)로 향한다. 비로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진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진정은 의상대사가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이다.
▲ 비석비로사에 있는 진공대사보법탑비 ⓒ 김수종
신라 말 진공스님을 청해 이곳에서 살게 했는데, 그때 고려 태조 왕건이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보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진공대사는 신라 문성왕 17년인 서기855년에 태어났고 고려 태조 20년인 서기937년에 입적한 분으로, 나말려초에 활약하였던 지식인이다. 그는 신라의 귀족 출신이었으며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남종선(南宗禪)을 받아들인 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선사(道義禪師)의 제자이다.
일찍이 호족 최선필과 왕능장 등과 인연을 쌓아 여러 가지 자문을 하였으며, 서기 931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직접 소백산의 산사를 찾아 자문을 받기도 하였고, 서기 937년에는 태조의 요청으로 직접 개경을 방문하여 만나는 등 고려의 건국과 국가체제 정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비는 대사 입적 후 2년이 지난 서기 939년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주요한 문화재는 진공대사보법탑비(경북유형문화재 4)와 석조당간지주(경북유형문화재 7),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6) 등이 있다.
고려의 통일국가 건립에 큰 기여를 한 진공대사 때문인지, 안동과 영주지역의 사람들이 고려를 많이 도와주어서 인지, 풍기가 <정감록>에도 나오는 조선 최고의 길지 중에 하나이여서 인지 고려왕조는 비로사 인근에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를 만들게 한다.
▲ 사고터 소백산 비로사 옆에 있는 고려왕조실록 사고터 ⓒ 김수종
비로사 옆에 있는 달밭골을 지나 비로봉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10~1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다 보면 고려왕조실록을 보관했다고 추정되는 300~400평 정도의 사고터가 나온다. 정규 등산로 옆에 있는 이곳은 주춧돌과 몇 개의 기단석 정도만 남아 있지만, 인근의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사고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아무런 안내표시판도 알림 표시도 없어 알고가지 않으면 쉽게 분간을 할 수 없어 아쉽다.
고려시대에는 비로사가 소백산에서 가장 큰 절중에 하나였고, 비로사 터와 절간의 모습은 고려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닮아있다. 언덕 위에 지어져 있고, 아래에서 보면 거대해 보이지만, 실제로 올라가 보면 그다지 크지 않은 모습이 고려왕궁의 모습인데, 흡사하다.
▲ 금계리 정감록에 나오는 천하제일의 십승지 가운데 으뜸인 금계리 ⓒ 김수종
산을 내려와 다시 금계리로 향한다. 금계1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풍기인삼 시배지'와 비석이 나오고, 십승지 중에 최고의 길지임을 알리는 표식도 보니다.
▲ 금계리 풍기인삼의 최초 재배지 금계리 ⓒ 김수종
풍기는 길지가 가지고 있는 좋은 조건을 전부 가지고 있다. 3봉 2수의 길지의 조건인 소백산의 도솔봉, 비로봉, 연화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천과 금계천이 풍기읍을 관통한다. 그 아래에 살면 가뭄, 홍수, 전쟁, 기근 등의 피해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구한말부터 정감록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많은 곳이다. 길지라서 그런지 외지인도 많지만, 풍기에는 교회도 절도 많다.
▲ 공원 대한광복단기념공원 ⓒ 김수종
다음은 영주에 소재한 유일한 4년제 대학인 동양대(http://www.dyu.ac.kr)를 둘러 본 이후, 학교 옆에 있는 대한광복단 기념관(http://www.kwangbokdan.com)과 기념공원을 살펴본다. 구한말 혼란한 시기 정감록에 기록된 최고의 길지인 풍기를 찾은 외지인들은 상당히 많다. 현재도 풍기읍 인구의 1/4 정도는 그들의 후손이다.
▲ 인삼풍기인삼시장 ⓒ 김수종
특히 그들은 후손은 풍기읍 금계리에 터를 잡고 풍기인삼재배와 풍기인견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일제가 조선을 무단 점령한 초기인 1913년에 경상도 산골의 소도읍 풍기에서 설립된 대한광복단은 교통요지에 정감록을 보고 찾아온 외지인이 많아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기 편했고, 물산이 넘쳐 자금 확보도 쉬웠으며, 풍기지역의 반골정신과 충절의식이 쉽게 결합한 연유에서 인 것 같다.
▲ 홍삼천제명 홍삼 ⓒ 김수종
이외에도 풍기는 인삼이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인삼, 홍삼, 산삼관련 기업들이 비트로시스(http://www.vitrosys.com), 천제명홍삼(http://www.v33.co.kr), 홍원인삼제조창(http://www.hanpungjung.com), 소백코리아(http://www.sobaekkorea.com) 등이 있고 인삼도소매시장만 해도 크게 4곳이나 있다.
▲ 인견풍기인견- 여름 옷으로 최고이다 ⓒ 김수종
아울러 최고의 여름옷이라 불리는 인견도 공장과 판매장이 100여 곳에 이르며, 블리스, 풍기인견백화점, 홍승애 풍기인견 등 유명 판매점도 여러 곳 있다. 영주의 명품 농특산물인 풍기인삼과 영주한우, 영주사과는 한국능률협회에서 전국 최초로 '웰빙인증'을 받았고, 풍기인견의 경우에도 전국 최초로 공산품 '웰빙인증'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소백산의 또 다른 절인 희방사와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 희방사 옛길, 죽령 옛길, '영주 소백산풍기온천'(http://www.sobaeksanpunggispa.or.kr)을 비롯한 관광지와 풍기인삼과 영주한우가 결합한 풍기인삼갈비, 영주한우마을, 영주축협 한우프라자, 약선당, 인천식당, 생강 인삼 허브 커피 도너츠를 만드는 정 도너츠 등 식당과 판매점 등이 있다.
▲ 산수 풍기에 처음 생긴 소백산 산수공장의 '소백산 산수' ⓒ 김수종
그리고 소백산의 암반수를 개발한 지역 최초의 생수 브랜드 '소백산 산수'를 출시한 소백산 수(水)플러스 생수공장도 동양대 뒤편에 생겼다.
마지막으로 나를 즐겁게 한 곳은 수철리의 '소백산 희방 전통된장(http://www.sobaeksanhibang.com)'과 백1리의 '백일식품'된장 공장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안내: 청량리에서 새벽 6시부터 출발하는 풍기행 중앙선 열차를 타고 3시간 20분 정도면 경북 영주시 풍기읍에 있는 풍기역에 도착한다. 풍기읍내를 둘러보고, 금선정, 비로사, 희방사 정도는 하루면 둘러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동은 도보나 간간히 지나는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이틀 정도의 시간이 있으면, 소백산 등반과 풍기인삼, 풍기인견, 영주한우 등을 맛보고 풍기온천 등을 즐길 수 있다. 지역이 별로 크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풍기군의 소재지로 있던 곳이라 나름대로 알찬 볼거리, 먹을거리, 입을 거리가 많은 곳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는 밤늦은 시간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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