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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터 두마리, 한라산 1100고지에서 길을 잃다

[봄, 스쿠터는 달린다②]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스쿠터 여행

등록|2009.04.12 13:09 수정|2009.04.12 13:09

▲ 스쿠터로 제주도 여행하기 ⓒ 임준규


20대 초반, 나는 홍대에서 내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흔히들 얘기하는 인디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홍대 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을 해야 하는 장소가 홍대이기도 했지만, 홍대가 지닌 특유의 분위기가 더 좋았기에 거의 매일을 홍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홍대 근처에서 아주 클래식한 디자인을 지닌 바이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자유롭게 거리를 달리곤 했다. 그 바이크가 어떤 회사 건지, 어떤 모델인지도 몰랐지만, 그 자유로운 모습만으로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눈에 띄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급기야는 '나도 타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발전 됐다. 마침 같이 밴드를 하는 드러머가 클래식 스쿠터를 구입했다. 그로 인해 클래식 스쿠터라는 존재는 내게 더 다가왔다.

그 드러머가 구입한 것은 야마하(YAMAHA)에서 출시된 검정색 비노(Vino)였다. 클래식 스쿠터 중에서 아주 유명한 모델이었다. 한두 번 얻어 타 보고, 가까이서 접하는 기회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그 기계 덩어리가 갖고 있는 매력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 나도 내 바이크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같은 모델을 구입했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매일 타고 다녔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스쿠터를 몰았다. 심지어 스쿠터에 애칭까지 부여하면서 유치찬란한 사랑을 시작했다.

이탈리안 스쿠터에 첫눈에 반하다

애당초 디자인에 반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타면 탈수록 그 이동의 편리성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아주 멀지 않은 곳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는 장점이 뛰어났다. 실제로 그때 당시 클럽 공연이 아닌, 서울 소재 대학에서 공연이 있거나 야외 공연 스케줄이 있으면 악기는 차로 이동 시키고, 멤버 몇몇은 바이크를 이용해 따로 움직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와 같이 바이크를 타는 친구들이 많이 늘어났다. 그 친구들은 거의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던 친구들이어서 우리는 시간만 나면 모였고, 또 어디로든 떠나기 시작했다. 낮이든 밤이든, 가본 곳이든 안 가본 곳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가본 곳이라 할지라도 바이크를 타면서 보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강을 건너다가 바이크를 멈추고 다리 중간에서 적막한 분위기에 취해보기도 하고, 한낮에 뜨거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동시에 만끽하는 재미도 맛봤다. 그 새로움을 느끼기 위해 더 많은 곳을, 함께 혹은 혼자 달렸다. 어디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무렵 웹상에는 누군가가 베스파(Vespa)를 이용해 몇 개월 동안 일본을 여행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고, 부러운 일이었다. 나에게도 묘한 도전 의식 같은  게 생겼다. 나도 서울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밴드 활동 때문에 몇 개월씩 여행을 떠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때는 3집 앨범 작업을 하고 있던 시기라서 공연 스케줄이 많지 않았고, 3~4일 정도의 시간은 비교적 쉽게 낼 수 있었다.

바이크를 같이 타던 친구들 모두가 갈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모든 친구들의 시간을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여행을 떠나는 인원은 나와 스케줄이 같은 밴드의 드러머, 그리고 나, 그 두 명으로 결정되어버리고 말았다. 많은 인원이 가지 못해 조금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 계획을 사람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무산시키긴 싫었다.

곡 작업 한다며 둘러대고 떠난 제주 스쿠터 여행

▲ 스쿠터로 제주도 여행하기 ⓒ 임준규


▲ 스쿠터로 제주도 여행하기 ⓒ 임준규


우리는 바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봤다. 수많은 장소가 거론되고, 또 알아봤다. 아무데나 가는 것은 그동안 자주 있었기 때문에 뭔가 다른 곳이면서 가깝지 않은 곳이어야만 했다. 그렇게 가깝지 않은 곳을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울에서 제일 먼 제주도가 입에 올랐고, 처음엔 웃었는데 점점 진지하게 여행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꽤나 자연스럽게 제주도로 떠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회사에는 3집 곡 작업을 할 겸, 여행을 떠난다고 둘러댔고, 우리는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원래 목표는 바이크로 부산이나 목포까지 가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쿠터의 특성상(장시간 운행 시 엔진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운행과 휴식을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했다가는 제주도에 들어가는 데만 3~4일이 걸릴 듯했다. 그래서 생각한 다른 방법은 바이크를 타고 인천으로 가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것이었다. 원래 여행을 할 때면 이것저것 알아봐야 하는데, 워낙 준비성이 없는 탓에 배 시간도 알아보지 않고 그냥 무작정 아침 즈음에 출발했다.

아침에 출발해 인천항에 도착한 시각은 낮 12시. 그런데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제주로 향하는 배는 저녁 7시나 돼야 뜬단다. 허걱…. 하지만 준비성이 없었던 탓에 좋은 점도 있었다. 우린 매우 느긋하게 밥을 먹었고 바이크를 배에 싣는 일도 느긋하게 했다. 7시에 출발한 배는 그 다음날 오전 8시쯤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항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본격적으로 여행 떠날 준비를 했다. '본격적'이라고 말했지만 역시나 준비성 없는 성격 때문에 코스도 정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숙소에서 가까운 제주도 위쪽(북쪽) 해안도로를 따라서 달렸다. 처음엔 그럴싸했다. 뭔가 멋져 보이는 곳이 있으면 멈춰서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달렸을 때 우리는 그만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계속 바다만 보이는 길 (가끔은 바다도 안 보이는 길)을 달려서 그랬을까. 왠지 겉핥기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했다. 그래서 첫날은 제주도 위쪽을 반 바퀴만 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어디를 여행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관광 지도 같은 팸플릿을 구해왔다. 그리고 그날 밤, 제주도의 가운데, 즉 한라산 1100고지를 가로 질러 남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푸른 초원과 뛰노는 말들... 꿈꿔왔던 자연을 만나다

▲ 스쿠터로 제주도 여행하기 ⓒ 임준규


다음날 아침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를 했다. 날씨는 화창했다. 바이크를 타고 여행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팸플릿과 도로 표지판에 의존해가며 전날 밤 예정했던 대로 1100고지로 향했다. 그렇게 올라가던 중, '도깨비 도로'라는 간판이 보였다. 우린 억눌려 있던 장난기를 누르지 못했다. 우린 '시동을 끄고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착각'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만족감을 얻었고, 도깨비도로를 뒤로한 채 다시 1100고지로 향했다.

도깨비도로 탓이었을까?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던 여행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1100고지 표지판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달리는 이 길도 분명히 표지판을 따라온 것인데, 이제 이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엔 약간 당황하기도 했지만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가자~ 뭐 어디든 나오겠지'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남쪽인지 북쪽인지도 상관없이 그냥 자유롭게 달렸다.

불안 불안한 마음으로 올라가다 만난 꼬불꼬불한 산길은 우릴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우린 꽤 오랜 시간 좌우 꺾기를 반복하다 정상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 그럴싸한 분위기의 도로가 나오더니 우리가 막연히 꿈꿔왔던 그런 자연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곧게 뻗은 도로가 나왔고 그 도로 좌우로는 말들이 뛰어 놀 법한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진짜 말들이 있었고 그 모습을 목격한 우리는 감탄, 또 감탄했다. 길게 쭉 뻗은 도로를 달리면서 때로는 높은 언덕길을 오르고 또 내려갔다.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제주도의 자연은 너무나 아름답고 평온했으며 때론 자유롭게 멋있었다.

행복도 잠시, 산 정상서 우릴 맞은 건... 영하의 추위

▲ 스쿠터로 제주도 여행하기 ⓒ 임준규


우리는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그 새로운 자연을 전속력으로 달려도 보고 가끔은 속도를 줄여 천천히 달리면서 음미하기도 했다. 계속 달리면서 우리는 그 도로가 서부 관광도로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한참 동안 계속 됐던 곧게 뻗은 도로는 이미 우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중간에 또 길을 잘못 들어 이상한 고속도로 같은 길을 덤프트럭들과 함께 달리긴 했지만, 어쨌든 제주도 남쪽에 위치한 중문에 도착했고,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우린 다시 숙소가 있는 북쪽으로 달렸다. 우린 다른 길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가 왔던, 1100고지로 향했다.

그런데, 아뿔싸! 해가 져버리자, 4월인데도 영하에 가까운 추위가 우릴 반겼고 가로등 하나 없는 도로는 약간의 공포감까지 선사해줬다. 결국 1100고지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콧물이 얼 정도의 추위와 어둠이 찾아왔다. 추위와 어둠이 우리 혼을 쏙 빼놓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정상에서의 별다른 기억은 별로 없다. 도로에 뛰어든 고라니 한 마리 때문에 깜짝 놀랐던 기억과 1100고지 휴게소 화장실에서 5분 정도 추위를 피한 기억이 전부다.

물론 자동차나 배기량이 좀 더 높은 바이크를 이용해 여행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자연의 풍광보다, 살랑거리는 바람 보다, 스피드를 더 좋아하는 이들은 그런 여행을 택할 테지만, 난 아니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스쿠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그때 자동차를 이용해 여행을 했다면, 분명 눈에 들어오지 않고 넘어가버린 작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여행에서 내가 느낀 자연이란 건,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가기만 해선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바람이 되고, 바람이 내가 된 시간

다시 말하자면 나는 그 공간에만 있는 바람을 몸으로 느꼈다. 또 그 공간의 바람을 가르면서 앞으로 나아감과 동시에, 내가 그 공간의 자유로운 바람이 된 느낌이었다. 내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아, 그 상황과 광경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내 몸이 알고 있는 그 바람의 느낌은 쉽게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추억 중 하나가 돼버렸다.

작년 여름, 가까운 계곡으로 친구들과 물놀이를 간적이 있는데, 지금은 바이크가 없어서 나와 몇몇은 차를 이용해 이동했고, 나머지 두 친구는 바이크를 이용해 이동했다. 사이드 미러를 통해 보이는 친구들이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였다. 마치 바람과 하나가 된 듯했다.

요즘은 바이크를 전혀 안 타고 있지만, 전보다 많아진 바이크 유저들을 볼 때나 따뜻한 햇살이 느껴지는 순간이면 '또 다시 그 바람을 느끼고 싶다'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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