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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돌배나무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지리산 암자기행②] 천은사의 산내암자인 삼일암

등록|2009.04.08 20:28 수정|2009.04.09 00:24

▲ 삼일암으로 오르는 길. 길옆으로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 안병기


돌배나무·동백나무가 아름다운 암자

초여름, 지리산 차일봉 아래 자리 잡은 천은사의 새벽은 싱그러웠다. 먼저 각성한 계곡 물소리와 새소리가 아직도 깜깜한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지리산의 봉우리들을 흔들어 깨운다. 어둠이 소스라쳐 저만치 달아난다. 물러나는 어둠의 뒤를 따라 나도 천은사를 떠난다. 가장 가까운 산내암자인 삼일암부터 들릴 것이다. 먼발치서 산 안개가 떠나가는 나그네를 배웅한다.

잠시 노고단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이내 오른쪽 숲길로 접어든다. 키 큰 소나무와 키 작은 잡목이 길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엔 꽤 너른 대숲이 나온다. 대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마음속 티끌들이 다 씻겨가는 것만 같다. 조금 더 올라가자 근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못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물이 제법 맑다. 여태 씻지 못한 사바 세계의 찌꺼기들이 있거든 내게 주고 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연못 주위엔 키 작은 차나무들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다.

돌계단에 올라서자 이윽고 삼일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좌정한 모습이다. 전각이라야 법당과 승방과 요사 3채뿐인 단출한 크기의 암자지만 제법 운치가 있다. 키가 족히 7~8m는 돼 보이는 입구의 커다란 돌배나무는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높이 4~5m가량 돼 보이는 동백나무도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삼일암 전경. ⓒ 안병기


삼일암은 언제부터 이 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었을까. 이곳에 오기 전 미리 삼일암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수덕사 조실을 지내신 바 있는 혜암(1886~1985) 스님의 법어를 엮은 <늙은 원숭이>(열음사. 1991)이란 책에서 읽은 게 전부다. 혜암 스님이 오래전 삼일암에서 참선하면서 겪은 이야기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누가 보더라도 가장 근기가 부족한 호은 스님이란 분이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어 조실 스님에게 인가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참선에는 선후배가 없다는 걸 강조하면서 수행자의 아만심을 경계하는 글이다.

그런데 혜암 스님이 말하는 "오래전"이란 언제적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혜암 스님이 살다간 연대로 미루어 보건대 적어도 2, 30년 전부터는 이 자리에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사천왕처럼 입구를 지키는 돌배나무의 키도 그쯤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삼일암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순천 송광사에 가도 삼일암이 있다. 제9대 국사였던 담당국사가 그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도를 깨우쳤다고 하여 삼일암이라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곳의 이름을 유추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오대산 동대 관음암과 닮은꼴 암자

▲ 사천왕처럼 삼일암 입구를 지키고 선 돌배나무 ⓒ 안병기


▲ 삼일암서 바라본 풍경. 멀리 간미봉 줄기가 보인다. ⓒ 안병기


마당 가에 서자 간미봉에서 흘러내린 지리산 능선 한 줄기가 언뜻언뜻 보인다. 오대산 동대 관음암 마당 가에서도 저렇게 오대산 줄기가 살짝 비쳤었다. 이 삼일암이란 암자는 여러모로 오대산 동대 관음암을 닮은듯하다. 천은사를 중심에 놓고 봤을 때, 동쪽에 있다는 점,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호젓하다는 점, 암자가 앉은 자리가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하다는 점 등이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다.

암자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적적하고 고즈넉하다. 법당 어간 띠살문 고리엔 자물쇠마저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이대로 내려가야 하나 보다. 잠시 생각을 굴리는 사이, 해우소로 보이는 작은 건물에서 체격이 매우 건장한 노장 한 분이 나오더니 말을 건넨다. 

"어디서 온 거사요?"
"대전에서 왔습니다. 법당문이 잠겨져 있군요. 어떤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지요?"
"석가모니불 한 분을 모시고 있소."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금세 끊기고 말았다. 요사의 문을 연 노장이 60kg 용량 크기의 커다란 배낭을 꺼내어 짊어졌기 때문이다.

"자, 서두릅시다. 노고단 가는 버스 올 시간이 얼추 다 됐어요."
"저는 버스 안 탈 겁니다. 걸어서 올라갈 건데요."
"도로 타고 걸어 노고단까지 올라가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그래서는 오늘은 아무 데도 못 가고 그냥 작파해야 해요."

산속 더 큰 사원을 찾아서

▲ 길 떠나는 노장 ⓒ 안병기


주인 없는 집을 객이 대신 지킬 수는 없는 일이다. 잠자코 노장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한다. "저 비승비속(非僧非俗)한 노장의 정체는 뭘까?"라고. 노장의 옆으로 바싹 붙어서 걸으면서 말을 붙였다.   
  
"암자가 들어앉은 모양이 오대산 동대 관음암과 많이 닮았더군요."
"동대 관음암에는 언제 가봤어요? 거기 어느 스님이 계시던가요?"

노장의 말투가 갑자기 활기를 띤다. 아무래도 동대 관음암과 깊은 인연이 있는 듯했다. "그냥 바람처럼 다녀왔습니다. 그러니 거기 어느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지 알 리 없지요"라고 대답했더니 적이 실망하는 눈치다.

한길로 내려서자 곧 노고단 행 버스가 왔다. 객은 비워두고 온 암자가 은근히 걱정되건만 그는 아주 천하태평이다. 노고단에서 버스를 내리면 그 길로 내쳐 천왕봉까지 갈 거라고 한다. 누가 그랬던가. "산은 사원(寺院)이다."라고. 그러니까 이 노장은 지금 작은 사원을 버리고 더 큰 사원으로 찾아가겠다는 건가. 버스에서 내리자, 노장은 성큼성큼 걸어서 광대무변한 사원(寺院) 안으로 몸을 숨겼다.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벌써 아침 8시가 넘었다. 목구멍이 부처님이다.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다. 얼른 아침 공양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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