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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 "아줌마, 운전 똑바로 못해?"

[대한민국에서 '여성운전자'로 산다는 것 ①] 내가 다시 '뚜벅이'된 이유

등록|2009.04.13 08:42 수정|2009.04.13 08:42

▲ 나도 한때는 드라이버였다.(자료사진) ⓒ 김대홍


4월의 봄바람이 살살 코를 간질이는 이런 봄날이 되면 괜스레 창문 너머 세상 소식이 궁금해진다. 꽃이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도지는 내 방랑벽이 얄밉기도 하지만, 도로 위로 쏟아지는 빽빽한 차량 행렬을 만날 때면 '다른 사람들도 내 맘 같구나!'하는 생각에 얼굴엔 어느샌가 헛웃음이 번진다.

그러면서 슬며시 머리를 쳐드는 욕망 하나. 달콤한 듯, 아니 조금은 씁쓸하다 싶은 표정으로 혀끝에선 "아, 이럴 때 차가 있었더라면…"이라는 탄성이 터진다. 그렇다. 지금 나는 튼튼한 두 다리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일명 '뚜벅이' 신세다.

2년 전, '부은 간덩이' 안고 1종 보통 면허에 도전하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2007년), 내게도 남들처럼 핸들을 잡고 도로 위를 누비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열 손가락을 다 헤아려야 할 정도로 연식이 오래된 낡은 고물 승용차였지만, 그 차와 함께 했던 1년 반 동안이 나에겐 참 특별하게 기억되는 시간이었다. 유독 겁이 많고, 병이다 싶을 만큼 운동이나 기계에는 소질이 없던 내가 직접 차를 몰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 신기한 일이다. 그것도 여성 운전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수동 기어를!

당시 하던 일 때문에 차가 필요해진 탓도 있었지만, 불현듯 남들처럼 번듯한 면허증 하나 정도는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큰 결심을 하기에는 바로 요즘 같은 날 불어오는 이런 새침한 봄바람도 한 몫 단단히 했을 것이다.

결심이 서자마자 그 길로 학원을 찾아가 새벽반 수강을 신청했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학원에 접수를 하는 내 간은 살짝 부어있었다. 한없이 짧은 다리는 물론이고, 운전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취약점을 가진 내가 덜컥 '1종 보통' 면허에 도전장을 냈다. 이왕 배우기로 한 것이니 포부만이라도 크게 갖고 싶었다.

작은 체구의 내가 트럭에 앉아 제일 먼저 한 것은 쿠션을 의자 등받이에 찔러 넣는 일이었다. 그 순간 '이것이 실현 가능한 일인가?'하는 의문과 함께 잠시나마 커졌던 간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주어진 문제에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맞서볼 요량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기특하기 그지없음을 거듭 밝힌다. 마음속에 충만한 용기와 함께 나의 무모해 보이는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코스를 맡아주신 강사 분은 유난히 엄했다. 어쩌면 참 다행한 일이었다. 자꾸만 나약해지려는 나를 채찍질하는 데 있어 안성맞춤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등바등 하던 끝에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과와 코스시험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만족스러웠다. 가볍게 합격이었다.

"이야호~! 합격이다, 합격!"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이젠 정말 트럭을 끌고 도로에 직접 나서야 할 때가 온 게 아닌가! 온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일제히 촉수처럼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놓은 이 장벽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 심히 우려 되는 가운데, 나는 암담한 표정으로 또 다시 의자와 내 등 사이에 쿠션 하나를 찔러 넣었다. 그건 흡사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 군사들의 표정과 도 닮았으리라. 속으로는 끊임없이 "나는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몇 번의 시동이 꺼졌고, 몇 번이나 강사 분의 언성이 높아졌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순 없다. 다만 괜찮다며 달래던 강사 분이 급기야 약국에서 청심환이라도 사다 먹겠냐는 권유를 했던 것과 "그렇게 같은 차선으로만 가다간 일차선 타고 쭉 부산까지 가겠다!"며 낄낄대던 웃음소리가 몇 번 이어졌었다는 것뿐. 또다시 결전의 날이 다가왔고, 나는 다행히 뜻밖의 행운을 거머쥘 수 있었다.

드디어 '내 차'가 생겼다... 그것도 '수동 기어 차'

▲ 여성운전자(자료사진). ⓒ 김대홍

그리고 며칠 후, 자랑스러운 내 이름 석 자가 적힌 빤득빤득한 면허증을 발급받게 되었다.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좋았던 것으로 보아 나는 정말 내 인생의 커다란 산을 하나 넘은 뿌듯함에 한껏 충만해 있었다. 그래도 명실 공히 국가에서 발급해준 자격증이 아닌가!

이 기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장롱 면허로 썩히게 되면 정말 평생토록 기회를 잃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곧바로 중고차를 구입했다. 그 와중에도 배짱은 커져 있었는지 나는 강사 분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당당히 수동 기어가 달린 차를 몰게 된 것이다. 참으로 볼품없는 중고차였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가족들은 물론 축하의 말을 보내주었지만, 막내딸의 허술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버지는 끝내 걱정을 이기지 못한 채 불쑥 올라오셨다. 그리고는 꺼내신 한 마디, "너는 내가 안심이 안 되아서! 이제 아빠랑 좀 연습 좀 해야 되것다, 알것지?" 막내딸 걱정에 새벽 같이 먼 길을 달려온 아버지의 가슴 찡한 성의를 누군들 거절할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와 시내 주행 연습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덕분에 아직은 어설프지만 시내 권에선 혼자 힘으로 운전대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엔 역시 많이 부족해 보이셨던 모양이다. 얼마 후 아버지는 친정 가족들을 모두 불러내어 내 차에 타기를 권했고, 나는 그 길로 고속도로 주행에 나섰다.

초보운전자에겐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운전을 마쳤을 때 내 등과 손아귀엔 땀이 그득했고,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하나 같이 '이제야 살았구나!' 싶은 표정을 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푹푹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정말 그제서 진정한 독립을 선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줌마! 아이씨, 운전 똑바로 못해?" TV에서만 봤던 장면을...

여자인 내가 스틱을 운전한다는 것을 알고 나면 누구보다 남자들이 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스틱은 명절 같이 정체가 지속되는 경우나 백화점 가는 길, 또는 경사가 높은 언덕에서 반 클러치를 밟아야 할 때가 가장 괴롭다. 발목에 전해오는 떨림과 고통은 수동으로 운전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차체가 밀리는 느낌이 들거나 시동이 꺼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라도 들면 무작정 비상등부터 켜고 보는 그 불안함은 끝에는 짜증과 불쾌감도 있었지만, '내가 해냈다.'는 안도와 성취감도 밀려왔다. 그리고 기어를 변속하면서 어느 순간 차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 뿌듯함이란!

달리는 도로 위에서도 나만의 은밀한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기대 이상의 기쁨을 선사해주곤 했다. 잠깐 여유가 생길 때 만끽하는 혼자만의 드라이브가 주는 쾌감과, 싱그러운 날에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상쾌함, 창문을 모두 닫고 음악 소리를 높이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자유로움까지… 운전이 내게 준 기쁨들이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운전을 포기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여느 날처럼 집 앞에 있는 작은 골목 코너를 돌던 때였다. "쾅!" 커다란 굉음과 동시에 온몸으로 전해오던 통증 때문에 나는 자동적으로 시동을 꺼트리고 말았다.

"아줌마, 아줌마! 아이씨, 운전 똑바로 못해?"

상대방 운전자는 금방 잡아먹을 듯한 목소리로 외쳐댔다. TV에서 흔하게 보아왔던 한 장면이 내 눈앞에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었다. 통증에 눈을 찔끔 감아 뜨다 겨우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무조건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그런 내 태도 때문이었는지 상대방의 태도는 금방 누그러지는 듯했고, 다행히도 사고를 원만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고가 있은 후부터 제법 강해졌다 생각했던 나의 담력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때 일을 떠올리거나 생각에 잠기면 일순간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현상이 계속 됐다. 점점 운전대를 잡는 것에 용기가 없어졌고, 그 때문인지 특별한 일도 아닌데 멀쩡한 벽에 가서 차를 박거나 찌그러트리는 일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내 고물차는 자주 정비센터를 들러야 했고, 차 상태를 지켜본 정비소에서는 끌끌 혀끝을 차며 "차가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이다!"라는 말을 농담 삼아 건네곤 했다.

정들었던 고물차여 안녕!

내 처지고 속상한 마음만큼이나 차는 점점 더 '쿨럭'거렸다. 그리고 나는 1년 반을 동고동락한 내 고물차를 이제는 그만 쉬게 해주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비소나 폐차를 하러 나온 사람까지 아직은 고쳐서 쓸 만하니 고쳐서 쓰거나 운전을 안 할 거라면 중고차 시장에 내놓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폐차를 선택했다. 사람이 아닌 것, 특히 내가 그렇게나 싫어하던 기계에게도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 손에는 고철 값으로 나온 몇 만 원이 쥐어지고, 그렇게 차와는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정들었던 것을 떠나보내는 서운함도 컸지만, 운전하면서 받았던 크고 작은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기쁨도 함께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평범한 '뚜벅이' 신세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쩌자고 가슴 속엔 봄바람이 이리도 살랑거리고, 또 어쩌자고 도로 위에 쏟아진 차량 행렬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냐! 그저 소박한 이 설움이 가슴 안에서 잠잠히 지나가길 타일러 보는 수밖에. 그래도 나, 이 뚜벅이는 내일도 오늘처럼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뚜벅뚜벅, 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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