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나는 어디에서 찾는가

[책읽기가 즐겁다 258] 툽뗀 갸초,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

등록|2009.04.11 19:14 수정|2009.04.11 19:14

- 책이름 :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
- 글 : 툽뗀 갸초(에이드리언 펠트만)
- 옮긴이 : 김인이
- 펴낸곳 : 호미 (2009.3.9.)
- 책값 : 11000원


 (1) 나와 식구들 삶

▲ 겉그림. ⓒ 호미



 옆지기 어머님과 집 보러 아침부터 낮까지 돌아다닙니다. 일산에서 전철을 타고 도화역에서 내려 도화동을 거쳐 숭의동과 송림동, 그리고 금곡동까지 여러 부동산집을 돌고 골목골목 집 사이를 누비면서 큰식구가 함께 지낼 만한 마땅한 집을 헤아립니다.

 인천은 아파트 아닌 자리는 모두 재개발이 된다고 하기 때문에 '들썩이지 않은 집값'에 따른 집삯 낮은 데를 찾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딱히 옮기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집임자도 보일러나 시설을 더 손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곧 뜯어서 없앨 집이니 굳이 삯 준다면서 돈을 들이지 않게 됩니다.

 한 번 지을 때 고작 서른 해도 못 가고 허물 집을 짓기보다는, 백 해나 이백 해는 거뜬히 버티면서 그 동네에 고유한 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꿈을 꿉니다. 이러한 꿈을 우리 나라에서 이루기란, 말 그대로 꿈만 같지만, 그래도 이 꿈이 꿈으로만이 아닌 삶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우랴 하고 새삼 꿈을 꿉니다.

.. 아버지가 밤에 호통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성냄과 무분별함 때문에 사랑이 녹스는 일이 없는, 완벽한 관계를 찾으리라고 마음먹었다 … 나는 새로운 사상에 언제나 마음이 끌렸지만, 이른바 정통 종교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인 내 부모님은 자식들 머리속에 어떤 종교도 심어 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우리 형제에게 언제나 삶에서 자신의 생각을 따를 자유를 주었다 ..  (23, 40쪽)

 다리에 알이 배길 만큼 집을 둘러보고 나서 옆지기 어머님과 함께 늦은 낮밥을 먹습니다. 젓갈백반 집에서 육천 원짜리 밥을 받아서 먹는데, 젓갈이 남달라 괜찮기는 하지만 너무 짭니다. 짠 반찬 때문에 목이 더 마르고, "집이 없나? 돈이 없지." 하는 어머님 말씀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기는. 우리 식구들이 살 집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집에 들어가서 큰식구가 지내기에는 돈이 없을 뿐입니다. 달삯이야 어찌어찌 치른다고 하지만 보증금을 짐지어내기란 아득합니다.

 어느 나라라고 하든가, 아니 우리 나라 말고는 보증금 놓고 달삯 내고 하는 틀이 거의 없다고 했지 싶은데.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 나라를 떠나 어디 딴 좋은 나라에 가서 살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니, 이러하든 저러하든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합니다. 좋든 싫든 가난이란 짊어질 무게이고 삶입니다. 반갑든 괴롭든 오늘 이 자리에서 더욱 옥죄는 일과 무게에 눌리면서 버티고 견디어야 합니다.

 밥집을 나선 다음 어머님은 연수동에 사는 막내이모님 뵈러 가시고, 저는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골목마실을 조금 더 잇습니다. "옛날은 북적북적하던 데가 (인천) 동구였는데, 이제는 아주 조용한 동네가 되었어." 하는 말씀처럼, 지금 저희 살림집이 있고 도서관이 있는 인천 동구는 아주 조용합니다. 함께 골목집 구경을 하는 동안 "옛날에 송림동 깡패 하면 아주 알아주고 무서웠는데" 하고 말씀하시는데, 송림동에는 지금 깡패고 건달이고 하나도 없습니다. 깡패 스스로 이 동네에서는 깡패 짓으로 재미 볼 만한 일이 없을 테니까 모두 북적거리는 다른 동네로 옮겨 갔습니다.

.. 우리는 여전히 한낱 즐거움만 좇을 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늘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오자 마음의 평안이 사라져 버렸다. 옛 친구들이 찾아오고 내 귀향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누군가 초록색 대마초를 가득 채운 물담배통을 내 손에 건넸고, 낯익은 얼굴들이 내 둘레에서 소용돌이쳤다 … "사실 불행한 것 이상이에요. 제가 미쳐 가고 있는 건지, 멜버른 전체가 제정신이 아닌 건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행복한 척하지만 고통과 고민투성이예요 ..  (51, 169, 171∼172쪽)

 골목집 개나리를 보고 벚꽃을 보고 진달래를 봅니다. 활짝 피어난 목련을 보고, 곧 꽃망울 터뜨릴 목련을 봅니다. 이제 이 다음으로 어떤 꽃들이 피어나며 꽃그릇마다 가득할까 헤아립니다. 어느 집에는 파가 오르고 어느 집에서는 상추가 잎을 틔우기도 하는데, 머잖아 한 달쯤 뒤부터 갖가지 푸성귀가 가득한 가운데 싱그러운 풀빛을 뽐낼 테지요.

 앞뜰 조그맣게 있는 집을 들여다보고, 햇볕이 창문으로 가득 들어가는 집을 눈여겨봅니다. 지금 사는 저희 살림집은 다른 모두는 다 나쁘지만 빨래 널기에는 어느 집보다 좋습니다. 햇볕 쬐기를 따로 돈으로 따질 수 없을 테지만, 햇볕 하나만으로도 사람 삶이 한껏 달라지지 않느냐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낮밥을 먹을 때 옆지기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둘레에서 최 서방 사위로 잘 두었다고들 한다고, 어디서 그런 사람을 만나느냐고, 차라리 돈없는 사람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만큼 좋은 사위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저로서는 옆지기한테나 옆지기 식구한테나 또 저희 식구한테나 형제한테나 다른 동무한테나 '돈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앞으로도 돈으로 도움될 구석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없는 제가 손을 벌리면 벌리지, 제가 손을 내밀 일이란 있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돈이 없으니 돈을 나누어 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다른 여러 가지가 있기에 다른 여러 가지를 나눕니다. 책을 나누고 책이야기를 나눕니다. 사진을 나누고 사진이야기를 나눕니다. 글을 나누고 글이야기를 나눕니다. 몸을 써서 함께하는 일을 나누고, 처남 졸업식 같은 자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한편, 여느 날 치르는 제사에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아기와 함께 장인 어른 댁에서 여러 날 느긋하게 머물면서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기가 선사하는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 "교육 제도, 광고, 종교, 통속적인 신념 같은, 사회의 모든 장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고 저런 것을 하게 만들면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합니다. 자발성의 자유가 없지요.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 삶의 행복과 의미를 찾기 위해서 규범에 저항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지요. 적절한 옷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모두가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를 보세요! 부모들, 교사들, 정치인들, 종교 지도자들, 그들은 스스로 몹시 비참해 하면서도 젊은이들이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한다고 나무랍니다 … 사회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고 우리는 또 그렇다고 믿지요. 자유로운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참된 행복과 평화를 추구할 자유라곤 없습니다 … 사회를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저희 자신을 바꾸려는 겁니다. 되든 안 되든 그렇게 한번 해 볼 자유를 바랄 뿐인 거죠. 그렇게 해서 값진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도 따르고 싶어하겠지요 … 사회는 우리가 더는 먹히지도 않는 옛 전통을 따르기를 바라느니, 더 나은 현실을, 그게 아니면 적어도 다른 현실을 찾는 것을 허용하고 북돋울 힘이 있어야 합니다." ..  (193∼194쪽)

 어느 모로 보면, 우리 어머니나 형한테 "어머니, 아들이 살림이 참 힘들어서 그러는데 돈 좀 보태 주셔요." 하고 올리는 말씀이나 "형, 동생이 어찌어찌 해 보아도 안 되어서 부탁을 하네, 미안해, 좀 도와줘." 하고 드리는 부탁이란 멋쩍으면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손 벌리는 일은 부끄러움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그렇다고 떳떳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떳떳하지 않아야 할 까닭 또한 없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저한테는 돈이 없으니 돈을 보태 달라고 할 뿐이고, 저보다 돈이 더 있는 분들이 도와주면 얼마나 고마울까 싶을 뿐입니다. 그분들도 힘들면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힘들더라도 보태실 수 있으면 보태어 줍니다. 돈이란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길 가운데 하나'이거든요.

 그리고 저는 다른 데에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를테면 어떤어떤 공부를 할 때에 어떤어떤 책을 찾아서 읽으면 좋다든지 하는. 판이 끊어진 책을 어디에서 찾으면 좋을까 하는. 판이 끊어져 도무지 없는데 빌려 줄 수 있느냐 하는. 사진기를 장만하려고 하는데 어떤 녀석을 사면 좋을까 하는. 돌잔치나 혼인잔치 때 사진 찍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 같은. 때로는 이삿짐을 날라 주고, 때로는 책 정리를 해 주고. 마음이 힘들어하는 동무한테는 밤늦은 때에 술동무가 되어 주고. 우리 살림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우리 뒤에서 무럭무럭 커 가는 젊은 벗들한테 밥이나 술 한번 사 주고.

.. 어떻게 이런 천국 같은 곳에서조차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단 말인가. 이곳 사람들도 결국 닳고 닳아 머리속이 복잡한 서양사람들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만족할 줄 모르고, 쉽게 화를 내고, 또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는 서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은 어디서나 같았다 … 여객선 사무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도에 있는 코카콜라 자동판매기를 바라보느라고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것을 보고는 서양 문화가 어머니 인도를 침략한 것에 진저리를 치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 남자가 코카콜라 한 병을 사서 내게 주고는 갔다. 그 남자도 틀림없이 나를 돈 한 푼 없는 마약 중독자라고 생각했으리라. 나는 그 남자의 친절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비록 내 마음은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더 평화로웠지만 내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  (262, 303쪽)

 옆지기 식구가 일산에서 인천으로 살림을 옮기게 되면 여러 가지 걱정이 있는데, 이 가운데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간 처남이 가장 크게 걱정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까이 지낸 동무들하고 모두 떨어져야 하는 가운데, 낯선 동네에서 낯선 동무하고 새로 어울리면서 아주 다른 교과과정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중학교는 하나같이 건물이 오래되었습니다만, 일산에 있는 중학교는 지은 지 몇 해 되지 않아 시설을 견줄 수 없습니다.

 다만, 처남도 마냥 어린이가 아니니, 식구들이 겪는 어려움을 제 나름대로 삭이고 헤아리면서 받아들이리라 믿습니다. 또한, 처남이 마냥 어린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어른이라 하는 사람'들이 더욱 살가이 어울리고 함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새롭게 꾸릴 삶을 차근차근 일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돈이 아주 넉넉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살아간다고 즐거움은 아닐 테니까요. 떠나는 만큼 만나는 삶이며, 잃는 만큼 얻는 삶일 테니까요. 돈이 없어 쪼들리기도 하고, 낯선 곳으로 갑작스레 집을 옮기기도 해야 하며, 때로는 학교를 옮기기도 하지만, 없는 살림이라 기쁜 날이 있고, 낯선 동네라 재미난 날이 있으며, 학교를 옮기면서 새롭게 틔우는 눈이 있을 테니까요. 서로가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르게 커 나가게 되는 새로운 발판이기도 할 테니까요.


 (2) 나와 책과 삶

 저소득가구전세자금대출이라는 돈을 받을 수 있나 궁금하여 은행에 다녀옵니다. 여러 가지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은행에서 내어주는 돈은 보증금에서 70%까지 빌려 준다고 합니다. 보증금 10%를 계약금으로 건 계약서를 동사무소와 은행에 내어 보름이나 한 달에 걸쳐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데, '저소득가구'인 사람한테는 거의 보름 남짓 하는 동안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일이라든지, 많아야 70%를 빌릴 수 있는 벽이 버겁다고 느껴집니다. 무엇을 하든 밑돈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는 저보고 "고객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글쎄, 저는 무슨 일을 할까요. "글을 쓰고 사진을 찍습니다." "소득신고는 하셨습니까?" 글쎄, 제가 뭐 글삯을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고, 글삯 받을 때 보면 다 세금이 잘려서 들어오던데. "출판사나 언론사에서 다 세금 떼고 주던데요." "귀하 같은 경우는 무소득자로 간주해서 ……." "네, 그렇군요."

.. 여권에 도장을 받고 나서 밖으로 나갔더니, 누더기를 걸치고서 누가 봐도 저희 것이 아닌 돈을 한 줌씩 들고 있는 소년들 한 무리가 나를 에워쌌다. "돈 바꿔, 아저씨?" "고맙지만, 됐어." "해시시 좋아?" "고맙지만, 됐어." 아이들은 그래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내 관심을 끌려고 서로를 떼밀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아주 기운차 보였다. 이런 장면에는 내가 곧 익숙해질 터였다. 장난감이며 이런저런 도구들이 없어도, 그러니까 우리 서양사람들이 아이가 잘 자라려면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런 것들이 없어도, 그 아이들은 대부분의 서양 아이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생기가 넘쳐 보였다 ..  (44쪽)

 언젠가 어느 출판사 사장이 당신이 낸 책을 들고 은행에 가지고 가서 '다음 책을 찍을 돈을 빌린 적이 있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었기에, 저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제가 써낸 책 몇 권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무소득자'라는 말에 기운이 꺾여 달리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래도, '무소득자'라는 사람한테는 천만 원에서 천오백만 원까지 빌려 주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는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그렇지만 천만 원을 빌린다 하여도 70% 벽이니까 1500만 원쯤 되는 보증금을 대는 집을 얻어야 빌린다는 소리이고, 보증금 천만 원쯤이라면 칠백만 원을 빌릴 수 있다는 소리인데.

 뒤에 기다리는 다른 손님이 없지만, 은행에 앉은 엉덩이가 근질거립니다. 더 꺼낼 말도, 딱히 들을 말도 없습니다. 머뭇머뭇하다가는 가방에 챙겨 온 책을 꺼내 은행 직원한테 "시간 나면 한번 읽어 보셔요." 하고 내밀고는 뒤돌아 나옵니다.

.. 파키스탄사람들은 아프간사람들보다 확실히 너그럽고 속이 깊었지만, 그들은 서양의 물질주의가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 비록 학생들의 말은 변혁을 일으킬 만했지만, 그들은 조만간 저희가 고른 직업에 안주하며 사회적 지위를 누릴 것이다. 그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슬픈 것은 저희 나라와 민중이 지닌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들 삶의 진짜 목표는 서양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태도가 안쓰러웠고, 파키스탄이 안쓰러웠다 … 우리를 초대한 세 사람은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저희의 생활과 낮은 급여에 실망해서 서양의 생활 양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속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나라의 다른 사람들에 견주어 부자인데다 그들의 환경은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것보다 한결 평온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을 진심으로 추켜올림으로써 그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애썼다 …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간 여행은 행운이 가득한 마법 같았다. 위험을 만났지만 잘 모면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우려고 애썼다. 우리는 파키스탄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나는 이 세상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  (66, 83, 97, 153쪽)

 집으로 돌아와 밥을 끓입니다. 요즈음 즐기고 있는 만화 《좋은 사람》을 펼쳐 읽습니다. 혼자서 밥과 시금치를 먹으며 만화책을 넘기다가 눈물이 뚝뚝 듣습니다. 참 좋다는 느낌, 그러나 참 좋다는 이 느낌을 함께 나누기란 참 힘들다는 느낌.

 그렇지만 참 좋다는 느낌이 들도록 애쓴 만화쟁이는 이 만화책을 일곱 해에 걸쳐서 바지런히 이어갔다고 하니, 나 또한 한 작품을 책으로든 사진으로든 무엇으로든 다부지게 붙잡고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 그래도 여태껏 배 곯지 않고 용케 책 만들고 책과 함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생각.

.. 강에서 만난 이 음악의 오르내림은 소떼가 다음 모래톱으로, 또 그 다음 모래톱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그리하여 건너편 둑으로 완전히 건너갈 때까지 되풀이되었다. 마침내 소떼가 사막으로 사라지면서 음악은 사라져 갔다. 소떼가 건너는 데 이십 분쯤은 걸렸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소떼의 장엄한 워낭 연주를 지켜보았다. 기계가 없는 상태에서 소리가 새로운 차원을 얻은 것이었다. 새 울음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강물의 속삭임이 우리와 늘 함께했다.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어쩌다 말을 할 때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내가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말했다. "사람들 생활에서 늘 되풀이되는 허섭쓰레기들 말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야.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저희 속에 갇혀서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잖아." ..  (119, 131쪽)

 책상맡에 놓아 둔 책 가운데 《엘리노어 마르크스》가 아직 다 읽히지 못한 가운데 제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각날 때면 틈틈이 꺼내어 열 몇 쪽씩 들추어 읽는데, 아버지 마르크스와 딸 엘리노어가 보내야 했던 삶과 품었던 꿈을 곰곰이 짚으면서, 마르크스는 그저 수수한 아버지였을 뿐이고 엘리노어 또한 그예 수수한 딸이었을 뿐임을 느낍니다. 마르크스가 이루고 싶어한 세상이든, 엘리노어가 바꾸고자 했던 삶터이든, 늘 온몸으로 부딪히고 부대끼면서 그때그때 맞추고 받아들이면서 바라보고 있었음을 느낍니다.

 아직 몇 쪽 못 읽은 타르코프스키 책 《봉인된 시간》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와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야금야금 읽어 나가고자 하지만 자꾸자꾸 눈에 걸리는 얄딱구리한 옮김말 때문에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 옆에 꽂아 둔 《사람은 왜 사는가》(이노우에 쇼지)라는 책을 들춥니다.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는 것은 예수가 제일 싫어한 자세입니다(132쪽)." 같은 대목이 부드러이 제 마음결을 사로잡습니다. 깔끔한 옮김말과 함께 단출한 글투가 몹시 사랑스럽다고 느끼는데, 문득문득 제가 쓰는 글도 이런 분들 글처럼 내 둘레 사람들 마음결을 부드러이 사로잡을 수 있는지 뉘우치게 됩니다. 제 깜냥껏 단출하게 추스른다고 하는 제 글이 참말로 단출한지, 단출하면서 알맹이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 나는 그가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반드시 그런 함정들을 피해, 고통보다는 즐거움을 나누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라마 예셰는 늘 그런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북돋았다. 만일에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낟 해도, 라마 예셰는 우리가 우리 결정대로 행동하고 그 결과로 시련을 겪게 내버려 둘 것이다 … 앤과 주디가 모두 타라 하우스에 왔다. 나는 두 사람 다한테 애착을 느꼈지만, 서원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사실, 그들과의 우정은, 어떻게 하면 서양 사회에서 승려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체특해 나가는 과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대신 그 욕망을 관찰했고, 더불어 여자들과 가까운 친구로 지내는 데에서 생기는 장점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불을 갖고 노는 것만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 만일 타 버릴 거라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는다면 내 마음은 서양 사회의 관능성에 저항하는 힘을 훌륭히 단련한 것이 될 터이다 ..  (306, 334, 342∼343쪽)

 좋은 책 하나 찾아서 읽는 동안 제 마음 또한 좋아지도록 하자고 다짐합니다. 조금씩 제 마음이 좋아진다면 이 좋은 마음으로 내 일손을 한결 기쁘고 홀가분하게 다잡게 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책을 읽으며 받아들인 그 좋은 느낌을 책을 덮고 난 다음에도 잊거나 잃지 않는가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마흔 평이 넘는 도서관에 빼곡하도록 갖가지 책을 갖추어 놓았다지만, 이 책들 가운데 몇 권이나 내 숨결로 고이 자리잡았는가 헤아리면 멋쩍습니다.

 사람들한테 '더 많은 책'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저 스스로 '더 많은 책'에 휘둘리거나 빠져 버리지 않는가 돌아봅니다. 혼자만 좋은 책 읽겠다면서 아이 키우는 일에서 살짝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는가 되뇌입니다. 남보다 먼저 어떤 책을 읽었거나 남은 모르는 어떤 책을 뜻밖에 만나서 알게 되었다고 우쭐거린 적은 없었는가 뒤돌아봅니다.

 좋은 책에 내 삶을 맞추는 일도 괜찮을 수 있으나, 책만 보다가 내 삶을 못 보지는 않는가 곱씹습니다. 내 삶에 따라 좋은 책을 찾는 일도 괜찮겠지만, 내 삶을 앞세워 좋은 책을 코앞에 두고도 주머니가 가볍다든지 짬이 모자란다든지 하면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는가 되씹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책에 담긴 '좋음'을 꾸밈없이 달게 빨아먹고 삭이려는 매무새를 잊은 적은 없었는가 뉘우칩니다.


 (3) 의사가 하는 일, 스님이 만나는 사람

 이야기책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를 덮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으면서 읽어 보려고 했지만, 아기는 책장을 휙휙 잡아채어 북북 뜯으려 하고, 책을 바닥에 놓으면 엉금엉금 기어와 입에 집어넣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책을 쥘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구나, 아기를 돌본다고 하는 자리에서는 아기만 생각해야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든지 딴짓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머리통을 가볍게 툭툭 때리고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습니다. 인천과 일산을 오가는 전철길에서 읽고, 아기가 잠들고 난 다음 읽으며, 새벽에 좀더 일찍 일어나서 읽자고 생각합니다.

.. 우리를 들여보낸 사람 말고는 그곳에 아무도 없었고, 소리라고는 뜰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뿐이었다. '낙원이 따로 없군.' 런던에서 그칠 줄 모르는 자동차 소음 속에서 일하던 것이 떠오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무실에서와 같은 그런 평화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살고 있을꺼나. 보좌관은 주변 환경만큼이나 조용했다 … 내가 5루피를 주자 좀더 큰 (거지) 소녀가 내게 천금에 값하는 웃음을 살짝 던졌다. 다른 승객들이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인도의 계급 제도가 혐오스럽기만 했다 ..  (95, 159∼160쪽)

 이야기책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는 책이름 그대로 '티베트 승려'가 된 호주사람 삶을 담습니다. 이 호주사람은 책이름 그대로 '히피'였고 '의사'입니다.

 우리로서는 꿈도 꾸기 어렵지만 대마초를 비롯한 수많은 마약을 즐겨 먹고 마시고 피웠으며, 이러는 가운데에도 '서양 물질문명으로는 안 된다. 어딘가 잘못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서양 물질문명이라고 느끼면서도 당신 스스로 잘못된 물질문명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핑계를 댑니다. 물질문명을 한손으로 붙잡고 있으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깨달음을 붙잡고자 합니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 이루는 길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제대로 못 찾아서 그렇지, 두 가지뿐 아니라 서너 가지를 한꺼번에 이루는 길 또한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참말 이런 길이 있을까요. 자연 삶터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연자원을 얻어 쓰는 길이 있을까요. 돈 많이 벌면서 착한 마음 아름다이 지키는 길이 있을까요. 오래오래 많이많이 배우면서 자기 머리에 쌓은 지식을 손쉽게 풀어내어 나누는 길이 있을까요. 자가용을 몰면서 걷는 사람한테 마음쓰는 길이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을 휘두르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길이 있을까요. 돈없는 사람 마을에 아파트를 세우면서 돈없는 사람이 깃들일 집자리를 지키는 길이 있을까요.

.. 오래된 건물들을 밀어내고 현대 도시를 세운다는 리관유(이광요) 수상의 정책이 우리 눈에는 그 도시를 죽이는 것으로 보여, 그길로 말레이시아의 페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  (224쪽)

 아주 슬기로운 길은 틀림없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그 슬기롭다고 하는 길이 펼쳐지는 모습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제 둘레에서는 아직 못 느끼고 있습니다. '착한 마음'과 '돈' 두 가지가 우리 앞에 있고, 이 가운데 하나만 골라야 한다고 할 때에, '돈' 아닌 '착한 마음'을 선뜻 집어드는 이웃이나 동무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배가 좀 고프게 되더라도 착한 길을 걷는 이웃이란, 내 몸이 더 고되게 되더라도 착한 길을 반기는 동무란, 아무래도 못 만날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남들한테 바란다면 힘들 일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나서 주기를 기다린다면 끝이 없다고 느낍니다.

 제가 나서야 할 일입니다. 저부터 걸을 길입니다. 좋은 깨달음이 있다면, 온갖 잇속과 밥그릇과 이름값과 힘을 등져야 할 노릇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했던 싯말만 욀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한테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껍데기를 훌훌 털어낼 노릇입니다.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게 된다면 착한 일을 할 생각이 아니라, 바로 오늘부터 마음을 착하게 다스리면서 가난한 살림으로 함께할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나눌 노릇입니다.

.. 우리가 바나나를 말리고 있을 때 마약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전에 톰의 집에 해시시를 몰래 숨겨 놓고는 그를 체포한 적이 있었다. 이 경건한 백인 노동자들의 동네는 남부에서 온 긴머리 히피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모글 꽉 죄는 셔츠와 넥타이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는 그들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마약을 만들고 있다고 책잡으면서도, 여기저기 널린 것이 마약인데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  (200쪽)

 티베트가 중국한테 무너진 까닭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사람이 중국 군인한테 끔찍하게 짓밟히고 들볶이다가 죽여 나가는 까닭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평화와 자유와 민주와 자치가 있던 티베트에서 어마어마한 지하자원을 뽑아내고, 티베트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며, 지금으로서는 중국땅이 아주 넓고 힘도 센 듯 느껴질 테지만, 간도 허파도 내주면서 스스로 사랑이 되는 티베트이기 때문에 주먹다짐이 아닌 눈물과 웃음으로 가여운 중국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히피이며 의사였던 글쓴이 '에이드리언 펠트만'은 아프가니스탄부터 파키스탄과 인도와 태국과 말레이사아를 두루 거친 다음 티베트에 뿌리를 내리면서, '툽뗀 갸초'라는 새 이름으로 새 삶을 꾸리게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저는 제 이름 석 자를 내려놓고 '함께살기'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꾸리자며 열 몇 해째 바둥거리는데, 아직까지 그저 바둥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져 남우세스럽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