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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준비된 교사인가?

전남 담양 교원연수원에서 보내는 편지(5)

등록|2009.04.12 10:50 수정|2009.04.12 17:45

목련꽃 그늘 아래서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여선생님들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담임 원어민인 워렌과 다정한 오누이 같다. ⓒ 안준철


엊그제 사월인가 싶더니 벌써 중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해마다 사월이 오면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곳 담양에 와서도 그 오랜 습관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연수 일정이지만 기숙사에서 식당으로 향하는 아침 산책로에서 한 조각의 여유를 겨우 되찾아 이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읽었다는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1년 겨울방학 때였습니다. 어언 40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버린 지금에도 그때의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 것은 아마도 제가 그 무렵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이 책을 두세 번 더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인가는 시험을 코앞에 두고 책에서 손을 못 떼다가 결국은 시험을 망친 적도 있습니다.

그것이 조금도 후회스럽지 않은 것은 우리 인생에서 순수하게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시기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수하다는 것. 그것은 가장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가장 효율적인 독서방법은 순수하게 책을 즐기는 것입니다. 책에 흠뻑 빠져 있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고 즐거운 일입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논술공부를 해야 하고, 그래서 책을 읽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그림이 그려지면 모든 것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영어교사로서 문제의식을 갖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입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영어공부를 할 수는 없을까? 영어에 흠뻑 빠져 있다가 나오게 할 수는 없을까? 재미있게 놀았을 뿐인데 실력이 늘어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접을 수 없는 것은 제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미래의 꿈나무라고 말합니다. 미래의 꿈나무이니 잘 보살펴 주어한다는 선의의 뜻이 담겨 있는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잘못 음미하면 자칫 아이들을 미래적 존재로만 규정해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준비해야합니다. 학교는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미래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한 아이의 현재적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육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현재의 삶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행복한가? 그들은 자신의 학창을 통해 충분히 보람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과연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준비된 교사인가?     

슬프게도 제 대답은 아직 '아니요!' 입니다. 그동안 저는 손과 발은 놓아두고 입과 마음만으로 아이들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 땅을 헤집고 뿌리를 내리려는 고통의 수고 없이  너무 오랫동안 따뜻한 겨울 속에서 안이한 꿈을 꾸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니, 그런 멋진 표현보다는 그동안 영어교사로서 너무도 나태했다는 직설적인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감각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이 아픔 없음에 대하여 이제야 조금씩 아픈 감각을 되찾아가고 있는, 너무도 눈부신 잔인한 4월입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망각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겨울이 우리를 따뜻이 해 주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마른 구근으로
작은 생명을 길러준다.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4월이면 생각나는 T. S. 엘리어트의 유명한 시구를 시적으로만 이해했다가, 왜 4월이 가장 잔인한지 지금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는 이 아픈 시간들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 아픔을 잘 걸러내어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배운 것들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쏟아낼 수 있는 마음을 얻어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분들의 훌륭한 점들이 제 편에서는 부끄러움으로 작용하여 한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제 마음에 아직 시와 노래가 남아 있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부족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 소박한 첫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이 그립습니다.

아침 산책길 길가에 노란 민들레가 한 송이 피어 있다. 문득 들꽃 같은 우리 아이들이 보고 싶어졌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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