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미래를 예언했던 소름 끼치는 소설!
잭 런던 걸작선 3 - <강철군화>
▲ <강철군화>겉표지 ⓒ 궁리
'궁리'출판사에서 선보이는 '잭 런던 걸작선'의 3번째 책 <강철군화>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1980년대 말에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 책은 '사회주의' 관련 도서로 알려졌다. 소설의 형식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알려주는 책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이 소설이 이렇게 알려진 데는 소설이 향하는 바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적인 것과 닿아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 극에 달한다. 중산층은 몰락하고 소수의 자본가와 다수의 노동가가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다. 노동가들을 이끄는 건 어니스트와 같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다. 그들은 돈이면 무엇이든 된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특권계층을 비판한다. 도덕심과 인간성마저도 상실한, 자본주의에 매몰된 그들의 '폭주'를 경고하고 나선다.
자본가들은 이를 비웃는다. '과두제'라는 괴물을 낳은 자본주의는 더 이상 그들을 동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상의 노예로 취급한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언론을 통제하고 군대를 지배한다. 헌법 같은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반대하는 것이 있다면 곧 죽이려 한다. 소설은 그것을 '강철군화'라고 명한다. 완벽한 자본가의 세상이다.
물론 20세기 초의 미국은 민주주의시대였다. 그래서 선거라는 것이 있었다. 소설 속의 그때에도 선거가 있었고 그 선거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승리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아들'들은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배한다. 새로운 당선자들은 '좌석'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감옥에 끌려간다. 극단적인 대치 상황이 벌어지고 곧 '무력'이 충돌한다. 용병을 고용한 자본가와 시민군의 전투가 미국 곳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강철군화>가 국내에 소개될 때 어떤 의미를 띄고 있었는지는 명백하다. 사회주의 관련 도서였던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정치적이다. 문학적인 것이 생략돼 있다. 이 소설의 문학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이 소설이 발표된 해는 1908년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보면 1912년부터이다. <강철군화>는 '미래소설'인 셈이다.
<강철군화>의 내용을 미래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살펴보자. 잭 런던의 글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가 소설에서 그렸던 자본주의의 문제점들, 특히 소수가 사회의 부를 거머쥐고 그로 인해 사회가 피폐해지는 현상이 사실로 들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보자. 잭 런던이 이 소설을 쓴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소설이 말을 하기 위한 자리라면, 그가 이 글을 쓴 의도는 명백하다. 문학의 힘을 빌려 폭주하던 사회의 위험성을 '고발'하면서 '경고' 하려 했던 것일 게다.
그것을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기 위해, 잭 런던은 <강철군화>를 통해 '없는 자'들의 비참한 인생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마치 그가 그러한 생활을 경험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묘사는 '르포'에 버금간다. 정치적으로는 분노할 것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이 또한 중요한 성과다. 사회를 이토록 생생하게 담아낸 거울 같은 소설을 흔히 보기 어려우니까 그렇다.
그럼에도 <강철군화>는 순수하게 문학적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1980년 대 말에 소개될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소설이 예언한 것이 어느 정도 현실로 드러났기에 그 부분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생각할수록 <강철군화>의 힘이 놀랍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소설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설사 문학적인 것만 놓고 보더라도, <강철군화>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소설로 충분하다. 그 당시의 사회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담아냈거니와 어떤 문제의식들로 사회에 말을 걸고 있다. 더군다나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을 발하니 단순히 간과할 것이 아니다. 비록 소설의 '끔찍한 예언'의 많은 것들이 사실로 들어났지만, 그 힘만큼은 소름 끼칠 정도로 훌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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