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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원대 징용 미불 임금, 아직 일본에 있다"

[단독] '전범기업 공탁 내역' 최초 공개...아소 다로 일 총리 집안도 포함

등록|2009.04.16 16:46 수정|2009.04.16 20:59

▲ 일본 국립공문서관 츠쿠바 분관에서 발견된 '조선인 임금 미지불 채무'. 1950년 10월 6일 후생성이 작성한 자료로 당시 재일 조선인 징용자들의 기업별 공탁금 내역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 이국언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으로부터 못 받은 임금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소 3조 원대로 추정되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불임금(아직 돌려받지 못한 임금)이 현재 일본 법무국에 공탁 형태로 보관돼 있는 것으로 밝혀져, 대일 과거사 소송에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공탁: 채무변제 등의 사유로 법령의 규정에 의해 금전, 유가증권 등을 법원에 맡기는 일).

특히 이 중에는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한 것"(2003.5.31)이라는 망언과 함께 최근까지도 아소탄광의 조선인 강제연행을 부인해 오던 아소 다로 일본 총리 집안의 미불임금 내역도 포함된 것으로 드러나 도덕적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소탄광은 아소 다로 총리 증조부가 창업주이며, 조선인 1만623명을 강제동원한 바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대일 과거사 소송을 주로 맡고 있는 최봉태 변호사가 일본에서 활동 중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로부터 관련 자료를 건네받아 최근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는 1965년 한일회담 관계 자료를 추적하던 끝에 지난해 11월 국립공문서관 츠쿠바 분관이 소장하고 있는 관련 문서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법원 공탁돼 현재까지 보관... 미불임금 규모 첫 공식 확인

▲ 일본큐우슈우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 탄광에 강제연행되어 혹사당하다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의 품에서 나온 가족사진.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지금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미불임금은 일부 '공탁금' 형태로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막연한 추정만 있었을 뿐, 전체적인 규모가 드러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에 확보한 자료에는 미불임금의 부현(지역별), 사업장(회사)별, 채무의 종류, 채무자수, 금액, 공탁 일시 등 세부적인 내역까지 상세히 적시돼 있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확보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겉표지에 '경제협력 한국105 노동성조사 조선인 임금 미지불 채무조사'라고 적시된 이 자료에는 노동성 및 대장성 등이 조사한 조선인 미지불 임금 등 세부 자료 5종이 들어있으며, B5 크기 약 600여 페이지에 달한다.

5종의 소자료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임금 미지불 조사통계'(노동성 기준국, 1950년, 1953년), ▲'사령부 보고에 대한 외무성의 보고와 자신들의 조사와의 차이점'(대장성 이재국 외채과, 1953년 6월26일), ▲'조선인의 재일자금' (주관 외국재산과, 1953년), ▲'노동성 조사와 대장성 조사를 비교한 자료'(대장성 이재국 외채과, 1953년 7월 7일), ▲'조선인 노무자 임금 미지불관계 문서'(타케우치에 의한 가제) 등이다.

문서에는 또 '경제협력 한국105'라고 적혀 있어, 이 자료가 한일회담 당시 채무, 배상관계의 기초 자료로 활용됐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 1949년 말 대장성이 조사한 '조선인 재일자금'을 근거로 한 미지불 임금은 공탁과 미공탁액을 합해 당시 액면가로 최소 약 2억4000만 엔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 훗카이도 개척 토목공사장에서 학대당한 한국인 노동자들. 도망을 기도하거나 반항을 하면 심한 폭행을 당했다.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그러나 이 규모는 당시 개별 회사에서 노동성 등에 미불임금 사항에 대해 자진 신고한 것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집계에서 누락된 것 등을 합하면 이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화폐가치 변화와 현재 환율 등을 고려할 때 최소 한화로 약 3조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당시 노동성이 조사한 자료에는 '조선인 노무자에 대한 임금 미지불 등에 관한 조사통계'에서는 이제까지 불명확했던 회사별 공탁금, 미공탁금, 제3자 인도분 상태까지 나타나있어 눈길을 끈다.

미쯔비시 중공업 3406명분 85만엔, 아소탄광도 365명 1만엔

쇼와 25년(1950년) 10월 6일자로 작성된 이 사료에 의하면 공탁 형태로 미불임금을 가장 많이 두고 있는 회사는 미쯔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로, 1948년 6월2일 급료, 단체적립금, 퇴직금에 대해 3406명 분 85만 9770엔을 공탁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서일본 중공 히로시마 조선소로 1951명 분 17만 8479엔이었다.

▲ 노란색 선 안이 아소탄광의 공탁금 내역이다. 왼쪽부터 사업장, 채무종류, 채권자수, 금액, 맨 오른쪽 숫자가 공탁일시를 나타낸다. 편의상 공탁금 내역 첫 장 위에 아소탄광이 적시된 페이지 기록을 덧댔다. ⓒ 이국언


현 아소 다로 일본 총리 집안이 대대로 이어 온 가업이자, 바로 증조부가 창업주이기도 한 아소탄광 역시 당시 적지 않는 돈을 노무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에 의하면 사가현에 위치한 구바라(久原) 광업소의 경우 임금 7415엔(100명), 보조금 2370엔(133명), 원호금 475엔(2명) 등 1만엔이 넘는 돈을 지급하지 않고 공탁했으며, 121명분의 저금 3359엔은 아예 공탁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국립공문서관 츠쿠바 분관에는 현재 1965년 한일회담 소책자 등 100권 이상이 존재하고 있으나 대부분 비공개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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