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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코드와 쪽대본 잠재운 배우들의 호연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카인과 아벨>의 성공 요인

등록|2009.04.24 14:30 수정|2009.04.24 14:30

▲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주연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 KBS


좋은 드라마란 무엇일까? 또, 좋은 드라마를 탄생케 하는 원동력은 뭐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좋은 드라마가 되기 위한 원동력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들고 싶다. 첫째는 감독의 연출력을, 둘째는 작가의 필력을, 마지막으로 셋째는 배우의 연기력을 꼽겠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드라마는 소위 '명품'이나 '웰메이드'로 불리며 시청자들로부터 사랑 받는다. 여기에 대진운과 같은 '운'까지 따라 준다면 시청률 30%를 넘나드는, 그야말로 국민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지난 23일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카인과 아벨>이 종영했다. 수목드라마 판도를 '2강 1약' 체제로 끌고 간 두 톱 드라마의 종영은 시청자에게는 아쉬움을, 경쟁작에게는 숨통이 트일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 두 드라마는 각각 15~18%에 이르는 시청률로 방영 내내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였다. 후반에 이르러 갈등과 긴장이 고조된 <카인과 아벨>이 근소하게나마 줄곧 1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크게 앞선 적은 없었다.

배우 연기 덕에 '막장' 미워도 다시 한 번

지난 번 썼던 기사에서 나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 막장 드라마라고 평가받는 것을 부정했다. 불륜, 재벌, 출생의 비밀과 같은 상투적인 소재가 쓰인다고 하더라도 그게 곧 막장이 될 순 없다고 했다. 수십 명의 스태프, 연기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드라마에 '막장'이라는, 너무나도 모욕적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소재의 상투성은 그 근거로 충분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막장이 아니라고 해서, 진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그동안 우리 드라마가 오랜 세월 꾸준히 반복해온 진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우려먹었다. 꼿꼿하고 오만한 재벌가 회장, 불륜을 저지르고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본 부회장, 출생의 비밀 때문에 고통 속에서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술과 여자로 탕진하는 재벌 2세, 그리고 일과 야망이 전부인 변변치 않은 집안 출신의 야심가까지…. <미워도 다시 한 번>은 그야말로 진부적인 캐릭터의 총집합이었다.

이런 탓에 시작 전부터 '막장' 소리를 들어야 했던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본격적으로 방영이 시작되면서 점차 다른 양상을 띠어 갔다. 시청자들의 반응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 드라마의 공식과는 다르게, 시청자들은 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청자들은 <미워도 다시 한 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언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전히 일각에서는 '막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지만, 언론은 대체적으로 <미워도 다시 한 번>에 호의적이었다.

▲ 쪽대본과 생방송을 방불케하는 촬영에도 배우들의 호연이 있었기에 <카인과 아벨>은 성공할 수 있었다. ⓒ SBS


그 이유는 바로 배우들의 호연에 있었다. 좋은 드라마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세 가지 원동력 가운데 한 가지, 바로 배우들의 연기력 면에 있어서 <미워도 다시 한 번>은 10점 만점에 10점을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왕비, 국모라는 무거운 타이틀과 한복을 벗고 오랜만에 현대극으로 복귀한 전인화의 농염한 내연녀의 연기도 좋았고, 언제나 아내의 뒤에 서서 그녀를 묵묵히 뒷받침해주는 박상원의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연기도 좋았다. 그렇지만 역시 압권은 최명길이었다.

최명길이 연기한 극 중 '한명인'이라는 인물은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의 소유자다. 일에는 철두철미하고 매사에 이성적이지만, 첫사랑을 못 잊어 30여 년을 괴로워할 만큼 감성적이다. 아들에게는 따뜻한 어머니이지만 남편에게는 쌀쌀맞다. 겉은 카리스마 넘치는 기업 총수이지만 속은 약하디 약한, 보통의 여자에 불과하다. 이런 복잡한 캐릭터를 최명길은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훌륭하게, 120% 소화해냈다. 그녀의 표정 하나, 대사 한 마디, 몸짓 하나까지 그것은 한명인 그 자체였다.

그런 최명길과 불꽃 튀는 카리스마 대결을 벌였던 박예진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였다. 주말 예능의 강자 SBS <패밀리가 떴다>에서 '달콤·살벌 예진 아씨'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얻은 그녀였지만, 드라마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예능에서 보여졌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발리에서 생긴 일> <대조영> 등 현대극과 사극을 넘나들며 수년 간 갈고 닦은 연기력으로 그녀는 시청자를 TV 앞에 꼼짝 못하게 붙들어 놓는 데 성공했다.

쪽대본·생방송 촬영 논란 덮은 배우들의 호연

그런 면에서 <카인과 아벨>은 여러모로 <미워도 다시 한 번>과 비슷한 데가 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소재의 상투성, 진부함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막장' 논란에 휩싸였다면, <카인과 아벨>은 예의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 '쪽대본'과 '생방송 촬영'으로 '막장' 소리를 들어야 했다. 벌써 몇 년째 쪽대본과 생방송을 방불케 하는 촬영으로 인한 문제점이 꾸준히 지적되고 있지만, 고질병이 달리 고질병이 아니듯 쉽사리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중순께 남녀 주인공 4명의 캐스팅이 완료된 <카인과 아벨>은 11월 중순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순 방영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3개월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국 로케이션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초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끝냈어야 했던 중국 촬영이 예정보다 길어진 것이었다. 결국 제작진과 제작사 측은 초반 목표를 수정해야 했고, 이는 곧 국내 촬영분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 <카인과 아벨>의 현장 사진. 소지섭은 쪽대본을 들고 있다. ⓒ SBS

이런 상황에서 대본마저 늦어졌다. 촬영 며칠 전부터 대본이 나오지 않아 현장에서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발만 동동 구른다는 언론의 보도가 줄을 이었고, 간신히 도착한 30여 쪽 분량의 쪽대본을 PC방에서 출력해서 촬영을 재개했다는 내용들이 담긴 자세한 기사도 볼 수 있었다. 여기에 더 좋은 화면을 카메라에 담고자 현장에서 대본을 수정하고 재촬영을 반복했던 제작진의 열정이 더해져 촬영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쪽대본과 생방송 촬영의 부작용은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다. 지난 3월 23일 청주에서 <카인과 아벨> 촬영현장 공개 행사가 있었고, 여기에 수십 명의 취재 기자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오후 4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주연배우들의 인터뷰는 촬영 지연으로 3시간이 지나도 열리지 않았고, 인터뷰 장소 변경과 오랜 기다림 끝에 주연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마저도 신현준과 채정안이 빠진 상태였다. 결국 기자들이 단체로 인터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쪽대본으로 인한 생방송 촬영에 제작진과 배우들 모두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제작사에서 홍보 욕심에 일정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고 급하게 추진해 벌어진 일이었다. 사건은 또 있었다. 지난 16일 방영되었던 18회분에서는 같은 장면이 두 번 반복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생방송 촬영의 부작용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편집 시간 확보의 어려움'이다. 방송 내보내기에 급급하여 편집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보니 같은 장면을 두 번 반복해서 내보내는 문제 따위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 속에서도 <카인과 아벨>은 18%라는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시청자에게 사랑 받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역시 배우들의 호연 덕택이었다. 초중반부 다소 질질 끌었던 이야기 전개, 같은 장면을 두 번 내보내는 방송사고도 시청자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그런 불평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만큼 괜찮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소지섭, 신현준은 물론이고, 새로운 '눈물의 여왕'으로 등극한 채정안과 한지민까지, 주연배우들의 고른 연기력은 모자란 극의 다른 부분을 메워주기에 충분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과 <카인과 아벨>의 공통점, 그것은 바로 철저하게 배우의 연기력에 기댄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주연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력이 없었다면 소재의 상투성과 쪽대본 논란 속에서 이토록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이렇게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더 좋은 내용의 드라마를, 더 좋은 환경에서 찍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누군가 나에게 이 두 드라마의 성공 요인을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겠다. '캐스팅의 승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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