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보통 주부라도 기자로 활약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 재팬, 뉴스게릴라들 그 후⑥] 마츠야마 노리코씨

등록|2009.04.28 20:27 수정|2009.04.29 09:14

3월에 부산에서 벚꽃놀이에 다니면서노리코 씨는 3월 27일부터 4일간 부산에 여행하러 다니면서 벚꽃의 명소인 진해에도 처음 다녀봤단다. 원래 한국에서의 시민기자 행사에도 몇번 참석하면서 한국의 문화나 한류 등에도 관심이 많았고 관련 기사도 투고해왔던 분이다. ⓒ 마츠야마 노리코


오마이뉴스재팬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오마이뉴스재팬이 4월 24일 문을 닫습니다'라는 공지를 발견했던 것은 거의 3월 말이었다. 그때까지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일도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온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이제는 사이트가 문을 닫아 확인도 못하지만 내 기억에는 3월 31까지 투고를 받겠다고 공지되었던 것 같다. 2월 정도부터 시작한 건강이나 다이어트에 관한 투고 공지를 보면서 이번에 나도 도전해볼까 라는 생각도 했고 다이어트에 도전도 했지만 기사로 올릴 만한 큰 효과를 얻지 못했기에 결국 '오마이라이프'에는 아쉽게도 투고하지 못했다.

그때 어떤 그리운 한 여성이 떠올렸다. 2007년에 '한일 친구 만들기'에서 만난, '오마이뉴스 재팬'에서 뭔가 매력적이고 귀여운 분위기있는 주부 기자로서 알려졌던 마츠야마 노리꼬씨였다. 그동안 찾지 못했던 명함을 겨우 찾으면서 그녀에게 이메일 인터뷰를 신청한 결과 부산에 다녀왔을 때 찍었던 사진과 같이 답변을 보내주셨다.

한국에서 만났던 기자들을 언제나 생각납니다

- 시민 기자가 된 계기는?
"<오마이뉴스재팬>이 생기기 전에 <아사히신문>에서 한국에 <오마이뉴스>라는 시민이 참가하는 인터넷 신문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에는 김혜원 기자의 활약상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읽고 '보통 주부라도 기자로서 활약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이런 것이 있으면 꼭 참가하고 싶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가 일본에 진출한다는 것을 듣자마자 등록했습니다. 물론 창간 전입니다. 창간 기념 파티에서 김혜원씨를 만났을 때는 감동했습니다. 그때 오연호 대표도 계셨고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전혀 잘난듯하게 하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대표인지 모르고 무심코 접해 버린 것도 좋은 추억입니다."(웃음)

- <오마이뉴스재팬>에 참가되면서 느껴진 것은?
"자신의 역부족. 쓰는 것은 좋아하고, 취미는 단카(일본 시가:短歌)이고, 신문, 잡지의 투서란이나 라디오에 간단한 것을 써서 보내면 거의 100퍼센트 채택되었습니다. 중학생 무렵부터 그렇게 용돈을 벌고 있었으므로 기사를 쓰는 것은 간단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큰 실수였습니다. 투서로 의견을 말하는 것은 기사와 크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단지 여성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 기사는 창간일부터 게재가 되었고 '생나무'에 된 것도 거의 없었습니다만 제대로 된 기사를 쓰고 있는 기자들의 기사와 달리 자신의 것은 '가짜'라고 쭉 생각했습니다."

- <오마이뉴스재팬>으로부터 <오마이라이프>로 변경 후도 투고하고 계셨지만 실제로 투고한 후 느낀 차이나 생각하는 곳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오마이뉴스재팬>이 끝나갈 무렵, 겨우 기사같은 것을 낼 수 있게 되어 지금부터라고 생각했을 때였으므로 매우 충격이였습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재팬>에는 제 기사도 포함된 신문의 투서란같은 의견 기사가 꽤 있었는데 <오마이라이프>가 되면서 그러한 기사가 없어졌으므로 안심했습니다.

<오마이라이프>는 체험형의 기사 밖에 없기 때문에 의견 기사는 없었습니다. 모니터 상품을 시험하고 기사를 쓴다는데 나도 응모했습니다. '하시모토 오사무'의 책이나 '레오날르 후지타의 미술전 '티켓'을 받아 매우 좋았기 때문에 기사로 투고했습니다. 모니터로 요구르트를 먹었을 때는 그 상품의 좋은 점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사로 쓸수 없었습니다. 모니터 상품 이외에도 자신이 실제로 사보면서 좋았던 것이나 이용해보며 돈 벌었다고 생각된 물건 등에 대해서 몇 차례 투고했습니다.

이런 기사가 개인 블로그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비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오마이뉴스재팬>에 게재된 의견 기사보다는 <오마이라이프>의 상품 체험 기사 쪽이 실제의 체험담인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 드디어 사이트가 폐쇄된다고 들었을 때 느낀 것은?
"오연호 대표에게 미안했습니다. <오마이뉴스재팬> 중간부터 오연호 대표와는 멀어졌지만 저는 <오마이뉴스재팬> 창간 전부터 시민기자로 등록했으며 창간기념파티(샌드위치, 프라이드치킨, 맥주 등만의 간소한 파티이었지만 감동적이었습니다)에도 참가했으므로 오연호 대표의 뜨거운 마음을 일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몹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일본에서 시민기자로서 활동되면서 여성인 것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차별을 받았던 적은 있었습니까?
"특히 없네요. 읽을 만한 의견 기사 등을 쓴 분이라면 그러한 경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체험기만 투고하고 있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깊이있는 내용의 기사를 쓰게 되면 반드시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이나 관심이 있는 것은?
"나의 취미는 단카(短歌)를 읊는 것입니다만 명치(明治) 29년에 나온 '요사노 뎃칸'(与謝野鉄幹)의 가집 '동서남북'에 한국이 나옵니다. 뎃칸은 한국에 살고 있었던 적이 있으므로(혹시 지금의 북한일지도.) " 韓にして、いかでが死なむ。われ死なば、をのこの歌ぞ、また廃れなむ "(한국의 나라에서 어째서 죽을 수 있을까. 자신이 죽었다면 단가 혁신이 맨 앞장을 서 노래하기 시작한 남자(뎃칸)의 노래가 쓸모없게 되어 버리지 아니겠는가) 등과 몇 개의 노래를 만들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으면 한국에 있어서의 '요사노 뎃칸'의 행동을 현장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 한국의 시민 기자들에게의 메세지를
"김혜원씨, 이명옥씨, 안소민씨, 편집부의 박순옥씨, 건강하고 활약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어나 영어도 잘할 수 없기 때문에 연락도 못했습니다만 언제나 생각납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사실 그녀에게 답변 이메일을 받은 것은 20일이었으나 여러 일이 생기면서 늦게 올리게 되었다. 또 내가 <오마이뉴스재팬>에 올렸던 기사나 특히 동영상은 원본을 없애버렸으니 다시 찾고 싶은 마음에 사이트 폐쇄 2~3일 전부터 파일 저장이나 동영상 보관을 어떻게 할까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던 것 같다.

100여 개가 될 기사들을 저장하기 힘들어 결국 급한 마음에 몇개의 동영상들만 다운받았다. 그런 작업에 익숙하지 않기에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었다. 작업 도중에 24일 12시가 지나면서 곧바로 공지가 나와 <오마이뉴스재팬> 사이트 폐쇄의 순간을 내눈으로 직접 확인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지니 아쉬움에 힘이 쑥 빠져버렸다.

며칠이 지났지만 인터넷에서 일어로 <오마이뉴스>라고 검색하면 관련 기사는 아직도 많이 나오고 있다. 다만 <오마이뉴스재팬>에 기재되었던 기사만 볼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뭔가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낀다. 나는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 전에 '요사노 뎃칸'(与謝野鉄幹)이 노래에 남겼던 그 마음이 이제야 조금 이해된다.

<오마이뉴스재팬>에 시민기자들이 남긴 기사를 이제는 찾아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쓸모없게되어 버리지 않았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리운 기사들을 언제까지나 떠올리면서 그들과의 만남을 계속 추억이라는 서랍 속에 넣고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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