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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번뇌를 해탈하게 하는 <백팔번뇌>

[신간안내] 미음(微吟)하는 것만으로도 미음 같은 책 맛 느낄 수 있어

등록|2009.04.29 15:24 수정|2009.04.30 12:26
미각(味覺)이 둔감한 탓에 솥으로 둘러 냈거나 조물조물 버무린 음식이라면 어떤 것도 맛나게 먹는 엉터리 식도락가입니다. '맛을 모른다'고 할 만큼 아무것이나 잘 먹는 엉터리 식도락가이지만 아주 가끔은 '움찔' 혀가 놀라고, 미각이 팔딱 거릴 만큼 맛나다는 걸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맛은 먹는 음식에서만 나거나 느끼는 게 아닙니다. 살다 보면 느끼는 '살맛'도 있고, 보다보면 맛보는 보는 맛도 있듯 책을 읽다 보면 책에서도 이런 맛 저런 맛을 느끼게 됩니다.

▲ 읊는 것만으로도 108번뇌를 해탈하게 할 108편의 시조에 저자 홍성란이 에세이를 가미한 <백팔번뇌> ⓒ 임윤수

맛을 신맛, 쓴맛, 짠맛, 단맛, 매운맛으로 나누듯 맛이 단순한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 다섯 가지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맛이 있듯 책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밋밋하기만한 책, 질그릇에서 팔팔 끓고 있는 장처럼 구수한 맛이 우러나는 책, 아삭아삭 씹히는 풋나물에서 느낄 수 있는 쌉싸래한 맛을 내는 책, 살강살강 씹히는 과일에서 나는 과즙처럼 상큼한 맛을 내는 책,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을 자극하는 기기묘묘한 맛을 내는 책도 있습니다.

혀 대신 눈이 놀라고, 미각 대신 정신이 펄쩍 뛸 만큼 맛난 책을 보았습니다. 눈깔사탕처럼 달콤한 맛도 나고,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 끓인 해장국처럼 추억의 편린을 맵도록 자극하는 맛도 납니다.

오감으로 맛 볼 수 있는 이런 맛만이 아니라 졸고 있던 시심을 일깨우고, 심드렁해진 일상을 흔들어댈 정도로 진수성찬으로 차린 음식상에서나 맛볼 수 있는 산해진미의 맛도 납니다.

저자 홍성란이 108염주를 꿰듯 108편의 시조를 꿰어 엮은 <백팔번뇌>를 읽으며 느낀 맛은 이유(離乳)기 때 맛봤던 미음(米飮), 임종을 앞둔 아버지께 연명의 기도를 올리듯 조심스레 떠 넣던 미음과 같았습니다.

알갱이 쌀이나 좁쌀에 물만을 넉넉히 붓고 팍팍 끓여낸 밋밋한 미음이 아니라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산채도 갈아 넣고,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고기도 다져넣어 한 숟가락의 미음에 산해진미가 다 담겨 있던 어머니의 마음 같은 미음 맛입니다.

저자 홍성란은 이유식을 먹여야 하는 젖떼기자식과 건강식을 먹어야 할 지아비만을 생각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으로 알곡을 고르듯 108편의 시조를 선정하고 미음을 끓이는 정성으로 해설을 하였을 겁니다.

젖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처럼 글은 알되 시조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해 시조의 이유기에 있는 사람들, 왕년에는 많은 시조를 읊조렸지만 문학의 트렌드에 밀려 시조에 대한 감각조차 쇠잔해진 시조의 노년층들도 아무런 부담 없이 우물우물 읽는 것만으로도 시조를 잘 소화해낼 수 있도록 해설서 같은 에세이로 간을 맞춘 미음 같은 책입니다.

진수성찬으로 꿴 108편의 시조

<백판번뇌>의 저자 홍성란이 108번뇌 이상을 고심하며 꿰었을 시조는 매년 노벨문학상 최종 후보로 오르는 고은 시인이 쓴 시부터 세간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잘 알려졌는데 필자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들에 핀 야생화처럼 나름대로의 시향을 함초롬하게 머금고 있는 시인들이 산통처럼 토해낸 시조들입니다.

한 숟가락의 미음을 떠 넣듯 시조 한수 읊어 봅니다.


- 김제현

나는 불이었다. 그리움이었다.
구름에 싸여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 와
한 조각 돌이 되었다.

천둥 비바람에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에서라.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또 소망이 되지만
억 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
하늘 소리, 땅의 소리.   -본문 46쪽-

저자 홍성란은 여기에 맛나게 끓인 미음을 먹기 좋게 식혀 놓듯 ' 이 시조는 불교 설화집이 되고 간화선의 화두가 되었다'고 풀어 놓았습니다.

다시금 미음 같은 시조 한숟갈을 입에 뭅니다.

분이네 살구나무
- 정완영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본문 72쪽-

단박에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에 개살구에서 맛볼 수 있는 시큼한 맛까지 느낄 수 있는 시어에 저자 홍성란은 부처님 오신 날 빈자일등(貧者一燈)의 따뜻한 법어라고 하였습니다.

시조는 그 자체가 마음을 쪼고 다듬어낸 결과물입니다. 뒷산만큼이나 큰 바윗덩이에서 고르고 골라낸 거친 원석을 정으로 쪼아내고 살가죽으로 문질러 다듬어낸 하나의 옥구슬처럼 시심으로 쪼아내고 시감으로 문질러낸 언어와 감정의 옥구슬입니다.

시조란 그런 보배의 글들이기에 그 보배로움에 감히 범접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어렵지 않은 평상심으로 시조에 담긴 시심과 시감을 음미할 수 있도록 고르고 골라 차린 진수성찬을 산해진미로 풀어놓았습니다.

산해진미 같은 시조의 맛을 빚어내다

108편의 시조를 읽다 보면 108가지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느끼게 되고, 저자 홍성란이 덧대어 놓은 108꼭지의 해설(에세이)을 읽다 보면 산해진미의 맛을 음미하게 되니 저자에게는 <백판번뇌>가 진수성찬을 차려야 하는 108번뇌였을지 모르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읽기라는 숟가락질만으로도 산해진미를 맛 볼 수 있도록 맛깔스럽게 차려진 진수성찬의 책입니다.

이빨 없는 입으로도 진수성찬의 산해진미를 맛보고, 한 숟가락만으로도 온갖 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미음처럼 <백팔번뇌>에 담긴 108편의 시조와 에세이는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미음(微吟, 시가를 작은 소리로 읊음)하는 것만으로도 108번뇌를 해탈하게 할 마음 맛이며 목탁소리가 될 것입니다.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시조 108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냥 미음하는 것만으로 저자가 빚어낸 맛이 우러납니다.
덧붙이는 글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백팔번뇌>(홍성란 엮음/232쪽/ 아름다운 인연 펴냄/2009.4.30/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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