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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을 변화시킨 예수, 그와의 만남

[서평] 김규항 <예수전>

등록|2009.05.03 17:12 수정|2009.05.03 17:12
김규항씨가 <예수전>이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필자는 막연히 예수 및 그리스도교에 대한 김규항씨의 견해를 담은 책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평소에 관심이 가던 주제이기도 하고, 'B급 좌파' 김규항 씨가 풀어낸 예수의 모습이 궁금해서 냉큼 인터넷 서점을 통해 주문했다.

▲ ⓒ 돌베개


그런데 책을 펴서 목차를 보니 '제1장, 제2장. 제3장... 제16장'의 무미건조한 숫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어? 뭔가 이상한 걸?' 목차를 보고 생겨난 의구심은 이어지는 머리말을 읽고 나서 풀렸다.

"강독 형식을 채택한 것도 그래서다. 본디 원고는 예수에 대한 견해를 담은 대개의 책들처럼, 주제별로 집필하면서 중간중간에 필요한 성서 본문을 인용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런 형식이 예수에 관한 '김규항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 효율적이지만,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는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예수의 견해를 담은 가장 훌륭한 책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와 있었다. 바로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담은 네 개의 복음서,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종교적 첨가도 적은 <마르코복음>이다. 이 책은 바로 <마르코복음>을 읽기 위한 책이다." - <예수전> 머리말 중

목차의 '제1장, 제2장. 제3장... 제16장'은 마르코복음(마가복음)의 장들을 나타내는 것이다. 본문은 빨간 색 글씨로 마르코복음이 먼저 나온 후, 검은 색 글씨로 김규항의 해설이 곁들여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규항 씨가 이런 구태의연한 형식을 취한 것은 앞의 머리말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의 견해'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어두운 밤, 높은 곳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온통 십자가 천지이지 않은가? '예수의 견해'라고 한다면 매주 일요일마다 그 수많은 십자가 밑에 있는 다양한 규모의 건물들에서 신물이 나도록 전파되고 있지 않은가?

김규항이 보기에 십자가 밑의 건물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목사나 신부들을 통해 전해지는 소위 '복음'들은 '예수의 견해'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비단 김규항 뿐만 아니라 예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의 목사 격인 바리사이 인들이 대중들에게 하느님(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구약)을 읽고 가르치던 바로 그 회당에서, 예수는 똑같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배층과 바리사이 인들의 거짓과 위선에 격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김규항에게 한국 교회의 설교가 '예수의 견해'가 아니듯이, 예수에게는 바리사이 인들의 설교가 '하느님의 견해'가 아니었다.

예수가 지배층과 바리사이 인들에 의해 왜곡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세우기 위한 활동을 했듯이, 김규항은 지배층과 보수교회들에 의해 왜곡된 '예수의 복음(기쁜 소식)'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예수전>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에 관한 '한국 교회의 견해'가 아닌, 그리고 예수에 관한 '김규항의 견해'가 아닌, '예수 자신의 견해'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2000년 전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사회문화 특징들에 대한 김규항의 친절한 설명들은 '예수의 견해'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효율적인 장치들이다. 간혹 곁들여지는 김규항의 '견해'들조차 철저하게 마르코복음 안의 '예수의 견해'에 종속적이다.

이러한 김규항의 예수에 대한 태도는 마르코복음 연구 중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인용한 <예수전>의 머리말에서도 나와 있듯이, <예수전>의 초기 원고는 주제별로 서술하면서 관련 성서를 인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김규항은 마르코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과정에서 <예수전>의 서술방식을 바꾸게 된다.

서술방식의 변화는 단순히 '예수의 견해'를 잘 전달할 수 있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있다. 그것은 김규항이 자신의 해설보다 예수 자신의 견해가 21세기의 모순덩어리 자본주의 세상을 살고 있는 인민들에게 더욱 큰 울림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예수전>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예수는 공생애 기간 한 곳에 머물러 구체적인 사회상을 구현하려 하기보다는 내내 인민들의 삶의 현장을 돌다 미완의 상태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삶의 방향과 결의 지독한 일관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구체적인 사회상보다 더 구체적인 것을 건져 올리게 한다. 예수는 새로운 사회의 실체는 그 체제나 법 같은 형식에 있는게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성원들의 지배적인 삶의 방향과 결에 있음을 되새겨 준다. 그래서 그의 미완은 우리에게로, 우리의 미래로 한껏 열려 있다."

이렇듯 <예수전>을 통해 우리는 '김규항의 견해'가 아닌 김규항을 감동감화시킨 '예수의 견해'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김규항이 만난, 그리고 김규항을 변화시킨 예수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다면 <예수전>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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