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잊혀진 경주의 절터를 찾아서

경주 호원사지와 석장사지

등록|2009.05.06 13:42 수정|2009.05.06 13:42
 전국에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진 절터들이 너무나 많다. 그중 가장 단연 으뜸으로 가장 많은 절터가 남아 있는 곳은 경북 경주이다. 절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곳이 너무나 많으나 기록상에 나오는 절터들도 관리 소홀과 무관심으로 점점 잊혀져만 가고 있다.

개인 사유지에 남은 탑재

 경주 황성공원에 있는 김유신 장군 동상 인근에 궁도장(호림정)으로 가는 길로 접어 들면 허브농장이 있다. 그 깊숙한 민가에 많은 탑재와 석재들이 남아 있는데 바로 이곳이 호원사지로 추정된다.

호원사지 입구 가는 길호원사지 입구 가는 길 ⓒ 김환대

입구부터 주변 환경이 매우 안 좋은 곳이다. 큰 개들이 진을 치고 있고, 집은 허물어질듯 지붕 여기저기에 비가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덮어두었다. 탑재들은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고, 주변 석재들은 개 밥을 주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호원사지 주변 환경호원사지는 현재 개인 집에 있어 찾아 가기가 조금 어렵다. ⓒ 김환대

호원사지 탑재호원사지 탑재 ⓒ 김환대



호원사지 환경호원사지 환경 ⓒ 김환대



삼국유사에 기록된 호원사


 신라 원성왕 때에 매년 2월이 되면 8일부터 15일까지 연 8일 동안 남녀가 모여 복을 빌기 위하여 홍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가 있었다. 이때 김현이 복회에 참석했다가 염불을 하며 따라도는 한 처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외어 정을 통한 뒤 처녀의 집으로 갔다. 그 처녀집 주인 노라는 김현을 보고 삼호가 해칠 것을 염려하여 김현을 숨겨두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 호랑이 세 마리가 나타나 사람 냄새를 맡고 어흥거리며 김현을 찾았다. 이때 하늘에서 삼호가 즐겨 사람이 생명를 많이 해치므로 한 마리를 죽여 징계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삼호가 매우 근심하자 처녀는 자기가 대신 하늘의 벌을 맏겠다고 하니 삼호는 즐거워하며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 뒤 처녀는 김현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비록 그대와 유가 다르지만 이미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제 내가 한 집안의 재앙을 막기 위하여 대신 죽고자 하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대의 칼에 죽어 은덕에 보답하고자 한다. 내일 내가 시장에 들어가 해를 끼치면 대왕은 반드시 중록으로써 사람을 뽑아 나를 잡으려 할 것이니 이때 낭군이 겁내지 말고 나를 좇아오면 내가 그대에게 잡히겠다."고 하였다. 김현은 거절하였으나 처녀는 자기의 요수는 천명으로 자기의 소원이며 또한 낭군의 경하이며 아울러 자기 집안의 복이요 나라의 기쁨이니 이는 하나의 죽음으로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죽은 뒤에 절을 세우고 불경을 읽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다음날 호랑이를 잡는데 성공한 김현은 그 뒤 벼슬에 올랐고 호랑이를 애도하가 위하여 절을 지어 호원사라 이름하고 항상 범망경을 읽어 호랑이의 저승길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석장동의 유래는 석장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석장동으로 진입하여 석장길이란 이정표를 따라 계속 길을 오르면 골짜기 마을 끝에 제실이 하나 보인다. 이곳을 기준으로 계속 길을 오르는 동안 많은 무덤들이 있다. 무덤들을 지나 계속 길을 가면 갈림길이 하나 나오고 산길이 갈라진다. 이곳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많은 대나무 숲이 나오는 곳이 나타난다. 이곳에 바로 석장사지이다. 절터의 흔적은 일부 남은 초석들이 전부이다. 올라가는 동안 무덤 주변에는 절터에서 옮겨진 곳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무덤의 상석 등에 사용되고 있다.

석장사지 입구석장사지 입구에서는 동국대 경주캠퍼스가 보인다. ⓒ 김환대



석장사지 흔적올라가는 길에는 무덤에 각종 석재들이 보이는데 절터의 곳으로 추정된다. ⓒ 김환대



 이 곳 석장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거주하던 절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서라벌의 북쪽 십 리에 있다고 했다.

삼국유사에 전해 오는 곳

 양지스님이 자기 지팡이(석장) 머리에 포대하나를 걸어 놓았는데, 이게 저절로 날아 시주 집을 찾아다니며 방울을 흔들며 소리를 내었다. 집에서는 이 소리를 듣고 '아! 양지스님이 보내 시주를 받으러 왔구나.' 여기고 그 포대에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이집 저집 다니다 포대가 속이 차면 날아서 다시 절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런 일로 해서 사람들은 이 절을 지팡이 절(석장사)로 불렀다고 한다. 신통하고 묘한 도력을 지닌 도승임을 암시해 주는 듯하다.

양지(良志)란 의미는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뜻하며, 석장(錫杖)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이걸 갖고 다님은 탁발을 할 때 자기가 문 앞에 와있음을 소리 내어 알리거나, 길을 다니면서 뱀이나 짐승을 쫓는 데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출토된 유물은 동국대경주박물관에 소장

동국대 경주캠퍼스박물관에서 1986년과 1992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했다. 그 결과 7~8세기경에 있었던 암자정도의 산지가람이며, 고려시대에 와서 전대의 석재를 다시 사용하여 재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출토된 여러 탑상문전에서 일찍이 벽돌로 탑을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상도 조각하여 탑에 안치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 발굴조사에서 '錫杖(석장)'이라고 쓰진 묵서자기 조각이 출토되어 이 절의 이름을 다시금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세월이 흐르면서 절터는 폐허되어 초목만 무성하고 발굴 이후 흔적은 잘 찾아야 초석과 일부 기와조각이 전부이다.  

석장사지 흔적석장사지의 흔적은 일부 초석들만 남아 있다. ⓒ 김환대



석장사지 흔적석장사지 흔적은 잘 찾아야 보인다. ⓒ 김환대



 아무런 길 이정표도 없어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은 안내자를 동행하는 것이 좋다. 잘 찾지 않는 절터는 서서히 관심 속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이정표를 설치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져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답사란 알려진 곳만 찾는 곳이 아니라 이런 안타까운 현장들을 둘러볼 때 더욱 더 당시의 감흥을 몸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