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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원을 꼭 쥐여 준 굵은 손가락

등록|2009.05.07 11:58 수정|2009.05.07 13:39
아버지에게 매 한 번 맞지 않았으니 엄한 분이 아니었다. '아빠'라 불러 본 일도 없고, 어울려 여행은 둘째치고, 나들이 한 번 가지 않았으니 다정다감한 분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애틋한 아비와 아들로서 사랑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아버지는 삶을 참 어렵게 사셨다. 7형제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세상을 빨리 등지는 바람에 막내 사랑 받아 보지 못했다. 형님(큰 아버지)들은 그런 동생이 안쓰러울 만했지만 머슴들과 밥을 먹게 했다.

머슴과 밥을 같이 먹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겠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 때만 해도 주인집 막내 아들과 머슴이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얼마나 마음이 상했을까? 이런 경험을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으셨지만 막내 동생에게는 한 번씩 들려주었다.

형들에게 이런 모욕과 두 번이나 아내를 먼저 보낸 이유 때문인지 아버지는 남자와 남편으로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이 부족했다. 아내로서 세번 째인 우리 어머니와 만남을 통해서 조금은 자기 삶을 이끌어갔지만 이미 굳어진 성격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큰 아버지들에게 제대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큰 아버지들이 이래라 하면 이리하고, 저래라 하면 저리하는 모습은 어릴 때 머슴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서 자신도 머슴이라는 생각이 알게 모르게 몸이 밴 탓이었을 것이다.

참 슬펐다. 어린 내가 도와주지 못한 아픈 마음은 아직까지 애잔하게 남아있다. 강단 있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모습에 화가 난 모양이다. 큰 아버지들과 한 번씩 다투었다. 아버지를 머슴처럼 대했던 큰 아버지들도 어머니의 강단있는 모습이 싫었으리라.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느 날 학교로 아버지가 찾아오셨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는 사천 읍내에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보고 싶어 학교를 들렸다고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학교를 찾아오신 날은 이전에도 뒤에도 없었다. 만날 보는 아들이 무엇이 보고 싶었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중학교부터 자취 생활을 했기 때문에 토요일과 일요일만 집에 갔으니 주중에는 당연히 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 때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동수야 공부 하는데 안 힘드나?"
"예 아버지. 그런데 왜 학교에 왔습니꺼?"
"사천 읍내갔다가 니가 보고 싶어서 왔다 아이가. 밥은 잘 묵고 다니나?"
"예 누나가 잘 해줍니더."
"용돈은 있나?"
"예 있습니더."
"아부지가 용돈도 못 주고 미안하다."
"괜찮습니더."
"아부지가 얼마 없어서 많이 못 준다. 자 이것 가지고 과자도 사 묵고 해라."
"…아부지"
"건강하고, 공부해라. 토요일에 보자."

3천 원이었다. 아버지 손가락은 정말 굵다. 손가락이 얇은 사람들 두 배는 넘는다. 아버지 손가락을 보고 동무들이 굵다고 놀리기까지 했다. 아버지 손가락이 있는 사진을 찾았지만 잘 나온 사진이 없었다. 겨우 찾아낸 것이 결혼 때 찍은 사진이다. 선명하지 않아 아쉽지만 아버지 손가락이 얼마나 굵은지 알 수 있다.

▲ 결혼사진에서 찾은 아버지의 굵은 손가락 ⓒ 김동수


아버지 손가락이 굵은 이유는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저렇게 굵은 손가락에 평생을 관절염을 앓으셨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고, 왼손은 잘 쓰지도 못하셨다. 닻을 어깨에 메다가 다쳐 깊은 상처까지 입었다.

굵은 손가락으로 꼭 쥐여준 3천 원을 잊을 수 없는 이유다. 평생 처음 아들에게 용돈을 준 아버지 마음은 어땠을까? 요즘처럼 어린이 날만 되면 놀이공원과 선물 꾸러미로 아이들 마음을 달래는 '아빠'와는 다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진짜 아비 사랑 말이다.

3천 원 용돈 후 아버지에게 용돈을 받은 것은 20년이 지난 1998년이다. 신학대학원 졸업 때였다. 그 때 아버지는 위암 말기로 생명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꿈에 내가 목사가 되는 꿈까지 꿀 정도로 기뻐하셨다. 이런 기쁨을 가진 분이니 아들이 신학 공부를 마치는 날이라 경남 사천에서 경기도 수원까지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졸업식에 오셨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와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아니 아버지가 우리 가족과 찍은 마지막 사진이기도 하다.

▲ 1998년 신학대학원 졸업 때 찍은 사진. 아버지는 석 달 후 돌아가셨다. 가족과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 김동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어리광이란 선물을 달라는 것이다. 아들이 졸업했는데 선물을 왜 안 주느냐고 물었다.

"아버지 소원대로 목사 공부 다 마쳤는데 선물을 왜 안 주세요?"
"선물! 선물 준비 안 했는데 어떻게 하지?"
"그럼 돈으로 주세요."
"돈?"

"아버지에게 용돈 받아 본 적이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아직도 그 때를 기억 하나?"
"그럼요, 아버지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주셨는데 그것을 기억 못 하겠어요?"


아버지가 주신 용돈은 3만 원이었다. 3천 원이 3만 원이 되었다. 20년 만에 10배가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용돈을 주신 아버지도, 용돈을 받은 나도 기뻤다. 아버지는 석 달 후 하나님 부름을 받아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 가셨다. 평생을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나에게는 든든한 아버지셨다. 누가 뭐래도 그 분은 내 아버지셨다. 3천 원을 꼭 쥐여 준 굵은 손가락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영원한 하나님 품 안에서 안식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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