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회사에서 12명 백혈병... 우연일까요?"
'집단 백혈병' 산재 판정 기다리는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들
▲ 근로복지공단 앞 삼성 백혈병 유가족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의 농성장 모습. ⓒ 반올림
▲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한 피해사례들. ⓒ 반올림
지난 6일 근로복지공단 정문 앞에서는 여기저기 '삼성'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들을 산재로 인정하라', '삼성 눈치보기 그만하고 산재 노동자 생존권 보장하라'. 지난달 22일부터 농성을 시작한 삼성일반노조와 '반올림(반도체 노동자 건강과 인권 지킴이)' 활동가들이 붙여놓은 자보 내용이다.
이들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 급성 백혈병에 대한 산업재해 판정을 기다리는 중이다. 고 황유미씨, 고 이숙영씨, 고 황민웅씨 유가족과 현재 환자인 박지연씨, 김옥이씨 등 피해자 5명이 지난 2007년 6월과 2008년 4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기 때문이다.
오세위 근로복지공단 보험급여과장은 "10년 이상 벤젠에 노출되어야 한다는 게 (직업성 암의) 규정인데, 사업장 측정결과에선 그런 데이터가 안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가족이나 환자 당사자들은 "한 회사에서 10명 넘게 백혈병에 걸렸는데, 이게 상식적으로 우연일 수 있냐"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현장에서 일하면서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회사 쪽으로부터) 들은 적이 없다"면서 역학조사 결과에 대해서도 불신을 나타냈다. 산업안전공단은 이들에게 역학조사의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삼성의 영업비밀'이기 때문이다.
97년 이후 발병 12명 중 5명 사망... 20여명 백혈병·악성림프종 발병
▲ 삼성전자 공장 모습 ⓒ 반올림
"아내는 백혈병에 걸리기 전부터 매일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철분제도 먹고 병원에서 MRI도 찍었다. 나도 하청업체 직원으로 기흥공장에서 용접 일을 했는데, 배관시설이 터져서 수리를 하러 가보면 현장 근무자들이 새어나온 용액을 걸레로 닦고 있었다. 우리는 용접 마스크를 써도 공장에 들어서면 냄새가 나는데,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얇은 방진마스크 하나 쓰고 있었다." (고 이숙영씨 남편 이선원씨)
"공장에서 방사선을 쓰는 것도 몰랐다. 화학약품 냄새가 나지만 작업하다 보면 신경쓸 겨를도 없다. 인터락(안전장치)이 있긴 하지만,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다들 해지해 놓고 일했다. 안전교육에서도 화학물질 얘기는 못 들었다. 여름엔 물놀이 안전교육하고 봄에 소방교육하고." (고 황민웅씨 부인 정애정씨, 1995~200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 근무)
"90년대는 지금보다 심했다. 가건물 같은 사업장에서 낡은 장비로 일했으니까. 칸막이도 없이 화학약품 연기 다 맡으면서 12시간 맞교대로 작업했다. 원가절감 차원에서 방진복이나 방진화·장갑도 구멍이 나야 새 걸로 바꿔주고, 방진복은 개인적으로 빨아서 다려입었다." (김옥이씨, 1991년~1996년 삼성전자 온양공장 근무)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삼성전자에 대한 역학조사 과정에서 "1997년 이후 12명이 백혈병을 앓고 이 중 5명 사망했다"고 확인했다.
이번에 산재 신청을 한 박지연씨는 지난 2004년부터 온양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3년 뒤인 2007년 급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는 그에게 "화공약품을 만지다가 왔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박씨에 따르면, 공장 몰드 작업에 방사선 발생장치를 2대 사용하는데 바쁠 때는 방사선을 끄지 않은 상태에서 뚜껑을 열었다고 한다. 또한, 도금 작업 중에 화학약품 용액에서 나는 연기와 냄새로 어지러운 적이 많았고, 면장갑을 끼고 일해도 화학약품이 피부에 스며들었다고 한다. 물로 닦아내도 자국과 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주변에는 유산된 사람도 있고, 나도 '당연히' 생리불순이 있었다"면서 "발병하기 몇 달 전에는 갑자기 하혈해서 방진복에 피가 묻었다"고 주장했다.
정애정씨 역시 "방진복을 입어도 물이 스며든다"면서 "방진복은 유해물질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옷이 아니라 먼지로부터 반도체 제품을 보호하는 옷이다, 그냥 작업복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삼성에 들어갔지만..."
백혈병 치료비는 약 1억 원에 달한다. 통상 항암치료에만 5천만 원 가량이 들고 골수이식에도 3천만 원 가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성 집단백혈병 환자들 중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고등학교만 졸업한 뒤 곧장 공장에 취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 황유미씨는 지난 2003년도 "내 돈으로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겠다"면서 19살 나이에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취업했고, 2005년 백혈병을 선고받았다. 아버지 황상기씨는 "이런 일이 외부에 알려졌다면 절대 (삼성전자에) 안 보냈다, 지금도 화가 나서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박지연씨 역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효도해보려고 삼성전자 공장에 들어갔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니까 생산직이라도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모아놓은 돈은 다 치료비로 날리고 빚도 졌다. 부모님께도 큰 불효를 한 셈이다."
박씨는 아직 병가 상태로 삼성전자 직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지만 회사에 다시 다닐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발암물질이 있을지 모르는 현장에서 다시 일할 자신이 없다. 또한 골수이식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고, 세균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려면 직장에서의 단체생활도 거의 불가능하다.
박씨는 "지금도 한 번 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때마다 20만~30만원이 드는데 나는 밥벌이도 못하고 있고 어머니가 식당에서 버는 돈으로 가족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산재를 인정받아 보험급여를 받지 못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공단이 민간보험사처럼 너무 보수적으로 사안으로 보고 있어"
▲ 지난 3월 6일 삼성 본관 앞에서 열린 고 황유미씨 추모제. ⓒ 반올림
공유 소장은 "당사자가 산재 여부를 입증해야 하는 현실이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다룬 화학물질이 뭔지도 모르고 사업체에서는 협조하지 않으면 구제받기 어렵다"면서 "이런 상황을 잘 고려해서 판단해야지, 기계적으로 판단하려면 공단이 뭐하러 있겠냐"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번에 안 되더라도 재심사 등 산재를 통한 보상 노력은 계속해야 다른 피해들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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