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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께 축하전화로 만족한 어버이날

"맘 다 아릉게 전화 혀도 그만, 안 혀도 그만인디..."

등록|2009.05.08 10:09 수정|2009.05.08 11:02
제37회 어버이날입니다. 부모님 은혜와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자는 뜻으로 제정된 어버이날은 1956년에 어머니날을 제정하고, 학교와 관공서에서는 해마다 5월8일이 되면 어머니를 모셔다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다 1972년 제17회 어머니날을 마지막으로 1973년부터 어버이날로 치러오고 있지요.

▲ 학창시절 어머니날 학교 정문 모습(1968년). 앨범 사진인데요. 이 날은 어머니들을 초청해서 교장선생님이 장한 어머니에게 표창하고 운동장에서 기념행사도 열었습니다. ⓒ 조종안


60-70년대까지만 해도 어머니날은 중산층 이상이나 챙겼습니다. 가난한 서민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고달팠으니까요. 당시만 해도 공휴일이나 일요일에도 근무하거나 밤일을 하는 기업체가 많았습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니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라는 노랫말처럼 죽도록 갚아도 못 갚는 게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은 부모의 은덕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환갑이 넘은 아버지를 보며 '나도 저렇게 늙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는데, 40대가 청년으로 보이는 이순(耳順)에 이르렀습니다. "세월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빨리 간다"는 옛말을 하루하루 느낍니다.

평소에는 관심이 없다가도 코흘리개였던 조카 손자·손녀가 군대에 가고 대학에 진학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예순이 된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겉모습만 변했지, 마음은 동무들과 교실에서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꿈의 나래를 펼치던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팔십 청춘'이라는 말이 생겨난 모양입니다.

장모님께 축하전화로 만족을

▲ 딸이 운영하는 아파트 상가 화장품 가게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장모님. ⓒ 조종안

작년 어버이날에는 장모님을 찾아가 간자장을 시켜먹으며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들을 묻고 기록하면서 하루를 보냈는데, 올해는 찾아뵙지 못할 것 같더군요. 해서 어버이날 아침에 안부전화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어제였습니다. 저녁밥을 해먹고 앉아 있는데 마을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을 하더군요. 어버이날 점심을 준비했으니 오전 11시까지 한 분도 빠짐없이 마을회관으로 나와 달라는 방송이었습니다. 학창시절 어머니를 학교로 초대해서 큰절도 하고 교장선생님이 장한 어머니에게 표창도 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시나브로 떠오르더군요.

방송을 들으니까, 좋은 세상을 못 보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동시에 부산에 계시는 장모님이 떠올랐고, 어버이날 아침에 전화하려고 했던 마음이 바뀌면서 저도 모르게 전화기 옆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어머니, 저 '안나 아빠'예요. 달력을 보니까 내일이 어버이날이고, 어머니 생각이 나기에 전화했습니다. 미리 축하드릴게요."
"하이고 무슨 전화까지 혔댜, 그라녀도 오늘 여그저그서 전화가 싹 다 왔었어. 남겸이는 쪼꼼 아까 왔고···."

"큰아들에게는 매일 안부전화를 받고, 작은아들들도 잊지 않고 전화를 하니까 어머니는 참 좋으시겠어요. 제가 오늘 전화허기 잘했구만요. 안 했으면 서운하셨을 거니까요."
"서운허기는 머시 서운혀, 맘 다 아릉게 전화 혀도 그만이고, 안 혀도 그만인디··· 그나저나 혼자 있을 때가 많을 틴디 어치께나 지낸댜?"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요. 전화도 자주 하고 어머니 용돈도 보내 드려야 하는데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안나 엄마는 점심때 출근했으니까 밤이 늦어야 퇴근할 겁니다. 그리고 저는 잘 지내니까 어머니도 내내 건강하셔야 합니다. 또 전화 드릴게요."

은은하고 아름다운 고려청자나 조선 백자와 달리 투박한 옹기그릇처럼 살아오신 장모님은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5남매 모두 대학교육까지 마치게 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에게 대접을 받을 만도 하지요.

장인은 평생 소작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끄등이(말고삐) 잡고 짐을 실어 나르며 빚 갚을 걱정만 하다가 돌아가셨고, 장모님은 그 빚을 갚으려고 7-8년씩 남의 집 식모살이도 마다 안 하셨다니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아왔는지 짐작이 갑니다.

평생을 가난과 함께 해온 장모님은 올해로 83세인데요. 아픈 데 없이 건강하신 걸 보면 복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을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10년 전부터 막내딸 집에서 사위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시거든요. 그래서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생겨난 모양입니다.

올해도 장모님에게 용돈이나 선물은 전해 드리지 못했지만, 전화를 걸어 안부도 묻고, 장모님이 듣기 좋은 덕담도 건네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나니까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전화를 끊고 글을 정리하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계를 보니까 밤 11시가 넘었더군요. 항상 하는 일이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면서 장모님에게 전화한 사실을 얘기했더니 깜짝 놀라더군요.

아내도 전화를 했는데, 막내딸(처제)에게 비싼 옷을 선물 받았다고 자랑만 했지 큰 사위에게 전화 왔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더랍니다. 웃음이 나오더군요. 용돈도 못 주는 사위가 얼마나 자랑스럽다고 전화 왔었다고 얘기했겠습니까.

그래도 아내가 용돈을 조금 보내드렸다는 얘기를 듣고 그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 대신 용돈을 보내드렸으니 감사할 수밖에요. 전화로 안부도 묻고, 아내에게 기분 좋은 소식도 들어서 그런지 어버이날을 잘 넘긴 것 같아 홀가분하네요.

아내는 이달 네 번째 주말에 경상남도 함양에서 장모님과 처제네 식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까지 전해주었습니다. 초록의 신선함으로 온 산야가 출렁이는 가정의 달, 5월에 부산에서 함께 살던 가족이 만나기로 했다니 지금부터 기다려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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