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카네이션 대신 구호 적힌 앞치마 두른 할머니들
[현장] 할머니들이 군청 앞에서 1인 시위하는 까닭
▲ 전남 담양군 무정면 할머니들이 어버이날인 8일 아침부터 군청 앞에서 교대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이주빈
짧지만 분명한 할머니들의 구호 "벌받을 짓 하지 마라!"
여느 때 어버이날 같았으면 잔치도 하고, 공원에 놀러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전남 담양군 무정면 할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카네이션 대신 위로전화를 받으며 담양군청 앞에서 두 달 넘도록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8일 오전 담양군청 앞. 40여 명의 할머니들이 30분씩 돌아가며 교대로 하는 1인 시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들은 하나 같이 구호가 적힌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앞치마에 천을 대고 적은 구호는 짧지만 절박하다.
"벌 받을 짓 하지 마라!"
"양심도 없냐?"
"징해서 못살겠소."
"누구냐, 더러운 손!"
"불법과 손잡지 마시오!"
나이 여든을 코앞에 두고 있는 김귀순(79) 할머니는 1인 시위 교대를 기다리고 있다. 김 할머니는 지병 때문에 병원치료를 받고 오는 길이다. 김 할머니는 "자식들이 오늘 전화가 왔는데 '어버이날인데 오늘도 데모 가냐'고 묻더라"며 "텔레비전 보면 데모하는 사람들 막 나오고 해서 데모가 뭐다냐 했는데 내가 데모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장희남(62) 할머니는 일찌감치 1인 시위를 끝냈다. 장 할머니는 "어버이날이지만 마을에서 아무 행사도 안하고 구순이 넘고 팔순이 넘은 분들도 (1인 시위를) 하러 왔다"며 "아무리 늙고 힘없는 우리가 보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어서 한번 끝까지 해볼 참"이라고 의지를 밝힌다.
담양군 무정면 할머니들이 데모를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 마을 인근에 있는 'D석재'가 일명 '크락샤'라고 불리는 석재 파쇄·분쇄기(이하 쇄석기)를 불법적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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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크락샤가 돌을 깨며 발생하는 엄청난 소음과 먼지 때문에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며 해당 업체에겐 크락샤 가동중지 및 철거를, 담양군에게는 공장 승인을 해주지 말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담양군은 지난 3월 D석재가 낸 '업종변경(추가) 사업계획서'를 승인해줬다. 물론 4쪽에 달하는 승인조건을 달고서다. 할머니들은 "이 조건만 놓고 보더라도 절대 크락샤 공장이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업체로부터 고발당한 할머니들, 감사원에 감사청구하다
▲ 앞치마에 천에 대고 구호를 적었다. 어버이날, 할머니들은 카네이션 대신 구호 적힌 앞치마를 두르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이주빈
할머니들은 이 업체가 "공장등록을 한 후 공장을 가동하라"는 담양군의 당부부터 무시했다고 분노하고 있다. 실제로 이 업체는 현재 업종추가에 따른 사업계획에 대한 승인이 나 있을 뿐이지 공장가동 승인이 난 상태는 아니다. 즉 공장을 돌려서는 안되는데 불법적으로 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숙 담양군 무정면 쇄석기불법설치반대 대책위원장은 "불법가동을 하더라도 벌금 100만원 정도만 내면 되니 업체에겐 아무 부담이 없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담양군은 또 이 업체에게 "사업시행 시 발생되는 오염원(비산먼지, 소음, 진동 등)에 대한 저감방안 계획을 반드시 수립하고 시행하여 공사 및 운영 시 발생되는 오염원으로 인해 주변환경에 미치는 환경상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이 업체는 마치 콧방귀를 뀌듯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우선 불법가동부터 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할머니들이 "공장 짓기 전에 한다는 사전환경영향 평가를 공장을 실컷 돌리고 난후에 하니 이게 '사후환경영향평가'지 '사전 평가'냐"며 힐난하고 있을 정도다.
군이 제시한 사업계획승인 조건엔 ▲주민들과의 충분한 협의 ▲민원발생시 공사중지 등이 포함돼 있지만 업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려서는 안되는 공장기계를 계속 돌리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담양군이 훤하게 보이는 업체의 불법을 눈감아주면서까지 사업계획 승인을 해줬기 때문에 업체가 더욱 불법적으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고 의혹과 원망의 눈초리를 담양군에 보내고 있다.
참다 못한 할머니들은 감사원에 공익 감사청구를 해둔 상태다. 업체가 불법적으로 공장을 가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양군이 이를 사실상 눈감아주고 되레 사업계획까지 승인해 준 점은 부당하다는 이유에서다.
김채선(71) 할머니는 "어버이날이라고 자식들이 여기 1인 시위하는 데로 찾아온다고 연락이 왔다"며 수줍게 웃는다. 김 할머니가 "자식들이 나 보고 '나이 들어서 데모 하시느라 애 쓴다'며 오히려 걱정을 한다"면서 "다른 데서는 자식들이 데모하는 것 때문에 부모가 걱정하는데 무정면에서는 거꾸로 부모들이 데모하니까 자식들이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주변에서 맞장구 웃음이 터진다.
할머니들은 군청 앞 1인 시위를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할머니들과 함께 군청 앞에 나온 정필환(78) 할아버지는 "한 사람의 돈 벌이 때문에 2천명의 무정면 주민이 고통을 당해야 하나"며 "문제가 끝날 때까지 데모를 댕길(다닐)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무정면 할머니들과 주민들, 대책위 관계자 등 50여 명은 공장을 불법가동한 업체로부터 고발을 당한 상태다. 업무방해 및 일반교통을 방해했다는 혐의다. 할머니들을 고발한 이 업체의 대표자는 지난 4월 30일에 산림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로부터 징역 1년에 벌금 5백만원을 구형받은 상태다.
한편 할머니들의 1인 시위와 관련 담양군 관계자는 "주민들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은 안타깝지만 현행법상 업체의 공장 업종추가 사업계획을 승인해주지 않을 근거가 없다"며 "업체가 불법가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군이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것은 과태료 처분뿐"이라고 해명했다.
▲ 할머니들의 구호는 짧지만 분명하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양심도 없냐" "벌받을 짓 하지 마라".... 어버이날, 할머니들이 외치는 구호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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