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머니가 쪼들렸기 때문에
사진잡지 〈포토넷〉에 이어싣는 글이 있습니다. 처음 한 해는 '헌책방에 깃들어 있는 숨은 사진책'을 이야기했고, 다음 한 해는 '헌책방에서 찾아낸 일본 사진책'을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지난 한 해치 글이나 앞으로 쓰는 글이나 '헌책방을 꾸준히 다니지 않고'서는 쓸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헌책방을 다니며 사들인 책만으로도 얼마든지 '죽는 날까지 책 이야기는 질리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동안 사들여 읽은 책을 알려주는 글을 쓰려고 해도 절반은커녕 1/10조차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굳이 헌책방마실을 더 하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기는 한데, 제 마음은 도무지 그러하지 못합니다. 여태까지 본 책으로 넉넉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하여도, 아직 제가 모르는 더 많은 책을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보면서 '마지막까지 알아낸 테두리'에서 '책이란 무엇이고 책을 어떻게 받아먹으며 살아가면 좋을까'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한 해 열두 번 쓰는 글감을 헤아릴 때에는 으레 스물네 꼭지나 서른여섯 꼭지쯤을 미리 마련해 놓습니다. 이어쓰는 글이 한 번 두 번 마무리되는 동안, 이제는 몇 번 더 못 쓰겠다는 생각에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쉽기 때문에 다음에 또다른 새 이어쓰기를 생각할 수 있고, 새 이어쓰기를 생각하는 동안 제 눈길이나 눈썰미는 한결 깊어지곤 합니다. 제자리에 머무는 눈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곳에 고여 곰팡이가 피는 눈썰미에 맴돌지 않습니다. 새로 나오는 책을 찾아 읽으면서도 새로움을 느끼지만, 한철을 묵고 잊혀져 간 책을 찾아 읽으면서도 새로움을 느낀다고 할까요. 하기는, 저는 책을 읽을 뿐, '새책'이나 '헌책'을 읽지 않으니까요. 헌책방에서 헌책을 장만한다 하여도 '책'을 장만하여 읽지, '헌 물건을 값싸게' 장만하여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제 주머니가 넉넉했다거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책을 몹시 좋아하여 집에 책을 가득 갖추어 놓고 있었다면 헌책방마실을 얼마나 했을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이때에는 헌책방마실은 안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또는, 헌책방마실을 이제까지와 같이 했다고 하여도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쓴다거나 헌책방에서 찾아낸 책을 이야기로 엮어내려는 꿈은 못 품었으리라 느낍니다. 책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가기만 할 뿐, 책 하나가 한 사람 손을 거쳐 길거리로 나온 다음 다시 누군가 한두 사람 손을 거쳐 헌책방 책시렁에 꽂히기까지 어떠한 흐름이 있었는가를 돌아볼 겨를을 못 내었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책 사는 돈은 늘 넉넉하여' 읽을거리는 근심걱정 없이 갖추어 놓고 읽기도 훨씬 더 잘 읽기는 했을 텐데, '책 안'에 사로잡혀 '책 밖'에서 어떤 사람 어떤 땀 어떤 품 어떤 세월이 어우러지는가에는 마음을 못 썼으리라 봅니다.
주머니가 넉넉할 때에는 '이 책도 사고 저 책도 사고' 하면서, 책 사는 데에 바쁩니다. 또, 산 책을 읽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주머니가 쪼들릴 때에는 '이 책을 사야 할까 저 책을 사야 할까'를 놓고 오래도록 견주고 살피며 망설여야 합니다. 끝내 두 가지를 모두 놓고 나오는 때가 있으며, 눈물겹게 두 가지를 다 골라드는 때가 있는데, 이렇게 주머니 때문에 마음실랑이를 하는 동안 더 오래 헌책방에 머물 수 있고, 더 오래 헌책방에 머물면서 헌책방 흐름을 어렴풋하게 느낍니다. 이 어렴풋한 느낌은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로 이어가는 동안 살갗으로 스밉니다. 주머니가 쪼들렸기에 몇 시간이고 헌책방에 깃들며 책을 읽었고 헌책방 일꾼하고도 몇 마디 더 나눌 수 있었으며, 가끔 밥을 함께 먹기도 하면서 차츰차츰 헌책방이라는 곳에 제 몸과 마음이 녹아들었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했다면 얼른 고르고 금세 헌책방 문을 나섰을 테니, 그 어떤 이야기도 오가지 못했겠지요. 더구나 고른 책이 많으면 '그 책을 읽는 데에 틈을 쪼개려 하'지, '헌책방 일꾼하고 몇 마디 더 나눈다며 한두 시간을 더 머무는 데에 틈을 나누'려 했겠습니까.
(2) 무엇을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만드나
오늘 하루도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를 떠올리면서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두 식구 살림이 아닌 세 식구 살림인 터라, 아기도 어른하고 똑같이 고스란히 많이 들여야 하는 돈이니, 제아무리 '이 책은 꼭 사서 읽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어도 섣불리 집어들지 못합니다. '참말 꼭 사야겠니?' 하고 스스로 몇 번이고 되묻습니다. '책방에 서서 읽고 가면 안 되겠니?' 하고 다시금 묻습니다.
몇 가지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제자리에 꽂아 두기를 되풀이하던 가운데, 모두 열 권으로 이루어진 "珠玉の寫眞集" 가운데 일곱 권을 봅니다. 사진을 찍은 '하타 마치노리(畑正憲)' 님은 1935년에 태어나 1950년대부터 영화사에서 일하며 짐승들 삶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사이사이 짝이 빠져 아쉽지만, 이나마 일곱 권이 한 자리에 있으니 고마운 셈 아닌가 싶어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1) 動物王國 命あふれ》(朝日出版社,1988)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2) 動物王國 熱い願い》(朝日出版社,1988)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3) 犬を求ぬ犬と共に》(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4) アフリカのゆかいな仲間》(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5) 人と動物 みんな友だち》(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6) 幻の犬, 幻の馬を求めて》(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9) 世界の犬 ムシゴロウ圖鑑》(朝日出版社,1989)
사진이 퍽 괜찮구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마흔 해 가까이 한 가지 이야기로 사진을 찍어 왔으니까요. 꾸준하게 찍고 보고 다시 찍고 다시 보고 하면서 가다듬어 왔을 테니까요.
뒤이어, 우리 나라에는 이처럼 짐승 사진을 찍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듭니다. 짐승 사진을 찍기는 찍어도 '낱권책으로 묶을 만큼 깊고 넓게 생각하는 분은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또한, 동물원 짐승 사진이든 들에서 사는 짐승 사진이든 곰곰이 찾아나서기조차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珠玉の寫眞集(주옥 같은 사진책)"이라는 이름까지 당차게 붙이며 이런 사진묶음을 펴내기는 하지만,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옥 같은 사진책"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붙일 수 있으며, 또한 짐승 사진을 담는 책 가운데 이 이름, "주옥 같은 사진책"이 부끄럽지 않을 만한 책을 묶어내겠다는 출판사는 몇 군데쯤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틀림없이 돈이 있어야 할 만한 일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돈뿐 아니라 빼어난 사진가도 있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과 사진가뿐 아니라 출판사 우두머리가 오래도록 기다리고 마련하면서 한뜻을 이어나가야 하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진밭을 돌아보고 책마을을 돌아볼라치면, 짐승 사진뿐 아니라 산이나 강이나 바다 사진도 퍽 드뭅니다. 찍는 사진은 늘 그 산이 그 산입니다. 찍는 강도 그 강이 그 강이지만, 강 사진은 아직 얼마 못 보았습니다. 섬이 그토록 많은 우리 나라라 하지만, 그 많은 섬 가운데 제주나 마라를 빼고는 딱히 사진가 눈에 들어온 섬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항으로 바뀌기 앞서 영종과 용유를 사진으로 남긴 이는 얼마나 있었을까 궁금하며, 영종과 용유가 인천 앞바다에 있을 때 인천 사진가는 얼마나 영종과 용유를 영종과 용유 그대로 담았을까 궁금합니다.
도시로 바뀌었다 할지라도, 서울에서는 여의를 얼마든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담는 눈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지, 옛날 모습부터 찍었어야만 더 나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옛날 모습이 없다면, 옛날 모습은 못 찍었다면, 바로 오늘부터 찍으면 돼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만 보여주어야 할까요? 2000년대부터 2050년대까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까요? 우리는 옛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오늘 이곳을 사진으로 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부터 사진으로 찍어야 합니다.
《드레이튼 해밀튼/권희종 옮김-한 미국인이 렌즈로 바라본 20년 간의 한국 풍경》(생각의나무,2008)이라는 책을 뒤적입니다. 1968년에 주한미군 부대 군인으로 왔다가, 1983년부터는 고려대학교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드레이튼 해밀튼 님은 서울에 열세 해에 걸쳐 살면서 이 나라 사람과 삶터를 사진으로 담았다고 합니다. 응? 해적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 책이름은 '20년 간의 한국 풍경'이네? 뭐지? 서울에서는 열세 해를 살고 다른 곳을 돌며 일곱 해를 살았다는 소리인가? 일곱 해는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혀 놓지 않았는데.
그래도 1983년부터 치면, 책이 나온 2008년까지 스물다섯 해가 되니까 '20년 간'이라는 햇수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1983년부터 따지자면 또 스물다섯 해라는 세월인 만큼, 어딘가 아귀가 안 맞습니다.
.. 한국인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혹은 길거리에서나 공원에서, 또는 비좁은 자그마한 식당이나 구멍가게에서 (절대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냥 서로 몸을 부딪치고 한데 어울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모든 형태의 삶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어울려 모여 노는 문화가 지속되는 진짜 이유 속에는 심오하거나 신비로울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나를 팔꿈치로 밀치고 툭 치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그저 흥미롭고 재미있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어서 이웃도 친교도 없는 미국 근교의 삶보다 더 지루한 것은 없겠다. 철저히 밀폐된 안락한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부터 냉난방이 자동조절되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어쩌면 움직이는 무빙워크 덕에 자신의 발로 걸을 필요도 없는 쇼핑체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몰에서 쇼핑을 하고 온 후엔 진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대조적으로, 두 다리를 써서 (확실하게 대형할인점 아닌) 동네시장에 나가 거기서 쌀, 두부, 고기, 생선 등을 따로 취급하는 가게의 주인들과 한나절을 보내고 오는 한국에선 왜 힘이 나고 기운이 솟는 것일까? 확실히, 한국적 체험 가운데는 사람을 신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곳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건 대체 무엇일까? 여기에 대비되어, 미국의 쇼핑객의 경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완전히 파김치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미가 결여된 무료함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 (133쪽)
스콧 버거슨이라는 분이 쓴 책이나 에릭 비데라는 분이 쓴 책도 드레이튼 해밀튼이라는 분 책하고 느낌이 어딘가 닮았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책은 같지 않습니다. 스콧 버거슨 님은 파헤치려는 마음이지 싶고, 에릭 비데 님은 한국이 좋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느낀 삶이구나 싶고, 드레이튼 해밀튼 님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이라고 봅니다.
이 가운데 어느 눈썰미가 한국사람과 한국땅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삭여냈다고 따질 까닭은 없습니다. 그저 이런 눈이 있는 한편 저런 눈이 있고, 그런 눈이 있는 가운데 요모조모 눈이 있네 할 뿐입니다. 나라밖 사람으로서 한국을 바라보는 일도 재미있을 테지만, 나라밖 사람으로서 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야기를 또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저이는 저곳에서 저렇게 느끼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고, 저이는 저곳에서 저 모습을 지나치는구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라밖 사람이 바라본 한국 모습을 이와 같은 책으로 묶어내는 손품이 '나라안 사람이 들여다본 한국 모습을 책 하나로 묶어내는' 데에도 이어지고 있나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깜냥으로 우리 삶을 헤아리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온몸으로 우리 터전을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남들이 말하기 앞서 우리가 기꺼이 나서서 하는지 궁금하고, 남들이 말하건 어떠하건 우리 줏대를 슬기롭게 가다듬으면서 키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이야기를 우리 틀거리대로 갈고닦으면서 우리 책으로 엮고 있는지 궁금하며, 우리 목소리를 우리 이웃과 함께 귀기울여 듣고 곰삭이는 가운데 우리 책으로 나누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3) 달력 하나에도
달력 두 가지를 구경합니다. 철지난 달력이지만, 사진 열두 장으로 엮은 녀석이라, 좋은 사진자료가 되리라 느끼면서 골라듭니다. 《岩合光昭-日本の苗》(平凡社,2005)는 일본 고양이를 보여줍니다. 《岩合光昭-ニッポンの犬》(平凡社,2005)은 일본 개를 보여줍니다. 꼭 열두 장만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만큼 느낌은 느낌대로 좋아야 하고,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살뜰히 엮어야 합니다.
달력 사진을 넘겨보면서, 누군가 나한테 '헌책방 이야기'로 열두 장짜리 달력, 또는 여섯 장짜리 달력을 만들고자 하니 사진 여섯 장이나 열두 장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 사진을 내어주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또는, '골목길 이야기'로 열두 장짜리 달력이나 여섯 장짜리 달력에 넣을 만한 사진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 사진을 추려서 내어주겠느냐고 생각합니다.
퍽 재미있겠네 싶으면서 꽤 아찔합니다. '내가 여섯 장만으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는가?' '나는 꼭 열두 장만 보여주어도 내 사진감을 아쉬움이나 모자람이나 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잡을 수 있도록 애썼는가?' '내 사진 한 장 한 장은 헌책방뿐 아니라 책과 사람이 그달 그날 어떻게 어우러지는가를 보여주는가?' '사람들이 한 달이나 두 달 내내 내 사진 한 가지만 보면서도 마음이 넉넉하거나 흐뭇하거나 즐거울 수 있게끔 다리품을 팔고 온힘을 다했는가?'
다른 이가 이룬 열매를 살피면서 미주알고주알 따지기란 얼마나 쉬운가 하고 새삼 깨닫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열매 하나를 이루자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겹게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거듭 느낍니다. 그동안 주제넘는 소리를 많이 지껄이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앞으로는 내 이야기가 내 속마음을 참다이 담아내는 틀거리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싱그러움까지 알차게 담아내는 틀거리를 이루지 못한다면 도로묵이 되겠다고 느낍니다.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달력을 덮습니다. 한 권 두 권 고른 책을 가슴에 안고 셈대로 갑니다. 책값을 셈하고,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가방에 안 들어가는 책은 끈으로 묶어 한손으로 듭니다. 〈글벗서점〉 아주머니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책방 문을 나섭니다.
오늘 하루 헌책방마실을 안 했으면 내 사진눈이나 책눈은 어느 자리에서 떠돌거나 맴돌았을까 생각합니다. 책꾸러미가 꽤 묵직하다고 느끼면서, 이 묵직함을 내 몸이며 마음이 얼마나 잘 삭이고 있었는가를 곱씹습니다.
'부끄럽다면 더 읽자. 창피하다면 더 찍자. 남우세스럽다면 더 갈고닦자. 들 만한 얼굴이 없다면 더 글을 쓰고 더 뛰자.'
사진잡지 〈포토넷〉에 이어싣는 글이 있습니다. 처음 한 해는 '헌책방에 깃들어 있는 숨은 사진책'을 이야기했고, 다음 한 해는 '헌책방에서 찾아낸 일본 사진책'을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지난 한 해치 글이나 앞으로 쓰는 글이나 '헌책방을 꾸준히 다니지 않고'서는 쓸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한 해 열두 번 쓰는 글감을 헤아릴 때에는 으레 스물네 꼭지나 서른여섯 꼭지쯤을 미리 마련해 놓습니다. 이어쓰는 글이 한 번 두 번 마무리되는 동안, 이제는 몇 번 더 못 쓰겠다는 생각에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쉽기 때문에 다음에 또다른 새 이어쓰기를 생각할 수 있고, 새 이어쓰기를 생각하는 동안 제 눈길이나 눈썰미는 한결 깊어지곤 합니다. 제자리에 머무는 눈길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곳에 고여 곰팡이가 피는 눈썰미에 맴돌지 않습니다. 새로 나오는 책을 찾아 읽으면서도 새로움을 느끼지만, 한철을 묵고 잊혀져 간 책을 찾아 읽으면서도 새로움을 느낀다고 할까요. 하기는, 저는 책을 읽을 뿐, '새책'이나 '헌책'을 읽지 않으니까요. 헌책방에서 헌책을 장만한다 하여도 '책'을 장만하여 읽지, '헌 물건을 값싸게' 장만하여 읽지 않습니다.
▲ 저마다 제 모양새대로 꽂히거나 쌓인 책에서 제 마음에 들어올 책을 살펴봅니다. ⓒ 최종규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제 주머니가 넉넉했다거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책을 몹시 좋아하여 집에 책을 가득 갖추어 놓고 있었다면 헌책방마실을 얼마나 했을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이때에는 헌책방마실은 안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또는, 헌책방마실을 이제까지와 같이 했다고 하여도 헌책방 이야기를 글로 쓴다거나 헌책방에서 찾아낸 책을 이야기로 엮어내려는 꿈은 못 품었으리라 느낍니다. 책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가기만 할 뿐, 책 하나가 한 사람 손을 거쳐 길거리로 나온 다음 다시 누군가 한두 사람 손을 거쳐 헌책방 책시렁에 꽂히기까지 어떠한 흐름이 있었는가를 돌아볼 겨를을 못 내었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책 사는 돈은 늘 넉넉하여' 읽을거리는 근심걱정 없이 갖추어 놓고 읽기도 훨씬 더 잘 읽기는 했을 텐데, '책 안'에 사로잡혀 '책 밖'에서 어떤 사람 어떤 땀 어떤 품 어떤 세월이 어우러지는가에는 마음을 못 썼으리라 봅니다.
주머니가 넉넉할 때에는 '이 책도 사고 저 책도 사고' 하면서, 책 사는 데에 바쁩니다. 또, 산 책을 읽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주머니가 쪼들릴 때에는 '이 책을 사야 할까 저 책을 사야 할까'를 놓고 오래도록 견주고 살피며 망설여야 합니다. 끝내 두 가지를 모두 놓고 나오는 때가 있으며, 눈물겹게 두 가지를 다 골라드는 때가 있는데, 이렇게 주머니 때문에 마음실랑이를 하는 동안 더 오래 헌책방에 머물 수 있고, 더 오래 헌책방에 머물면서 헌책방 흐름을 어렴풋하게 느낍니다. 이 어렴풋한 느낌은 한 해 두 해 열 해 스무 해로 이어가는 동안 살갗으로 스밉니다. 주머니가 쪼들렸기에 몇 시간이고 헌책방에 깃들며 책을 읽었고 헌책방 일꾼하고도 몇 마디 더 나눌 수 있었으며, 가끔 밥을 함께 먹기도 하면서 차츰차츰 헌책방이라는 곳에 제 몸과 마음이 녹아들었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했다면 얼른 고르고 금세 헌책방 문을 나섰을 테니, 그 어떤 이야기도 오가지 못했겠지요. 더구나 고른 책이 많으면 '그 책을 읽는 데에 틈을 쪼개려 하'지, '헌책방 일꾼하고 몇 마디 더 나눈다며 한두 시간을 더 머무는 데에 틈을 나누'려 했겠습니까.
▲ 헌책방 <글벗서점> 앞은 버스중앙차선 공사를 한다며 퍽 어수선하게 되었습니다. ⓒ 최종규
(2) 무엇을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만드나
오늘 하루도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들어 있는가를 떠올리면서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두 식구 살림이 아닌 세 식구 살림인 터라, 아기도 어른하고 똑같이 고스란히 많이 들여야 하는 돈이니, 제아무리 '이 책은 꼭 사서 읽어야겠어!' 하는 생각이 들어도 섣불리 집어들지 못합니다. '참말 꼭 사야겠니?' 하고 스스로 몇 번이고 되묻습니다. '책방에 서서 읽고 가면 안 되겠니?' 하고 다시금 묻습니다.
몇 가지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제자리에 꽂아 두기를 되풀이하던 가운데, 모두 열 권으로 이루어진 "珠玉の寫眞集" 가운데 일곱 권을 봅니다. 사진을 찍은 '하타 마치노리(畑正憲)' 님은 1935년에 태어나 1950년대부터 영화사에서 일하며 짐승들 삶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사이사이 짝이 빠져 아쉽지만, 이나마 일곱 권이 한 자리에 있으니 고마운 셈 아닌가 싶어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1) 動物王國 命あふれ》(朝日出版社,1988)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2) 動物王國 熱い願い》(朝日出版社,1988)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3) 犬を求ぬ犬と共に》(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4) アフリカのゆかいな仲間》(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5) 人と動物 みんな友だち》(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6) 幻の犬, 幻の馬を求めて》(朝日出版社,1989)
《ムツゴロウとゆかいな仲間たち (9) 世界の犬 ムシゴロウ圖鑑》(朝日出版社,1989)
사진이 퍽 괜찮구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마흔 해 가까이 한 가지 이야기로 사진을 찍어 왔으니까요. 꾸준하게 찍고 보고 다시 찍고 다시 보고 하면서 가다듬어 왔을 테니까요.
▲ 마흔 해 가까이 한 가지 사진만 찍어 온 열매가 담긴 열 권짜리 책에 붙은 "주옥 같은 사진책"이라는 말을 보면서, 저 또한 이와 같은 열매를 일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짐하게 됩니다. ⓒ 최종규
뒤이어, 우리 나라에는 이처럼 짐승 사진을 찍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듭니다. 짐승 사진을 찍기는 찍어도 '낱권책으로 묶을 만큼 깊고 넓게 생각하는 분은 드물지 않느냐 싶습니다. 또한, 동물원 짐승 사진이든 들에서 사는 짐승 사진이든 곰곰이 찾아나서기조차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珠玉の寫眞集(주옥 같은 사진책)"이라는 이름까지 당차게 붙이며 이런 사진묶음을 펴내기는 하지만,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옥 같은 사진책"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붙일 수 있으며, 또한 짐승 사진을 담는 책 가운데 이 이름, "주옥 같은 사진책"이 부끄럽지 않을 만한 책을 묶어내겠다는 출판사는 몇 군데쯤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틀림없이 돈이 있어야 할 만한 일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돈뿐 아니라 빼어난 사진가도 있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과 사진가뿐 아니라 출판사 우두머리가 오래도록 기다리고 마련하면서 한뜻을 이어나가야 하는 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진밭을 돌아보고 책마을을 돌아볼라치면, 짐승 사진뿐 아니라 산이나 강이나 바다 사진도 퍽 드뭅니다. 찍는 사진은 늘 그 산이 그 산입니다. 찍는 강도 그 강이 그 강이지만, 강 사진은 아직 얼마 못 보았습니다. 섬이 그토록 많은 우리 나라라 하지만, 그 많은 섬 가운데 제주나 마라를 빼고는 딱히 사진가 눈에 들어온 섬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공항으로 바뀌기 앞서 영종과 용유를 사진으로 남긴 이는 얼마나 있었을까 궁금하며, 영종과 용유가 인천 앞바다에 있을 때 인천 사진가는 얼마나 영종과 용유를 영종과 용유 그대로 담았을까 궁금합니다.
도시로 바뀌었다 할지라도, 서울에서는 여의를 얼마든지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담는 눈에 따라 사진이 달라지지, 옛날 모습부터 찍었어야만 더 나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옛날 모습이 없다면, 옛날 모습은 못 찍었다면, 바로 오늘부터 찍으면 돼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만 보여주어야 할까요? 2000년대부터 2050년대까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을까요? 우리는 옛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오늘 이곳을 사진으로 담아야 합니다. 바로 오늘 이곳부터 사진으로 찍어야 합니다.
《드레이튼 해밀튼/권희종 옮김-한 미국인이 렌즈로 바라본 20년 간의 한국 풍경》(생각의나무,2008)이라는 책을 뒤적입니다. 1968년에 주한미군 부대 군인으로 왔다가, 1983년부터는 고려대학교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드레이튼 해밀튼 님은 서울에 열세 해에 걸쳐 살면서 이 나라 사람과 삶터를 사진으로 담았다고 합니다. 응? 해적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 책이름은 '20년 간의 한국 풍경'이네? 뭐지? 서울에서는 열세 해를 살고 다른 곳을 돌며 일곱 해를 살았다는 소리인가? 일곱 해는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혀 놓지 않았는데.
그래도 1983년부터 치면, 책이 나온 2008년까지 스물다섯 해가 되니까 '20년 간'이라는 햇수는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1983년부터 따지자면 또 스물다섯 해라는 세월인 만큼, 어딘가 아귀가 안 맞습니다.
.. 한국인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혹은 길거리에서나 공원에서, 또는 비좁은 자그마한 식당이나 구멍가게에서 (절대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냥 서로 몸을 부딪치고 한데 어울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모든 형태의 삶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어울려 모여 노는 문화가 지속되는 진짜 이유 속에는 심오하거나 신비로울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 나를 팔꿈치로 밀치고 툭 치는 사람들은 그저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 그저 흥미롭고 재미있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어서 이웃도 친교도 없는 미국 근교의 삶보다 더 지루한 것은 없겠다. 철저히 밀폐된 안락한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부터 냉난방이 자동조절되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어쩌면 움직이는 무빙워크 덕에 자신의 발로 걸을 필요도 없는 쇼핑체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몰에서 쇼핑을 하고 온 후엔 진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대조적으로, 두 다리를 써서 (확실하게 대형할인점 아닌) 동네시장에 나가 거기서 쌀, 두부, 고기, 생선 등을 따로 취급하는 가게의 주인들과 한나절을 보내고 오는 한국에선 왜 힘이 나고 기운이 솟는 것일까? 확실히, 한국적 체험 가운데는 사람을 신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곳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건 대체 무엇일까? 여기에 대비되어, 미국의 쇼핑객의 경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완전히 파김치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인간미가 결여된 무료함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 (133쪽)
▲ 어떤 책을 찾고 알아내고 읽느냐는 오로지 우리 몫이며, 우리 즐거움입니다. ⓒ 최종규
스콧 버거슨이라는 분이 쓴 책이나 에릭 비데라는 분이 쓴 책도 드레이튼 해밀튼이라는 분 책하고 느낌이 어딘가 닮았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책은 같지 않습니다. 스콧 버거슨 님은 파헤치려는 마음이지 싶고, 에릭 비데 님은 한국이 좋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느낀 삶이구나 싶고, 드레이튼 해밀튼 님은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길이라고 봅니다.
이 가운데 어느 눈썰미가 한국사람과 한국땅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삭여냈다고 따질 까닭은 없습니다. 그저 이런 눈이 있는 한편 저런 눈이 있고, 그런 눈이 있는 가운데 요모조모 눈이 있네 할 뿐입니다. 나라밖 사람으로서 한국을 바라보는 일도 재미있을 테지만, 나라밖 사람으로서 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야기를 또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저이는 저곳에서 저렇게 느끼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고, 저이는 저곳에서 저 모습을 지나치는구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라밖 사람이 바라본 한국 모습을 이와 같은 책으로 묶어내는 손품이 '나라안 사람이 들여다본 한국 모습을 책 하나로 묶어내는' 데에도 이어지고 있나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깜냥으로 우리 삶을 헤아리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 온몸으로 우리 터전을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남들이 말하기 앞서 우리가 기꺼이 나서서 하는지 궁금하고, 남들이 말하건 어떠하건 우리 줏대를 슬기롭게 가다듬으면서 키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이야기를 우리 틀거리대로 갈고닦으면서 우리 책으로 엮고 있는지 궁금하며, 우리 목소리를 우리 이웃과 함께 귀기울여 듣고 곰삭이는 가운데 우리 책으로 나누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3) 달력 하나에도
달력 두 가지를 구경합니다. 철지난 달력이지만, 사진 열두 장으로 엮은 녀석이라, 좋은 사진자료가 되리라 느끼면서 골라듭니다. 《岩合光昭-日本の苗》(平凡社,2005)는 일본 고양이를 보여줍니다. 《岩合光昭-ニッポンの犬》(平凡社,2005)은 일본 개를 보여줍니다. 꼭 열두 장만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만큼 느낌은 느낌대로 좋아야 하고,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살뜰히 엮어야 합니다.
달력 사진을 넘겨보면서, 누군가 나한테 '헌책방 이야기'로 열두 장짜리 달력, 또는 여섯 장짜리 달력을 만들고자 하니 사진 여섯 장이나 열두 장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 사진을 내어주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또는, '골목길 이야기'로 열두 장짜리 달력이나 여섯 장짜리 달력에 넣을 만한 사진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 사진을 추려서 내어주겠느냐고 생각합니다.
▲ 길게 이어진 골마루를 둘러보는 데에도 퍽 긴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읽을 때뿐 아니라 찾아나설 때에도 긴 시간이며 품이며 들여야 비로소 내 마음 살찌울 책 하나를 반가이 만나고 삭일 수 있습니다. ⓒ 최종규
퍽 재미있겠네 싶으면서 꽤 아찔합니다. '내가 여섯 장만으로 모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는가?' '나는 꼭 열두 장만 보여주어도 내 사진감을 아쉬움이나 모자람이나 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 다잡을 수 있도록 애썼는가?' '내 사진 한 장 한 장은 헌책방뿐 아니라 책과 사람이 그달 그날 어떻게 어우러지는가를 보여주는가?' '사람들이 한 달이나 두 달 내내 내 사진 한 가지만 보면서도 마음이 넉넉하거나 흐뭇하거나 즐거울 수 있게끔 다리품을 팔고 온힘을 다했는가?'
다른 이가 이룬 열매를 살피면서 미주알고주알 따지기란 얼마나 쉬운가 하고 새삼 깨닫습니다. 나 스스로 어떤 열매 하나를 이루자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겹게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거듭 느낍니다. 그동안 주제넘는 소리를 많이 지껄이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앞으로는 내 이야기가 내 속마음을 참다이 담아내는 틀거리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싱그러움까지 알차게 담아내는 틀거리를 이루지 못한다면 도로묵이 되겠다고 느낍니다.
가늘게 한숨을 쉬면서 달력을 덮습니다. 한 권 두 권 고른 책을 가슴에 안고 셈대로 갑니다. 책값을 셈하고,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가방에 안 들어가는 책은 끈으로 묶어 한손으로 듭니다. 〈글벗서점〉 아주머니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책방 문을 나섭니다.
오늘 하루 헌책방마실을 안 했으면 내 사진눈이나 책눈은 어느 자리에서 떠돌거나 맴돌았을까 생각합니다. 책꾸러미가 꽤 묵직하다고 느끼면서, 이 묵직함을 내 몸이며 마음이 얼마나 잘 삭이고 있었는가를 곱씹습니다.
'부끄럽다면 더 읽자. 창피하다면 더 찍자. 남우세스럽다면 더 갈고닦자. 들 만한 얼굴이 없다면 더 글을 쓰고 더 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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