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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재, 인천 살면서 인천이씨도 몰랐네

옛멋 그대로 팔작지붕 멋스런 원인재(源仁齋)

등록|2009.05.10 18:01 수정|2009.05.10 18:01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와, 인천 서구도서관과 중앙도서관(인천시청 옆)을 경유해 송도신도시내 갯벌타워로 달려가던 길이었습니다. 문학경기장을 지나 인천지하철역과 연결된 도로를 따라 내달리다, 원인재역에 가까워졌을 때 대로변에 커다란 한옥집이 눈에 띄였습니다.

▲ 자전거를 타고 연수동을 지나칠 때 본 원인재 ⓒ 이장연


이미 오후1시 갯벌타워 앞에서 예정된 멸종위기종 저어새 보호대책과 송도갯벌 매립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 늦어 힘차게 페달을 밟아야 했기에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대신 기자회견 취재를 마치고 저어새가 번식하고 있다는 남동유수지를 둘러보고 되돌아가는 길에 옛멋이 물씬 풍긴 그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뜨거운 오후의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쬐던 그곳은 알고보니 원인재(源仁齋)란 곳이었습니다. 1990년 11월 인천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원인재는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의 묘려(묘 앞에 세운 건물)라고 하더군요. 중시조란 이름이 별로 없던 성(姓)씨를 가진 집안을 일으켜 세운 선조를 말합니다.

▲ 멋스런 한옥집을 둘러봤다. ⓒ 이장연


▲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 이장연


<고려사>에 보면 신라 때부터 지금의 인천인 소성현에 살았다는 그의 선조는 신라 사신으로 중국 당나라에 갔다가 천자로부터 성을 받았다 합니다. 또한 이허겸은 고려시대 외척 세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로, 이자연은 세 딸을 고려 문종의 비로 혼인시켜 세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세를 잡을 수 있었던게, 바로 이허겸의 묘가 연화부수지의 명당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합니다. 원인재는 원래 연수구 연수동 적십자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신지마을에 있었으나, 택지개발로 해체되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묘역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되었습니다.

▲ 팔짝지붕과 처마가 눈에 띄였다. ⓒ 이장연


▲ 팔작지붕 ⓒ 이장연


▲ 오랜만에 이런 처마를 본다. ⓒ 이장연


참새가 날아와 짹짹거리는 멋스런 팔작지붕을 한 원인재는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32세손이 쓴 <원인재기>와 33손이 쓴 원인재상량문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807년이나 1835년인 것으로 보인다 합니다. 묘려의 명칭을 원인재라 함은 인천(인주) 이씨 각 파의 근원이기 때문이고요.

이전에 찾아봤던 부평향교와는 사뭇 다른 원인재의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아 전합니다.

▲ 원인재 ⓒ 이장연


▲ 넓은 안뜰에 건물이 ㅁ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 이장연


▲ 원인재는 인천이씨의 시조를 모신 묘려를 말한다. ⓒ 이장연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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