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란 사랑과 감사의 대외적 증표입니다. 누군가와 나눈 짙은 웃음과 눈물의 결정체 같은 것이지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기쁨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실 주는 것이 받는 것만 할까요? 하지만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두려워진 요즘의 세상 형편입니다. 더 큰 대가를 바라는 선물이거나, 자신을 발탁해달라는 불공평과 차별을 기대하고 부추기는 선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금력과는 거리가 멀고, 어떤 힘이 파생될 수 있는 사회적 직위와도 관계없는 제게 어떤 반대급부를 기대하고 선물을 할 이는 전무하겠지만 갖추어야할 형식에 서툰 제게 선물을 주고받는 일 또한 판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제게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잊을 수 없는 선물이 적지 않습니다. 진정한 선물은 건네진 유형의 물건이 효능을 다하고도 받은 이의 가슴에 아름답게 남아있는 기억일 것입니다. 그중 몇 개의 기억을 들추어봅니다.
#1
서로 가족과도 격의 없는 교류를 나누는 타우는 모티프원을 지나칠 때 종종 유기농 빵과 김밥을 사오곤 합니다. 그것을 사양할 수는 없는 것은 그 빵을 가운데 두고 함께 나누며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타우의 빵과 김밥은 대면과 대화를 원하는, 소박하게 에두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국적 기업의 대표이기도 한 타우는 재작년 제게 참 솔깃한 제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모티프원을 좋아하게 된 그는 몇 번 모티프원을 오가면서 제가 하루에도 많은 시간을 청소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알고 제안을 했습니다.
"모티프원의 청소에 선생님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탈피할 수 있다면 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더 많은 선생님의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 모티프원은 주중에는 게스트분들이 적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넘치는 형편입니다. 주말과 주중에는 기존처럼 일반 게스트분들을 예약 받으시고 주중의 모든 공간들은 저와 저희 회사의 임원 및 저의 지인 15명 정도가 회원이 되어 교대로 모티프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주중에도 일반인의 예약이 있는 날은 그 분들께 공간을 양보하겠습니다. 그러면 모티프원은 365일 단 하루도 공실이 없게 되고 선생님은 보다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므로 선생님을 대신할 한 분을 고용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요일별 도표를 그려서 제게 진지하게 펼쳐보인 열흘 뒤 타우는 실제로 회사의 간부직원과 함께 일하시는 국제변호사, 회계사분들을 모시고 모티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모티프원 멤버십 가입에 서명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타우가 제게 좀 더 자유로운 시간을 허락하기위해 계획한 이 일이 제게 얼마나 큰 유혹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어떤 시간도 자유로울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므로 매달 돌아오는 은행이자의 납입금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타우와 그 친구들의 한없이 고마운 배려를 마음으로만 받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던 터였습니다.
우선은 그 멤버십 약정이 불평등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입니다. 또한 그 멤버십 약정에 서명한 분들 중에 일부는 타우와의 우의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하는 분도 계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평일에 한 달에 두어 번씩 모티프원을 이용한다는 이 약정이 이분들의 간절한 필요에 따른 것이라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일반인의 예약이 없을 경우에 이용한다는 약정이니 말입니다.
이 멤버쉽 운용계획은 결국 나중에 타우를 곤란하게 하고 그 멤버십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일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도 타우의 이 계획을 수용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저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케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날 모티프원의 서재에서 일행들과 차를 한잔씩 나누어 마시는 것으로 타우의 매혹적인 모티프원 멤버십 운용안을 백지로 돌렸습니다.
그 후 이태가 지난 지금, 저는 타우가 사오는 김밥과 빵은 물론, 모티프원의 무선네트워크를 손보아주고 제가 찍는 사진의 안전한 저장을 위해 스토리지를 구축해주는 타우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들조차 거절한다면 타우는 이태전 제의했던 '모티프원에 공실이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도록 하겠다'는 엄청난 유혹 보따리를 다시 들고와 저의 인내를 또다시 시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대전의 윤성중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한 박스의 책 선물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종 온가족이 오셔서 모티프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시던 윤선생님께서는 요 몇 달 동안 바쁜 나머지 모티프원에 오실 수 없는 마음을 책 선물로 대신했습니다.
"그리움의 마음을 조금 덜고자 오늘 하룻밤의 숙박을 예약합니다. 오늘 하루도 현실을 핑계로 몸은 대전에 있을 예정입니다. 대신 하룻밤 숙박비만큼의 책을 구입하여 헤이리로 보내오니, 잘 보살펴 주세요"란 글과 함께 보내주신 책이었습니다.
"'모티프원'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았다는 말씀만으로 저는 천금을 얻은 것 보다 더 행복한 마음입니다. 지난 밤, 모티프원에서 윤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석진이와 함께했던 상상의 하룻밤, 무엇보다도 제 인생을 통틀어 큰 감동이고 잊힐 수 없는 추억이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드렸습니다.
윤선생님께서는 다시 낭만적인 답변을 주셨습니다.
"작은 선물을 큰 감동으로 받아 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감동입니다! 선생님의 배려 덕에 모티프원에서 하룻밤 예약을 멋지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3
춘천에서 한국놀이문화연구소를 꾸리고 계신 김문식소장님의 선물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태 전 저와 첫 대면 이후에 돌아가셔서 제게 간단한 소개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단어를 저에게 던져주셔서 다시 길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저 나름대로 많이 해보았습니다. 아직 하고픈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술을 좋아 하긴 하지만 술에 취하여 스스로의 판단을 할 수 없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전정신이 있다고 생각지는 못하고 살아 왔는데, 그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오가피주를 좋아하신다면 신선하게 담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자는 시간보다 깨어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나 술 취해 있는 시간보다 맑은 정신을 더 좋아하고,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 짧은 소개만으로도 저의 마음이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을 만난 것처럼 빠져버린 분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한 박스의 정체불명의 택배를 받았습니다. 보내준 편지를 보고서야 그 물건의 쓰임과 보낸 의미를 알았습니다.
"지난번 모티프원에 갔었을 때 현관의 타일부분이 눈이나 비가 올 경우 많이 미끄러워보였습니다. 보내드린 제품의 양면테이프를 떼어내시고 부착면의 먼지와 물기를 제거하고 붙이시면 좋을 것 같아 보내드립니다. 색상이나 모양이 마음에 드시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활용할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이 미끄럼 방지용 고무엠보싱제품은 제가 기증 의뢰를 받은 것으로 처음 개발하여 제작하신분이 운영난으로 폐업을 하시면서 복지시설이나 기관에 기증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자제분이 장애가 좀 있으시거든요. 자신이 스스로 봉사 활동할 여력이 없으시다하여 제가 인수해서 작년 한 해 동안 영아원과 양로시설에 나누어드리고 좀 남아 있었거든요. 혼자서 전국의 많은 곳을 다니지 못하여 제가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봉사활동은 진정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더 많이 하고 계시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허락 없이 보내드립니다'라는 김문식 선생님의 글에서 저는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귀하게 여기는 그 시간들을 남을 위해 할애하는 인품과 '도움을 필요로 하신 분들이 되레 봉사에 더 적극적'이더라는 봉사과정에서 느낀 체험적인 글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제가 받은 그 미끄럼방지용고무패드를 저도 일부사용하고, 헤이리의 장애가 있는 댁에 원하는 만큼 드리고도 남아 아름다운가게에 다시 기증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김선생님께서 '허락 없이' 보내주신 그 선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4
작년 여름이 막 끝나갈 때의 일입니다. 처와 함께 홋가이도의 오타루와 사포르 인근의 캠프장을 둘러보는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위해 신치도세공항에서 항공기를 탑승했습니다. 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은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한 스튜어디스가 제 좌석으로 다가와 다소곳하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모티프원의 이안수선생님이시지요?"
저는 낯선 곳에서 제 이름까지 기억하는 아리따운 승무원의 인사를 받고 보니 적잖게 당황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의 뇌는 자동적으로 옆에 앉아있는 처에게 오해받을 만한 어떤 여자와의 과거가 있었던가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승무원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도 저의 기억으로는 도무지 인연을 기억해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 몇 초간 이어졌습니다. 그 사정을 눈치 챈 그 분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작년, 저는 4명의 친구들과 모티프원을 방문했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제가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저희 회사의 승무원 유니폼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때서야 그 기억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모티프원을 방문한 네 숙녀들과 잠시간의 수다 중에 한 사람이 제가 간혹 이용하는 항공사의 스튜어디스임을 알게 되었고 저는 무심코 그 회사의 유니폼에 대해 평소에 느꼈던 제 생각을 얘기했던 터였습니다.
"승무원 복장은 승객에게 뽐내려고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 디자인은 승객의 입장에서는 너무 도도하고 서비스에 치중해야하는 승무원의 입장에서는 너무 불편할 듯합니다. 스카프는 너무 길고 비녀 핀은 너무 두드러집니다. 재킷과 스커트는 비행시간 내내 격무를 견드야 하는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승무원은 모델이 아닌 만큼 맵시와 아울러 편의성이 고려되어야합니다."
자부심으로 입었을 그 유니폼에 대해 제가 느꼈던 생각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말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당사자의 입장을 생각지 못한 경솔한 처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가 말을 마친 뒤였습니다.
"사실 좀 불편하긴 해요. 하지만 워낙 유명한 지안 프랑코 페레의 디자인이라……."
그녀가 한 대답은 방어에 비중이 실린 소극적인 한마디였습니다.
"편안한 여행하세요.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인천까지의 두 시간 남짓한 짧은 비행 후 착륙이 임박할 때였습니다. 그녀가 다시 다가와 항공기의 큰 면세품 쇼핑백을 내밀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다른 섹터의 담당이라 선생님을 각별하게 직접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항공기를 탑승해주신 것과 이렇게 다시 대면한 기쁨에 대한 작은 선물입니다. 기내라 특별히 준비 된 게 없습니다."
그녀가 내민 봉투 속에는 작은 모형항공기와 여러 개의 볶음고추장 튜브 그리고 맥주가 서비스될 때 함께 나오는 비스킷과 가공땅콩봉지들이 소복이 담겨있었습니다.
여태 그 고추장튜브와 작은 땅콩봉지가 잊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녀가 항공기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었고, 그것으로 저는 그녀가 제게 베풀고자하는 정성의 크기와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대한항공의 염유정 승무원입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자랑삼으면서 모형비행기는 그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지인의 자녀에게 선물하고 볶음고추장은 저의 자랑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분들께 두세 개씩 선물했습니다.
#5
봄이 한창일 때 박돈서 교수님과 함께 자하재의 중정에서 농염함을 뽐내고 있는 모란의 자태를 함께 즐긴 다음 거실에서의 유쾌한 대화를 뒤로 하고 막 일어서려고 할 때였습니다.
"술을 좀 하는가요?"
느닷없는 교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때에는 좀…. "
"요즘 나는 의사가 삼가라는 것이 많아졌어요. 고기도 먹지마라하고 술도 멀리하라고 하네요. 의사가 하라는 대로 다하면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 집사람 몰래 이것저것 다 먹어요. 하지만 집사람 몰래 술을 먹을 수는 없어요. 내게 좋은 술 한 병이 있는데 가져가서 먹어요."
그제야 왜 교수님이 제게 술 얘기를 꺼내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저는 '좋은 사람과 함께'라야 술을 마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술을 가져다가 저 홀로 마신다면 취하는 것 외에 무슨 낙이겠습니까? 이곳에 두고 교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마시겠습니다."
교수님은 어쩔 수 없이 내밀었던 술병을 거두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술 먹는 자리에는 단 둘이보다 한 두 사람 더 있으면 좋을 테니, 누구랑 함께 마실까?"
"그것은 교수님의 숙제입니다. 교수님께서 초대하시는 누구와도 좋습니다."
저는 그 술을 들고 오는 대신, 그 선물을 두고 옴으로서 교수님과 즐거운 수다를 즐길 또 한 번의 빌미를 얻게 된 것입니다. 박돈서 교수님은 아주대 부총장과 한국색채학회 회장, 거제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아주대 건축학부 명예교수로 계신 76세의 박찬욱 감독 아버지입니다.
#5
어제 또 하나의 감동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체국 택배로 보내온 참기름이었습니다. 일전에 제 신문 글에 댓글을 달았던 공주의 이동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2년 전, 보건복지부(지금은 보건복지가족부로 바뀌었습니다만) 세미나 때 선생님과 밤샘 토론했던 공주사람입니다. 지난 8월경에 가족들을 인솔하고 또 한 차례 방문하였었는데 선생님께서 유럽여행중이어서 뵙지를 못했습니다. 조만간에 찾아뵈어 그 때 미처 드리지 못했던 저의 이야기며,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공주에서 환경문제를 말로서가 아닌, 몸으로 실천하고 계신 이 분은 직접 농사지은 참깨를 짜서 500ml페트병에 공기 한 방울의 틈도 없이 가득 담아 보내주셨습니다. 단지 저와 하룻밤 얘기하고 제가 간혹 송고하는 신문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의 인연인 이 선생님이 참기름을 보냄으로서 제게 기대하는 것도 이 선생님을 위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전무합니다. 이 선생님은 단지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동은 선생님께서 지난 여름 밭에서 흘린 땀의 결정체인 이 참기름 병을 받고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선물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이렇듯 정성스러운 마음을 보내는 선물은 들길에서 듬성듬성 핀 소담한 야생화를 보는 것처럼 오늘을 사는 허허로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일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기쁨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기실 주는 것이 받는 것만 할까요? 하지만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 두려워진 요즘의 세상 형편입니다. 더 큰 대가를 바라는 선물이거나, 자신을 발탁해달라는 불공평과 차별을 기대하고 부추기는 선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켜보면 제게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잊을 수 없는 선물이 적지 않습니다. 진정한 선물은 건네진 유형의 물건이 효능을 다하고도 받은 이의 가슴에 아름답게 남아있는 기억일 것입니다. 그중 몇 개의 기억을 들추어봅니다.
▲ 모티프원 정원에서의 멧비둘기. 이들의 사랑처럼 진정한 선물은 나눔의 증표입니다. ⓒ 이안수
#1
서로 가족과도 격의 없는 교류를 나누는 타우는 모티프원을 지나칠 때 종종 유기농 빵과 김밥을 사오곤 합니다. 그것을 사양할 수는 없는 것은 그 빵을 가운데 두고 함께 나누며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타우의 빵과 김밥은 대면과 대화를 원하는, 소박하게 에두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국적 기업의 대표이기도 한 타우는 재작년 제게 참 솔깃한 제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모티프원을 좋아하게 된 그는 몇 번 모티프원을 오가면서 제가 하루에도 많은 시간을 청소에 할애할 수밖에 없는 처지를 알고 제안을 했습니다.
"모티프원의 청소에 선생님이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탈피할 수 있다면 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고, 더 많은 선생님의 얘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현재 모티프원은 주중에는 게스트분들이 적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넘치는 형편입니다. 주말과 주중에는 기존처럼 일반 게스트분들을 예약 받으시고 주중의 모든 공간들은 저와 저희 회사의 임원 및 저의 지인 15명 정도가 회원이 되어 교대로 모티프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주중에도 일반인의 예약이 있는 날은 그 분들께 공간을 양보하겠습니다. 그러면 모티프원은 365일 단 하루도 공실이 없게 되고 선생님은 보다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므로 선생님을 대신할 한 분을 고용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요일별 도표를 그려서 제게 진지하게 펼쳐보인 열흘 뒤 타우는 실제로 회사의 간부직원과 함께 일하시는 국제변호사, 회계사분들을 모시고 모티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모티프원 멤버십 가입에 서명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타우가 제게 좀 더 자유로운 시간을 허락하기위해 계획한 이 일이 제게 얼마나 큰 유혹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어떤 시간도 자유로울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므로 매달 돌아오는 은행이자의 납입금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타우와 그 친구들의 한없이 고마운 배려를 마음으로만 받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던 터였습니다.
우선은 그 멤버십 약정이 불평등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저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입니다. 또한 그 멤버십 약정에 서명한 분들 중에 일부는 타우와의 우의에 어쩔 수 없이 서명하는 분도 계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평일에 한 달에 두어 번씩 모티프원을 이용한다는 이 약정이 이분들의 간절한 필요에 따른 것이라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일반인의 예약이 없을 경우에 이용한다는 약정이니 말입니다.
이 멤버쉽 운용계획은 결국 나중에 타우를 곤란하게 하고 그 멤버십 구성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일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도 타우의 이 계획을 수용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저의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케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날 모티프원의 서재에서 일행들과 차를 한잔씩 나누어 마시는 것으로 타우의 매혹적인 모티프원 멤버십 운용안을 백지로 돌렸습니다.
그 후 이태가 지난 지금, 저는 타우가 사오는 김밥과 빵은 물론, 모티프원의 무선네트워크를 손보아주고 제가 찍는 사진의 안전한 저장을 위해 스토리지를 구축해주는 타우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들조차 거절한다면 타우는 이태전 제의했던 '모티프원에 공실이 있는 날이 단 하루도 없도록 하겠다'는 엄청난 유혹 보따리를 다시 들고와 저의 인내를 또다시 시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 모티프원에서의 타우 ⓒ 이안수
#2
대전의 윤성중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한 박스의 책 선물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종종 온가족이 오셔서 모티프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시던 윤선생님께서는 요 몇 달 동안 바쁜 나머지 모티프원에 오실 수 없는 마음을 책 선물로 대신했습니다.
"그리움의 마음을 조금 덜고자 오늘 하룻밤의 숙박을 예약합니다. 오늘 하루도 현실을 핑계로 몸은 대전에 있을 예정입니다. 대신 하룻밤 숙박비만큼의 책을 구입하여 헤이리로 보내오니, 잘 보살펴 주세요"란 글과 함께 보내주신 책이었습니다.
"'모티프원'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았다는 말씀만으로 저는 천금을 얻은 것 보다 더 행복한 마음입니다. 지난 밤, 모티프원에서 윤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석진이와 함께했던 상상의 하룻밤, 무엇보다도 제 인생을 통틀어 큰 감동이고 잊힐 수 없는 추억이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드렸습니다.
윤선생님께서는 다시 낭만적인 답변을 주셨습니다.
"작은 선물을 큰 감동으로 받아 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감동입니다! 선생님의 배려 덕에 모티프원에서 하룻밤 예약을 멋지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모티프원에서의 윤성중선생님 가족. 정국국가대표선수셨던 천선숙사모님과 지금은 축구에 빠져지내는 외아들 석진이. ⓒ 이안수
#3
춘천에서 한국놀이문화연구소를 꾸리고 계신 김문식소장님의 선물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태 전 저와 첫 대면 이후에 돌아가셔서 제게 간단한 소개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단어를 저에게 던져주셔서 다시 길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저 나름대로 많이 해보았습니다. 아직 하고픈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술을 좋아 하긴 하지만 술에 취하여 스스로의 판단을 할 수 없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전정신이 있다고 생각지는 못하고 살아 왔는데, 그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오가피주를 좋아하신다면 신선하게 담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자는 시간보다 깨어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나 술 취해 있는 시간보다 맑은 정신을 더 좋아하고,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 짧은 소개만으로도 저의 마음이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을 만난 것처럼 빠져버린 분입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한 박스의 정체불명의 택배를 받았습니다. 보내준 편지를 보고서야 그 물건의 쓰임과 보낸 의미를 알았습니다.
"지난번 모티프원에 갔었을 때 현관의 타일부분이 눈이나 비가 올 경우 많이 미끄러워보였습니다. 보내드린 제품의 양면테이프를 떼어내시고 부착면의 먼지와 물기를 제거하고 붙이시면 좋을 것 같아 보내드립니다. 색상이나 모양이 마음에 드시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꼭 그곳이 아니더라도 활용할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이 미끄럼 방지용 고무엠보싱제품은 제가 기증 의뢰를 받은 것으로 처음 개발하여 제작하신분이 운영난으로 폐업을 하시면서 복지시설이나 기관에 기증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자제분이 장애가 좀 있으시거든요. 자신이 스스로 봉사 활동할 여력이 없으시다하여 제가 인수해서 작년 한 해 동안 영아원과 양로시설에 나누어드리고 좀 남아 있었거든요. 혼자서 전국의 많은 곳을 다니지 못하여 제가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봉사활동은 진정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더 많이 하고 계시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허락 없이 보내드립니다'라는 김문식 선생님의 글에서 저는 잠자는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귀하게 여기는 그 시간들을 남을 위해 할애하는 인품과 '도움을 필요로 하신 분들이 되레 봉사에 더 적극적'이더라는 봉사과정에서 느낀 체험적인 글이 심금을 울렸습니다.
제가 받은 그 미끄럼방지용고무패드를 저도 일부사용하고, 헤이리의 장애가 있는 댁에 원하는 만큼 드리고도 남아 아름다운가게에 다시 기증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김선생님께서 '허락 없이' 보내주신 그 선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 저와 함께 잠시 갤러리 나들이를 나온 춘천의 한국놀이문화연구소의 김문식소장님 ⓒ 이안수
#4
작년 여름이 막 끝나갈 때의 일입니다. 처와 함께 홋가이도의 오타루와 사포르 인근의 캠프장을 둘러보는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기위해 신치도세공항에서 항공기를 탑승했습니다. 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은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한 스튜어디스가 제 좌석으로 다가와 다소곳하게 허리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모티프원의 이안수선생님이시지요?"
저는 낯선 곳에서 제 이름까지 기억하는 아리따운 승무원의 인사를 받고 보니 적잖게 당황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의 뇌는 자동적으로 옆에 앉아있는 처에게 오해받을 만한 어떤 여자와의 과거가 있었던가를 검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승무원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도 저의 기억으로는 도무지 인연을 기억해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 몇 초간 이어졌습니다. 그 사정을 눈치 챈 그 분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작년, 저는 4명의 친구들과 모티프원을 방문했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제가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저희 회사의 승무원 유니폼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때서야 그 기억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모티프원을 방문한 네 숙녀들과 잠시간의 수다 중에 한 사람이 제가 간혹 이용하는 항공사의 스튜어디스임을 알게 되었고 저는 무심코 그 회사의 유니폼에 대해 평소에 느꼈던 제 생각을 얘기했던 터였습니다.
"승무원 복장은 승객에게 뽐내려고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 디자인은 승객의 입장에서는 너무 도도하고 서비스에 치중해야하는 승무원의 입장에서는 너무 불편할 듯합니다. 스카프는 너무 길고 비녀 핀은 너무 두드러집니다. 재킷과 스커트는 비행시간 내내 격무를 견드야 하는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승무원은 모델이 아닌 만큼 맵시와 아울러 편의성이 고려되어야합니다."
자부심으로 입었을 그 유니폼에 대해 제가 느꼈던 생각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말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당사자의 입장을 생각지 못한 경솔한 처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가 말을 마친 뒤였습니다.
"사실 좀 불편하긴 해요. 하지만 워낙 유명한 지안 프랑코 페레의 디자인이라……."
그녀가 한 대답은 방어에 비중이 실린 소극적인 한마디였습니다.
"편안한 여행하세요. 다시 뵙겠습니다."
그리고 인천까지의 두 시간 남짓한 짧은 비행 후 착륙이 임박할 때였습니다. 그녀가 다시 다가와 항공기의 큰 면세품 쇼핑백을 내밀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다른 섹터의 담당이라 선생님을 각별하게 직접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 항공기를 탑승해주신 것과 이렇게 다시 대면한 기쁨에 대한 작은 선물입니다. 기내라 특별히 준비 된 게 없습니다."
그녀가 내민 봉투 속에는 작은 모형항공기와 여러 개의 볶음고추장 튜브 그리고 맥주가 서비스될 때 함께 나오는 비스킷과 가공땅콩봉지들이 소복이 담겨있었습니다.
여태 그 고추장튜브와 작은 땅콩봉지가 잊히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녀가 항공기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었고, 그것으로 저는 그녀가 제게 베풀고자하는 정성의 크기와 간절함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대한항공의 염유정 승무원입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자랑삼으면서 모형비행기는 그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지인의 자녀에게 선물하고 볶음고추장은 저의 자랑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분들께 두세 개씩 선물했습니다.
▲ 지안 프랑코 페레가 디자인한 대한항공 승무원들의 유니폼 ⓒ 이안수
#5
봄이 한창일 때 박돈서 교수님과 함께 자하재의 중정에서 농염함을 뽐내고 있는 모란의 자태를 함께 즐긴 다음 거실에서의 유쾌한 대화를 뒤로 하고 막 일어서려고 할 때였습니다.
"술을 좀 하는가요?"
느닷없는 교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때에는 좀…. "
"요즘 나는 의사가 삼가라는 것이 많아졌어요. 고기도 먹지마라하고 술도 멀리하라고 하네요. 의사가 하라는 대로 다하면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 집사람 몰래 이것저것 다 먹어요. 하지만 집사람 몰래 술을 먹을 수는 없어요. 내게 좋은 술 한 병이 있는데 가져가서 먹어요."
그제야 왜 교수님이 제게 술 얘기를 꺼내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저는 '좋은 사람과 함께'라야 술을 마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술을 가져다가 저 홀로 마신다면 취하는 것 외에 무슨 낙이겠습니까? 이곳에 두고 교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마시겠습니다."
교수님은 어쩔 수 없이 내밀었던 술병을 거두시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술 먹는 자리에는 단 둘이보다 한 두 사람 더 있으면 좋을 테니, 누구랑 함께 마실까?"
"그것은 교수님의 숙제입니다. 교수님께서 초대하시는 누구와도 좋습니다."
저는 그 술을 들고 오는 대신, 그 선물을 두고 옴으로서 교수님과 즐거운 수다를 즐길 또 한 번의 빌미를 얻게 된 것입니다. 박돈서 교수님은 아주대 부총장과 한국색채학회 회장, 거제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아주대 건축학부 명예교수로 계신 76세의 박찬욱 감독 아버지입니다.
▲ 자하재에서의 박돈서교수님. 교수님께서 내놓으신 고창산 복분자 와인 ‘미주 옹(瓮)’ . 40년 주류전문가인 국제주류품평회(IWSC)의 판정관인 김철환님이 3년간 연구개발한 복분자 와인입니다. ⓒ 이안수
#5
어제 또 하나의 감동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체국 택배로 보내온 참기름이었습니다. 일전에 제 신문 글에 댓글을 달았던 공주의 이동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2년 전, 보건복지부(지금은 보건복지가족부로 바뀌었습니다만) 세미나 때 선생님과 밤샘 토론했던 공주사람입니다. 지난 8월경에 가족들을 인솔하고 또 한 차례 방문하였었는데 선생님께서 유럽여행중이어서 뵙지를 못했습니다. 조만간에 찾아뵈어 그 때 미처 드리지 못했던 저의 이야기며,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공주에서 환경문제를 말로서가 아닌, 몸으로 실천하고 계신 이 분은 직접 농사지은 참깨를 짜서 500ml페트병에 공기 한 방울의 틈도 없이 가득 담아 보내주셨습니다. 단지 저와 하룻밤 얘기하고 제가 간혹 송고하는 신문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의 인연인 이 선생님이 참기름을 보냄으로서 제게 기대하는 것도 이 선생님을 위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전무합니다. 이 선생님은 단지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 공주의 이동은선생님께서 여물게 포장하여 우체국 택배로 보내주신 참기름 ⓒ 이안수
저는 이동은 선생님께서 지난 여름 밭에서 흘린 땀의 결정체인 이 참기름 병을 받고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선물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이렇듯 정성스러운 마음을 보내는 선물은 들길에서 듬성듬성 핀 소담한 야생화를 보는 것처럼 오늘을 사는 허허로운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motif1.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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