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알고 있다구!"
[미국문화읽기 19] 미국인들이 던지는 '기이한' 질문들
인사는 세계 어디나 존재하는 보편적 관습이다. 인사교환의 형식과 내용은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말이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서로 코를 비비거나 혀를 내미는 곳도 있으며, 손바닥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상대방 발에 침 뱉는 시늉을 하는 곳도 있다.
인사말 역시 '신'이나 '평화' 등 추상적인 언어에서 밥을 먹었는지 묻는 구체적인 질문까지 다양하다. 문화권마다 다른 것은 인사의 형식과 내용만이 아니다. 인사의 '유통기한'에도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의 효력은 하루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보통 아침에 인사를 한 사람에게는 헤어질 때 '안녕히 가세요'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같은 인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만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사람에게 매번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예의가 바르네'라기보다는 '쟤, 왜 저래?'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인사의 유통기한
미국인들이 쓰는 인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의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가장 흔한 표현으로는 '하우 아 유(How are you)?'와 '하우 아 유 두잉(How are you doing)?'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빌이라는 대학원 친구를 바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기다렸다. 얼마 후 그 친구가 문을 밀고 들어섰다.
"헤이! 하우 아 유 두잉(Hey! How are you doing)?"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대답은 '파블로프의 개' 수준의 조건반사에 가깝다.
"파인, 앤드 유(Fine, and you)?"
그 친구는 '잘 지낸다'고 답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맥주잔이 탁자에 놓여 있는 것을 본 그는 '나도 한 잔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카운터로 갔다. 잠시 후 빌은 김이 허옇게 서린 차가운 맥주잔을 들고 왔다. 의자를 빼고 앉으며 그는 다시 물었다.
"하우 아 유 두잉?"
3분 만에 또 안녕하냐고?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가장 자신 있는 영어표현에 대한 확신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길을 걷던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이 눈 위를 걷다 미끄러져 길바닥에 넘어졌다. 뒤를 따라 오던 행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으세요(Are you OK)?"
본능이 답한다.
"파인, 땡큐. 앤드 유(Fine, thank you. And you)?"
3분 만에 다시 '안녕하냐?'고 묻고 빤히 얼굴을 쳐다보는 미국인 친구. 생각이 복잡해진다. 혹시 아까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일까? 친구는 다시 묻는다.
"하우 아 유 두잉?"
"파인… 앤드 유?"
미국인들은 자주 이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반복되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정서가 담겨 있다. 하나는 상대에 대한 지속적 배려를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잠시 헤어졌다 만난 사람과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한 분위기 환기 장치이기도 하다. 상대의 기분을 자주 확인하는 것은 미국인 특유의 다정함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침묵에 대한 어색함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기묘한 불안감도 함께 녹아 있다.
미국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조차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인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복도 같은 곳에서 서로 지나쳐 가면서 눈썹을 이마 위로 추켜올리며 아는 척을 하거나, 장난스럽게 별명을 부르거나, '역시 자네가 최고야(You're the man)'처럼 의미 없는 말을 던지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던지는 '괴상한' 질문들
지역과 문화권, 그리고 개인에 따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영역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거칠기로 말하면 세계 어디에도 지지 않을 서울의 운전자들도 신호등에 서면 앞의 운전자가 '눈부실까 봐' 헤드라이트를 꺼주는 자상함을 보인다. 물론, 그 앞 차가 신호가 바뀐 뒤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뒤의 '천사 운전사'는 미친 듯 경적을 울려 댈 것이다.
미국 가게의 계산대에 서면 전 세계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자상한 질문을 들을 수 있다. '영수증이 필요하냐'거나 '물건을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등의 질문은 세계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 점원은 이렇게 묻는다.
"Would you want the receipt with you, or in the bag?"
(영수증을 그냥 드릴까요, 아니면 물건과 함께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이 질문을 던지는 점원 손에는 영수증이 들려 있고, 방금 돈을 낸 고객의 손이 계산대 위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고객은 이 실존적 문제로 잠시 고민한 후 답변을 내 놓는다.
"봉투에 넣어 주세요."
고객의 손 주변에 어른거리던 영수증은 다시 되돌아가 저 편 봉투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종이요? 플라스틱이요?'
이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에 처음 온 사람을 당황시키는 질문은 이것 말고도 많다. '종이, 플라스틱(paper or plastic)' 질문이 그렇다. 미국의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계산대로 가지고 가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이다.
"페이퍼 오어 플라스틱(Paper or plastic)?"
또 다른 '유학생 전설'에 따르면, 한 영리한 학생은 그 짧은 순간에 비상한 지성을 발휘해 '종이'와 '플라스틱'의 특성을 재빨리 분석하고 상황에 대입한 후 득의의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이퍼."
그러고는 '플라스틱(신용카드)' 대신 '종이(지폐)'를 내밀었다. 영어에서 '플라스틱'이라는 말이 '신용카드'라는 말로 쓰이기는 하지만, 위의 질문을 통해 점원이 묻는 것은 '종이봉투에 넣어 드릴까요, 비닐봉지에 넣어드릴까요'다.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면 이런 질문이 되돌아온다.
"룸 포 크림(Room for cream)?"
커피를 담을 때 가득 채우지 않고 크림 넣을 분량만큼을 빼고 주는 게 좋겠냐고 묻는 것이다. 자상하기도 하지. 한 미국인 친구가 자기는 늘 '아니오'라고 말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자기도 크림을 넣어서 먹지만, 빼고 달라고 하면 자신의 '크림 취향'을 과대평가해 너무 많이 비우고 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받아서 휴지통에 필요한 만큼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인사말, '아이 러브 유'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유독 많이 사용하는 말이 또 있다. '아이 러브 유(I love you)'다. 이것은 연인 사이에 고백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관계가 성취된 이후에는 '고백'보다는 일상적 인사말로 바뀐다. 굳이 해석하자면 "(아직까지는)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확인의 의미 정도 될까?
2004년 통계조사는 미국인들의 73%가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한다는 사람들은 92%가 넘었다. 그러나 결혼한 커플의 절반 가까이가 이혼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랑한다'는 말은 관계의 상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의식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이 오가지 않는 애정관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시카고 트리뷴>의 칼럼니스트인 메리 슈믹은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일본 부부로부터 받은 충격을 이렇게 기술한다.
"여럿이 모여 미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쿄에서 온 한 일본 남자가 아내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을 꺼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일본 남자의 입에서 이제 무슨 말이 흘러나올까. 혹시 찻잔에 독약을 넣어 아내를 살해했다는 이야기? 그 남자는 자신의 아내 역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놀랍게도 유쾌한 표정으로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메리 슈믹, "사랑이란…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
- <시카고 트리뷴> 2009. 2. 13
저자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랑은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일본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친구들은 내가 뭔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우겨댄다."
확인의 욕망과 타인에 대한 불안
어떤 면에서 미국은 매일이 밸런타인의 날인 셈이다. 미국인들은 유효기간이 말하는 순간에 사라지는 밸런타인 카드 '사랑해'를 열심히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사랑해'라는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나 '종이-비닐' 질문보다 대답하기 까다롭다는 것이다. 늘 이 말에 파묻혀 사는 메리 슈믹조차 이 사실을 인정한다.
"'사랑해'라는 말은 꺼져가는 모래땅에 심어놓은 장미정원 같다. 들어서 기분 좋을 수도 있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답변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나올 수도 있지만, 억지로 쥐어짜야 할 때도 있다. '사랑해'는 답장을 요구하는 초청장 같은 것이다. 답장이 둘을 모두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랑해. 어, 고마워.
사랑해. 알고 있어.
사랑해. 침묵.
'사랑해'라는 말에 대해 최소한 예우를 갖춘 대답은 '나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모두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은 뭔가 몸 달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답변하는 사람은 왠지 미적지근하다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애정에 대한 징표를 끊임없이 요구하거나 인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대의 기분을 확인하려는 욕구 뒤에는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흔히 씩 웃거나 가벼운 인사를 던지는데, 이 다정함 뒤에도 비슷한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웃음을 불안과 공포 해소를 위한 심리기제로 보았다.
애초부터 독립성과 개인의 가치를 강조해 온 사회의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일정한 불안함을 갖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꼭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다. 상대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섬세한 배려를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인사말 역시 '신'이나 '평화' 등 추상적인 언어에서 밥을 먹었는지 묻는 구체적인 질문까지 다양하다. 문화권마다 다른 것은 인사의 형식과 내용만이 아니다. 인사의 '유통기한'에도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 미국인들은 이미 한 번 인사를 한 사람에게조차 계속해서 '추가인사'를 던지는 경향이 있다. 외면을 어색하게 여기는 미국인들의 관습은 낯선 이에게 웃음이나 인사를 던지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잠깐 자리를 뜨고 돌아온 후에 '괜찮니?' 다시 라고 묻기도 한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을 표현이기도 하지만, 어색한 침묵을 깨고 다시 대화를 시작하는 윤활유 기능도 한다. ⓒ 강인규
인사의 유통기한
미국인들이 쓰는 인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국의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가장 흔한 표현으로는 '하우 아 유(How are you)?'와 '하우 아 유 두잉(How are you doing)?'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빌이라는 대학원 친구를 바에서 만나기로 한 적이 있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기다렸다. 얼마 후 그 친구가 문을 밀고 들어섰다.
"헤이! 하우 아 유 두잉(Hey! How are you doing)?"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에 대한 대답은 '파블로프의 개' 수준의 조건반사에 가깝다.
"파인, 앤드 유(Fine, and you)?"
그 친구는 '잘 지낸다'고 답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맥주잔이 탁자에 놓여 있는 것을 본 그는 '나도 한 잔 가져오겠다'고 말하며 카운터로 갔다. 잠시 후 빌은 김이 허옇게 서린 차가운 맥주잔을 들고 왔다. 의자를 빼고 앉으며 그는 다시 물었다.
"하우 아 유 두잉?"
3분 만에 또 안녕하냐고?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가장 자신 있는 영어표현에 대한 확신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유학생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길을 걷던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이 눈 위를 걷다 미끄러져 길바닥에 넘어졌다. 뒤를 따라 오던 행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으세요(Are you OK)?"
본능이 답한다.
"파인, 땡큐. 앤드 유(Fine, thank you. And you)?"
3분 만에 다시 '안녕하냐?'고 묻고 빤히 얼굴을 쳐다보는 미국인 친구. 생각이 복잡해진다. 혹시 아까 처음 만났을 때 인사를 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일까? 친구는 다시 묻는다.
"하우 아 유 두잉?"
"파인… 앤드 유?"
미국인들은 자주 이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반복되는 질문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정서가 담겨 있다. 하나는 상대에 대한 지속적 배려를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잠시 헤어졌다 만난 사람과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한 분위기 환기 장치이기도 하다. 상대의 기분을 자주 확인하는 것은 미국인 특유의 다정함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침묵에 대한 어색함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기묘한 불안감도 함께 녹아 있다.
미국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에게조차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인사'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복도 같은 곳에서 서로 지나쳐 가면서 눈썹을 이마 위로 추켜올리며 아는 척을 하거나, 장난스럽게 별명을 부르거나, '역시 자네가 최고야(You're the man)'처럼 의미 없는 말을 던지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던지는 '괴상한' 질문들
지역과 문화권, 그리고 개인에 따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영역은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다. 거칠기로 말하면 세계 어디에도 지지 않을 서울의 운전자들도 신호등에 서면 앞의 운전자가 '눈부실까 봐' 헤드라이트를 꺼주는 자상함을 보인다. 물론, 그 앞 차가 신호가 바뀐 뒤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뒤의 '천사 운전사'는 미친 듯 경적을 울려 댈 것이다.
미국 가게의 계산대에 서면 전 세계 어디서도 듣기 어려운 자상한 질문을 들을 수 있다. '영수증이 필요하냐'거나 '물건을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등의 질문은 세계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미국 점원은 이렇게 묻는다.
"Would you want the receipt with you, or in the bag?"
(영수증을 그냥 드릴까요, 아니면 물건과 함께 봉투에 담아 드릴까요?)
이 질문을 던지는 점원 손에는 영수증이 들려 있고, 방금 돈을 낸 고객의 손이 계산대 위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고객은 이 실존적 문제로 잠시 고민한 후 답변을 내 놓는다.
"봉투에 넣어 주세요."
고객의 손 주변에 어른거리던 영수증은 다시 되돌아가 저 편 봉투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 "종이요, 아니면 플라스틱이요?" 미국 상점 계산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질문은 미국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을 곧잘 당황시키곤 한다. ⓒ 강인규
'종이요? 플라스틱이요?'
이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에 처음 온 사람을 당황시키는 질문은 이것 말고도 많다. '종이, 플라스틱(paper or plastic)' 질문이 그렇다. 미국의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계산대로 가지고 가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이다.
"페이퍼 오어 플라스틱(Paper or plastic)?"
또 다른 '유학생 전설'에 따르면, 한 영리한 학생은 그 짧은 순간에 비상한 지성을 발휘해 '종이'와 '플라스틱'의 특성을 재빨리 분석하고 상황에 대입한 후 득의의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이퍼."
그러고는 '플라스틱(신용카드)' 대신 '종이(지폐)'를 내밀었다. 영어에서 '플라스틱'이라는 말이 '신용카드'라는 말로 쓰이기는 하지만, 위의 질문을 통해 점원이 묻는 것은 '종이봉투에 넣어 드릴까요, 비닐봉지에 넣어드릴까요'다.
커피숍에 가서 커피를 주문하면 이런 질문이 되돌아온다.
"룸 포 크림(Room for cream)?"
커피를 담을 때 가득 채우지 않고 크림 넣을 분량만큼을 빼고 주는 게 좋겠냐고 묻는 것이다. 자상하기도 하지. 한 미국인 친구가 자기는 늘 '아니오'라고 말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자기도 크림을 넣어서 먹지만, 빼고 달라고 하면 자신의 '크림 취향'을 과대평가해 너무 많이 비우고 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받아서 휴지통에 필요한 만큼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인사말, '아이 러브 유'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유독 많이 사용하는 말이 또 있다. '아이 러브 유(I love you)'다. 이것은 연인 사이에 고백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관계가 성취된 이후에는 '고백'보다는 일상적 인사말로 바뀐다. 굳이 해석하자면 "(아직까지는) 나는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확인의 의미 정도 될까?
2004년 통계조사는 미국인들의 73%가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한다는 사람들은 92%가 넘었다. 그러나 결혼한 커플의 절반 가까이가 이혼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랑한다'는 말은 관계의 상태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의식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 "크림 넣을 공간이 필요하세요?" 커피숍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나면 예외 없이 받게 되는 질문이다. ⓒ 강인규
"여럿이 모여 미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도쿄에서 온 한 일본 남자가 아내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을 꺼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일본 남자의 입에서 이제 무슨 말이 흘러나올까. 혹시 찻잔에 독약을 넣어 아내를 살해했다는 이야기? 그 남자는 자신의 아내 역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놀랍게도 유쾌한 표정으로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메리 슈믹, "사랑이란…사랑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
- <시카고 트리뷴> 2009. 2. 13
저자는 이렇게 말을 이어간다.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랑은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일본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친구들은 내가 뭔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우겨댄다."
확인의 욕망과 타인에 대한 불안
어떤 면에서 미국은 매일이 밸런타인의 날인 셈이다. 미국인들은 유효기간이 말하는 순간에 사라지는 밸런타인 카드 '사랑해'를 열심히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사랑해'라는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나 '종이-비닐' 질문보다 대답하기 까다롭다는 것이다. 늘 이 말에 파묻혀 사는 메리 슈믹조차 이 사실을 인정한다.
"'사랑해'라는 말은 꺼져가는 모래땅에 심어놓은 장미정원 같다. 들어서 기분 좋을 수도 있지만, 대답을 요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답변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나올 수도 있지만, 억지로 쥐어짜야 할 때도 있다. '사랑해'는 답장을 요구하는 초청장 같은 것이다. 답장이 둘을 모두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랑해. 어, 고마워.
사랑해. 알고 있어.
사랑해. 침묵.
'사랑해'라는 말에 대해 최소한 예우를 갖춘 대답은 '나도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모두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은 뭔가 몸 달아 있다는 느낌이 들고, 답변하는 사람은 왠지 미적지근하다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 밸런타인데이에 주고 받는 '밸런타인 사탕'. 73퍼센트의 미국인들이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미국 연인이나 부부, 부모와 자식들 간의 애정을 확인하는 인사말의 하나가 되었다. ⓒ 강인규
애정에 대한 징표를 끊임없이 요구하거나 인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대의 기분을 확인하려는 욕구 뒤에는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 흔히 씩 웃거나 가벼운 인사를 던지는데, 이 다정함 뒤에도 비슷한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웃음을 불안과 공포 해소를 위한 심리기제로 보았다.
애초부터 독립성과 개인의 가치를 강조해 온 사회의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일정한 불안함을 갖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꼭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다. 상대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진 사람에게는 섬세한 배려를 기대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사람의 마음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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