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버마의 저항시인, 시로 만나다
광주 망월동 고 김남주 시인 묘 앞에서 열린 어느 특별한 시 낭송회
▲ 고 김남주 시인 묘 앞에서 열린 ‘제10회 광주인권상 민 꼬 나잉 수상기념 시(詩) 낭송회’. ⓒ 이주빈
독재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통일을 노래하던 한 시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독재에 맞서 청춘을 불사르던 한 시인은 지금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다. 그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시로 만났다.
17일 오후 2시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묘지 앞. 한국과 버마에서 온 30여 명의 시인과 민주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이 모인 까닭은 '제10회 광주인권상 민 꼬 나잉 수상기념 시(詩) 낭송회'를 열기 위해서다.
한국에 긴마주가 있다면 버마엔 민 꼬 나잉이 있다
민 꼬 나잉(46·남)은 양곤대 학생회장으로 '전버마학생연맹'을 결성해 '버마의 광주항쟁'이라 불리는 '8888항쟁'을 주도한 대표적인 버마 민주운동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본명은 오 툰, 하지만 그는 1988년 '왕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의 민 꼬 나잉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시인이자 투사로 활동했다.
그는 지금 지역 65년 형을 선고받고 버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 5·18기념재단은 10회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그를 선정해 그의 버마 민주화를 향한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했다.
이번 시 낭송회는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임'(이하 버마작가모임, 회장 임동확)이 주관하고, 버마민족민주동맹(이하 NLD) 한국지부와 버마행동이 공동 주최하며 5·18기념재단, 한국작가회의, 광주전남작가회의가 후원했다.
NLD 한국지부 의장인 아웅 마잉 스웨는 축사를 통해 "버마는 지금 독재에 신음하던 예전의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라며 "버마민주화를 향한 활동이 여러 가지 탄압으로 매우 힘들지만 한국의 고 김남주 시인과 버마의 민 꼬 나잉 시인 두 분이 온몸으로 쓴 시처럼 살면서 계속 버마민주화운동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김준태 시인도 축사를 통해 "여기 고 김남주 시인의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정신이 타오르는 살아있는 실체"라면서 "김남주 시인은 인류공통의 염원인 자유와 평등, 통일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강조했다.
김 시인은 "고 김남주 시인이 광주를 넘어서, 한국을 넘어서 아시아와 세계의 표상이 되고 있듯이 감옥에 갇혀 있는 민 꼬 나잉 시인도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라며 "광주가 20년간의 좌절과 패배를 딛고 승리했듯이 버마도 언젠가 평화롭고 행복한 날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축원했다.
참가자들은 고 김남주 시인의 묘 앞에서 김남주 시인과 민 꼬 나잉 시인의 시를 낭독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영혼의 연대를 맺었다.
▲ 김준태 시인을 비롯한 한국과 버마의 시인과 활동가들은 고 김남주 시인과 민 꼬 나잉 시인의 시를 낭송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를 결의했다. ⓒ 이주빈
오월 광주와 버마, '민주주의'를 고리로 연대하다
시인 김지유는 민 꼬 나잉의 대표 시 <손>을 낭송했다.
"참으로 자애로운 자들은
이웃들을 위한
아낌없이 베푸는 손을 갖고 있지,
이웃들이 잘되기만을 바라면서.
굶주린 자들은 기꺼이 그 손을 잡지.
그 댓가로
배고픈 자들한테 바라는 건
아무 것도 없지.
한결같이 너그러운 자들은
이웃들을 위한
아낌없이 베푸는 손을 갖고 있지
오직 이웃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면서."
또 한 낭송회에서는 시인 임동확이 고 김남주를 추모하며 지은 시 '로터리 -心經44'도 낭송되었다.
"그 많은 삶의 곡선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처럼 죽어가는 순간에도 저주를 퍼부을 수 있었다니
그는 정녕 세상을 다 살았다
변명하고 용서받기에 급급한 生前의 모오든 비겁들을,
껍데기들을 새삼 확인시키기라도 하듯이
마지막까지 눈물 한 방울 대신 엄청난 육신의 고통마저 비웃고자 했으니
누가 뭐래도 그는 진정한 강자였다
너무 많은 세상의 여백이나 꽉참을 조롱하듯
영원히 정복할 수 없는 관념의 숲속마저 시퍼런 도끼날로 찍어가며
한치의 굴곡도 없는 직선의 행로를 긋고자 했으니,
별다른 회한도 없이 잘도 회전해가는 세월의 로타리 속에서,
그리고 제 명에 죽지 못한 자들의 부풀어오른 살덩이처럼 흉하게 이그러진,
출구가 없는 지난 역사의 시간 속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슬픔 덩어리 같은 한 시인의 죽음이여
그러나 곧은 것들을 죽음을 닮아 결코 퇴로가 없음을 미처 알지 못했겠구나
그게 제 스스로가 가장 먼저 상처받는 일인 줄도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겠구나"
1980년 오월 광주의 김남주와 1988년 버마 '8888항쟁'의 민 꼬 나잉. 두 시인은 생과 사를 넘어서 운명처럼 시로 연대하고 있다. 그들의 연대의 고리는 아직도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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