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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의 불길이 된 판사들의 분노 신영철을 물러나게 할 수 있을까?

서울·부산·인천·수원·의정부·울산... 오늘 판사회의 잇따라

등록|2009.05.18 09:50 수정|2009.05.18 15:50

▲ 서울남부지법 소속 단독판사 29명은 지난 14일 오후 서울 신정동 청사 중회의실에서 단독판사회의를 열고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에 대해 "명백한 재판권 침해 행위로 위법하고 부당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진은 14일 오후 서울남부지법 직원들이 청사로 들어가는 모습. ⓒ 남소연



2009년 5월 현직 대법관이 중대 위기에 몰렸다. 자리를 보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것도 외부 여론이나 특정 정치적 세력도 아닌 동료 판사들에 의해서다. 이 초유의 사태는 어디까지 번질 것인가. 

"신영철 대법관이 작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으로서 '촛불재판'에 대하여 '신속 처리·보석 자제 요청·사건 임의배당' 등의 행위를 한 것은 재판권 간섭이다. 이를 사법행정권 행사로 본 대법원의 경고조치와 신 대법관의 사과 표명은 재판독립과 사법부 신뢰를 회복하기엔 미흡하다. 법관 독립을 위한 제도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지난 주 서울중앙·남부·동부지법 등 3개 법원 단독판사회의에서 나온 결론을 모아보면 이렇다. 더 나아가 다수의 판사들은 "신 대법관의 대법관직 수행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내놓기까지 했다. '사퇴'라는 표현만 없을 뿐이지 결국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울분과 분노 토하던 판사들, 모이기 시작했다

법원공직자윤리위가 경고·주의촉구 권고라는 결론을 내린 지난 8일 당시만 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번질 것이라고는 법원에서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윤리위 결정 직후부터 판사들의 강도 높은 의견표명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13일 대법원장의 엄중경고와 신 대법관의 사과가 뒤따랐으나 침묵을 깨고 발언을 하는 판사들은 오히려 늘어났다.

일부 언론에서는 "몇몇 젊은 판사가 신 대법관을 '인터넷 재판'"(동아일보 사설)한다는 취지로 보도했으나 현재 상황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심장한 변화가 보인다. 개별적으로 울분과 분노를 토했던 판사들이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난 주부터 판사들은 판사회의를 소집하는 등 조직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미 4개 법원에서 단독판사회의가 열렸고, 이번 주에는 18일 회의가 예정된 서울가정법원과 서울서부·부산·인천·수원·의정부·울산지법 등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를 법관 내부의 보수 대 진보, 혹은 신구 세대의 갈등 양상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상황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법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양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헌법 제103조("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판사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조항이다. 그런데 신 대법관의 행위가 양심에 따라 재판할 권한을 침해했기 때문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 판사들의 정서다.    

"신대법관 행위, 법관 양심 침해... 묵과할 수 없다"

▲ 신영철 대법관. ⓒ 유성호


대전지법 김동현 판사는 "우리는 촛불집회 사건이 재판장 고유의 양심에 따라 재판되었다면 어떤 결론이 내려지든 수긍할 용의가 있고, 다른 어떤 재판장의 고유의 양심도 기꺼이 존중할 수 있다"며 "재판권이 침해되었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의견은 일선 판사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판사들이 이번 사태를 적당히 무마하는 선에서 끝낼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대다수 판사들은 "신 대법관의 거취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이미 신뢰에 금이 간 법원이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판사회의 결과와 내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밝힌 서울지역의 한 판사는 "판사들이 이 정도까지 했으면 다른 고위법관 같으면 이미 물러났을 텐데 신 대법관은 특별한 케이스"라고 평했다.

그는 "부장급 판사들도 내색은 않지만 신 대법관이 자진사퇴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판사들이 연판장을 돌리고 집단 사표를 쓰는 등 극한상황이 오기 전에 물러나는 것이 정도"라고 잘라 말했다.

이 판사는 이어 "만일 조만간 사퇴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대법관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신대법관 사퇴 없이 제도개선만으론 반발 더 커질듯

대법원 입장도 난처하기 그지없다. 이번 기회에 법관독립을 위한 제도개선 등 재발방지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에는 일선 판사들 뿐 아니라 대법원도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판사들은 법관 독립을 위한 가시적인 조치로 신 대법관 거취 문제를 앞세우고 있다.

시민단체·정치권 등 외부의 목소리라면 '정치적 공세'쯤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판사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법원장이 경고조치를 한 후 신 대법관이 사과표명을 한 마당에 대법원으로선 징계위 회부 등 다른 조치를 취하기도 어렵다.

신대법관 거취문제가 빠진 채 대법원이 제도개선 방안만을 내놓는다면(대법원은 이미 TF팀을 구성하여 장기적으로 제도개선안은 내놓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법원 내부의 반발은 불보듯 훤하다.

이런 이유에서 대법원보다는 법관 독립 수호 의지를 천명하고 나선 일선 판사들이 오히려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번 주 법관회의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판사들 요구 수위 어느 정도까지?... 이번 주가 고비

▲ 서울중앙지방법원 소속 판사들이 지난 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단독판사회의에 '촛불재판 개입' 의혹으로 엄중 경고를 받은 신영철 대법관의 공직자 윤리위원회의 결론 타당성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이번 주는 이번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고비가 될 것이다. 다음 2가지에 초점을 맞춰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첫째, 판사회의의 논의 결과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다. 서울동부지법의 경우처럼 '절대다수'가 신대법관의 대법관직 수행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계속 낼 경우 신 대법관에 대한 압박은 더욱 커질 것이다.

둘째, 판사들 사이에서 어떤 행동이 나올 것이냐다. 법원별 단독 판사회의 수준을 넘어서서 연판장이 돌거나 전국에서 조직적인 움직임이 나온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한편, 이번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지방의 한 고참 판사는 신대법관이 조만간 사퇴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사태가) 오래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판사들이 (신대법관이) 업무수행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은 상당한 수위를 보여준 것"이라며 "그런데도 신 대법관이 버티고 있는 것은 법원 내부가 아닌 '외부'의 힘을 믿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이 판사는 해법에 대해 "판사들이 판사회의 등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지금과 같은 요구를 하는 것"이라며, "지금처럼만 간다면 일선 판사들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라고 덧붙였다.

지금 법원에서는 외부가 아닌 내부 구성원에 의한 사법부의 독립과 개혁이 시작되고 있다. 그래서 전국에서 열리기 시작한 판사회의에 법원 안팎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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