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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서 난리가 나가꼬, 딴 나라 됐단다!"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생각하며

등록|2009.05.18 10:53 수정|2009.05.18 10:54
제2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어간 민주열사들과 형제·자매들의 환영이 떠오릅니다. 지금까지도 승천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 영령들 앞에 고개 숙이기도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군요.

▲ 25-26년 전 망월동 구묘역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5·18희생자 유가족으로 보였는데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접근을 못했습니다. ⓒ 조종안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5월 어느 날 경찰의 눈을 피해 망월동 묘역을 참배할 수 있었는데요. 내버려진 공동묘지처럼 음산하고 황량하더군요. 어느 해인가는 묘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는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는데요. 광주의 눈물 모두가 아주머니 표정에 담겨있는 것 같았습니다.   

5·18민주항쟁 29주년이라서 그런가요. 하늘을 덮은 솜사탕 같은 비구름을 보니까 아직도 승천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 광주 영령들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5·18 주범들은 살아서 온갖 호강 다 누리고, 추종세력들은 한 술 더 뜨는 행각을 보이고 있어 마음이 더욱 심란한가 봅니다.

지금부터 29년 전 80년 5월 말, 도청 진압작전이 끝나자 인적 없는 산골짜기에 주검 수 십구의 시체들이 소리 소문 없이 뿌려졌고, 새벽길 청소차에 실려 공동묘지 한편에 몰래몰래 만들어진 무덤 앞에는 꽃 한 송이, 소주 한 잔도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도 두개골에 총구멍이 나거나 가슴에 박힌 총탄을 간직한 채 5월의 참상을 보여주는 시체들이 발굴되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이 20대 전·후반의 꽃다운 젊은이들이었고, 주인을 찾을 때마다 유가족들의 통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에서 나온 피묻은 태극기와 멈춰버린 손목시계 등이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주인을 찾은 시체는 다행입니다. 유전자 표본만 남겨두고 무명열사가 되어 망월동에 묻힌 시체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광주의 5월은 보상으로 끝난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80년 5월 광주 소식을 집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듣고 무척 놀랐는데요. 당시를 회상해봅니다. 

군산 번화가인 영동에서 가게를 운영할 때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요. 놀러 오는 친구와 선·후배들이 많았습니다. 저 혼자라서 눈치 볼 사람도 없고 어머니 손맛이 좋아서 손님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모 은행에 다니는 친구들과 집에서 밥을 먹고 2차를 가려고 고스톱을 치고 있었습니다. 투전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배운 지 1년도 안 된 고스톱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때였습니다.    

70년대 중반에 동생이 광주에서 군대 생활을 했고, 가까운 친구도 공사를 졸업하고 광주비행장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몇 차례 다녀오긴 했지만, 그 이상 광주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습니다. 호남에서 가장 큰 도시, 사투리가 억센 도시쯤으로 알고 있었지요.

고스톱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가고 있는데 숙직이라서 자리를 함께하지 못한 친구가 허겁지겁 달려와 방문을 열더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야이 자식들아! 시방 광주서 난리가 나가꼬, 전화통화도 안 되고 딴 나라가 됐단다!"
"머여? 시방 머라고 혔냐!"

우리는 '전화통화'가 안 된다는 말에 놀라 반사적으로 되묻기는 했지만, 친구가 숙직실에서 혼자 있기가 심심하고 심통이 나니까 우리를 놀리려는 것으로 알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고스톱에 열중했습니다.

"환장허겠네. 전화가 불통이라서 돈도 송금이 안 된당게. 내 말을 못 믿겄으믄 홍 대리가 가서 광주지점으로 전화 혀보믄 알 것 아녀···."

전화가 불통이고 송금이 안 된다니. 하루면 몇 차례씩 TV뉴스에 등장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야 우리는 고개를 돌렸고, 친구의 불안한 표정에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부산허고 광주가 시끄럽다고 허드만 무슨 큰일이 났간디, 송금도 안 되고 전화 통화도 안 된다냐, 부산은?"
"응, 부산은 송금도 되고 전화도 다 되는 개벼"

우리는 각자 심정을 한마디씩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요.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3차를 가자는 사람도 없었고, 소주를 마시면서도 흥이 나기는커녕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시국이야기를 하다 일찍 헤어졌습니다. 

당시 TV와 신문은 북에서 남파한 것으로 보이는 폭도들이 대한민국 군인들과 대립하고 있다고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사건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신문과 방송만을 믿고 있던 순진한 국민은 북한을 욕하며 빨리 안정되는 날만을 기다렸지요. 

형사들과 인간적으로 가깝게 지내던 저는 그들의 입을 통해 광주 시민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시위하는 학생과 시민군에게 김밥을 말아다 주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광주 참극과 삼청교육대 등 신군부의 만행을 탓하는 경찰도 있었으니까요. 

다음날 저녁에는 79년 9월 미국에 이민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는 "TV를 보니까 전쟁이 일어난 것 같은데, 군산은 어떠냐?"라며 걱정하기에 자세한 설명과 함께 조용하다고 했더니 안심이 되는지 전화를 끊었습니다.

신군부 지휘 하에 있던 국내 언론은 보도하지 못하는 광주 상황을 미국에서는 AP, UPI 통신 등을 통해 소식을 듣는다며 삼국시대처럼 전쟁이 일어난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은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도 '5·18광주민중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김대중(DJ)은 빨갱이'라는 생각을 돌아가실 때까지 꺾지 않으셨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안타깝습니다.

이듬해 5월 광주의 추억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5·18 국립묘지는 1981년 5월 전남 화순 적벽에서 열린 사진촬영대회에 참가했다가 5월의 비극을 잊을 수 없어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어렵게 참배했고, 금남로와 충장로를 거닐면서 아스팔트를 붉게 물들였던 민주열사들의 명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높은 빌딩 여기저기에서 깨진 유리창을 발견했고,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시멘트벽도 보았습니다. 저를 안내하는 아가씨는 외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본 뒤에 작업할 것이라면서 광주의 참상을 외지인들에게 알리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라고 하더군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는데요. 공수부대원들의 대검과 군홧발에 짓밟힌 광주 영령들의 한은 책임자들의 진정한 사과만이 풀 수 있고, 망월동은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배우는 산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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