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사과 한 입 베물었을 뿐이건만
나희덕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야생사과>를 읽고
등단 20년, 여섯 번째 시집
어느덧 등단 20년을 맞은 나희덕 시인이 근래에 새 시집을 내놓았다.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나희덕 시인은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등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자한 바 있다.
이번 독자 앞에 내놓은 시집 <야생사과>는 <사라진 손바닥> 이후 5년 만에 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시집 속엔 62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집 속에 실린 시들은 이런저런 곁가지를 쳐내면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나온 시 세계에 대한 반성을 담은 시들과 앞으로 가야 할 새로운 시 세계를 모색하는 시편들로.
시집 곳곳에선 지금까지 써왔던 시 세계를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의지가 감지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월간 <현대문학> 2008년 2월호에 발표했던 시를 수록한 표제작 '야생사과'에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 시 '야생사과' 전문
야생사과란 어떤 맛을 가진 사과일까. 시집 뒤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낯선 대륙에서 처음 먹어본 이 야생사과에 대해 "과일가게나 농부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와는 아주 달랐다"라고 말한다.
그 야생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시인은 문득 "(야생사과를 준)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나를 보았던 것이다. 단지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말이다.
마치 오래 수도생활을 하던 스님이 어느 한 순간 별 것 아닌 일에서 깨침을 얻듯이. 순간적으로 '아, 나는 앞으로 이런 새로운 맛이 나는 시를 써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던 모양이다. 왜 이 시를 표제작으로 삼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만하다.
이전 시세계에 대한 반성
그렇다면 이제껏 시인이 써왔던 시는 어떤 시였을까.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었"(시 '말의 꽃' 일부)던 시들이었다.
시인은 그러한 말의 꽃에는 "어떤 새도 저 나무에 앉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바꾸어 말하면 "과일가게나 농부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였노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건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닌가 싶다. 나 같은 '새'도 시인이 쓴 시의 가지에 앉았다가 가곤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동안 나희덕 시인은 생명과 죽음, 마른 것과 젖은 것의 강렬한 대비를 보여줌으로써 시를 읽는 독자들을 곧잘 연민의 감정 속으로 끌고 가곤 했다. 때로는 상처와 고통을 따뜻하게 감싸는 과정을 통해서 삶의 무감각에 빠진 독자들을 자아 성찰로 이끌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모범답안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세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어느 시인에 못지않게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시인이지만, 은연중 '범생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탈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인은 시집 속에서 끊임없이 '범생이' 탈출을 시도한다. 시인 빠삐용이다. 자아 성찰의 감옥에서 뛰쳐나온 그는 새로운 세계와의 부단히 접촉하려고 애쓴다.
(전략)일요일 오후 양산을 쓰고 가는 여자도 강둑에서 몸을 말리는 남자도 나팔을 부는 소년도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도 처음엔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었지요 (중략) 빛은 가루가 되어 다른 빛과 몸을 섞어요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에 스며들어요 검은 개는 더 이상 검은 개가 아니에요 개의 털빛과 그 위에 내리는 빛이 만나 어룽거려요 희미해진 개와 고양이와 사람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지요(후략) _ 시 '쇠라의 점묘화' 부분
시는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인 쇠라(1859~1891)의 점묘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 처음에 그림 속에서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게 된다. 그 사람들 속엔 시인도 끼어있을 게 틀림없다. 시인이 앞으로 펼쳐 나갈 시작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변신에의 의지는 시 '누가 내 이름을'이나 '분홍신을 신고' 같은 시에서 다시 고개를 내민다.
교무실에 나란히 꽂힌 검은 출석부,/ 그 정렬된 세계에서 이름이 사라졌어요/ 결석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누가 내 이름을 지웠을까요/ 모판 위의 모처럼 가지런히 박혀 있었는데/(…)/ 교실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죠 모눈종이 위의 삶을 - 시 '누가 내 이름을' 부분
음악에 몸을 맡기자 /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 (중략)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 시 '분홍신을 신고' 부분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죠 모눈종이 위의 삶을"이라고 시인은 짐짓 독자에게 길을 묻지만 분홍신을 신고 "음악에 몸을 맡"긴 시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나는 이제 시간을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시세계에 대한 암중모색
이렇게 변화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의 바탕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난 이제껏 너무나 '범생이였다'라는 자신이 지나온 시 세계에 대한 반성이 아닐는지. 시인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다른 나를.
― '시인의 말' 중에서
그는 정말 어디든지 갈 수 있을까. 우린 아무 염려나 회의 없이 시인의 변신을 기대해도 좋은가. 그러나 변신이란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 시집 속에 든 예전 시집에 수록된 시들보다 더 길어지고 산문화된 경향이다.
자신을 너무 자유롭게 풀어놓다보니 오히려 산만해진 것인지 모른다.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이 과도기가 지나면 바로잡아 질 테니까. 어쨌든 일단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뗀 셈이다. 독자로서 앞으로 그의 변신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일이다.
시집에 수록한 2007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받았던 시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를 읽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방이 너무 좁아서"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던 아름다운 화가 이중섭의 이야기가 너무나 아름답게 형상화된 시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시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전문
* 아고라와 발가락군은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어느덧 등단 20년을 맞은 나희덕 시인이 근래에 새 시집을 내놓았다.
이번 독자 앞에 내놓은 시집 <야생사과>는 <사라진 손바닥> 이후 5년 만에 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시집 속엔 62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시집 속에 실린 시들은 이런저런 곁가지를 쳐내면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나온 시 세계에 대한 반성을 담은 시들과 앞으로 가야 할 새로운 시 세계를 모색하는 시편들로.
시집 곳곳에선 지금까지 써왔던 시 세계를 벗어나고 싶은 시인의 의지가 감지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월간 <현대문학> 2008년 2월호에 발표했던 시를 수록한 표제작 '야생사과'에서도 읽을 수 있다.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까만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 시 '야생사과' 전문
야생사과란 어떤 맛을 가진 사과일까. 시집 뒤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낯선 대륙에서 처음 먹어본 이 야생사과에 대해 "과일가게나 농부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와는 아주 달랐다"라고 말한다.
▲ 시집 표지 ⓒ 창비
그 야생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시인은 문득 "(야생사과를 준) 그들이 사라진 지평선,/ 내 등 뒤에 서 있는" 나를 보았던 것이다. 단지 "바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누군가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 물었을 뿐인데" 말이다.
마치 오래 수도생활을 하던 스님이 어느 한 순간 별 것 아닌 일에서 깨침을 얻듯이. 순간적으로 '아, 나는 앞으로 이런 새로운 맛이 나는 시를 써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던 모양이다. 왜 이 시를 표제작으로 삼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만하다.
이전 시세계에 대한 반성
그렇다면 이제껏 시인이 써왔던 시는 어떤 시였을까.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치명적으로 다치지 않고/ 허기도 없이 말의 꽃을 꺾었"(시 '말의 꽃' 일부)던 시들이었다.
시인은 그러한 말의 꽃에는 "어떤 새도 저 나무에 앉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바꾸어 말하면 "과일가게나 농부의 바구니에 담긴" 사과였노라고 고백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건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닌가 싶다. 나 같은 '새'도 시인이 쓴 시의 가지에 앉았다가 가곤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동안 나희덕 시인은 생명과 죽음, 마른 것과 젖은 것의 강렬한 대비를 보여줌으로써 시를 읽는 독자들을 곧잘 연민의 감정 속으로 끌고 가곤 했다. 때로는 상처와 고통을 따뜻하게 감싸는 과정을 통해서 삶의 무감각에 빠진 독자들을 자아 성찰로 이끌기도 했다. 어찌 보면 그것은 모범답안이 빤히 바라다보이는 세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어느 시인에 못지않게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시인이지만, 은연중 '범생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탈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시인은 시집 속에서 끊임없이 '범생이' 탈출을 시도한다. 시인 빠삐용이다. 자아 성찰의 감옥에서 뛰쳐나온 그는 새로운 세계와의 부단히 접촉하려고 애쓴다.
(전략)일요일 오후 양산을 쓰고 가는 여자도 강둑에서 몸을 말리는 남자도 나팔을 부는 소년도 의자에 기대앉은 노인도 처음엔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었지요 (중략) 빛은 가루가 되어 다른 빛과 몸을 섞어요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에 스며들어요 검은 개는 더 이상 검은 개가 아니에요 개의 털빛과 그 위에 내리는 빛이 만나 어룽거려요 희미해진 개와 고양이와 사람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지요(후략) _ 시 '쇠라의 점묘화' 부분
시는 신인상주의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인 쇠라(1859~1891)의 점묘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 처음에 그림 속에서 "완강한 선 속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햇빛 속을 한가롭게 거닐"게 된다. 그 사람들 속엔 시인도 끼어있을 게 틀림없다. 시인이 앞으로 펼쳐 나갈 시작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변신에의 의지는 시 '누가 내 이름을'이나 '분홍신을 신고' 같은 시에서 다시 고개를 내민다.
교무실에 나란히 꽂힌 검은 출석부,/ 그 정렬된 세계에서 이름이 사라졌어요/ 결석이나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누가 내 이름을 지웠을까요/ 모판 위의 모처럼 가지런히 박혀 있었는데/(…)/ 교실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죠 모눈종이 위의 삶을 - 시 '누가 내 이름을' 부분
음악에 몸을 맡기자 / 두 발이 미끄러져 시간을 벗어나기 시작했어요 / 내 안에서 풀려나온 실은 / 술술술술 문지방을 넘어 밖으로 흘러갔지요 / (중략) 당신에게도 들리나요? / 둑을 넘는 물소리, 핏속을 흐르는 노랫소리,/ 나는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 시 '분홍신을 신고' 부분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죠 모눈종이 위의 삶을"이라고 시인은 짐짓 독자에게 길을 묻지만 분홍신을 신고 "음악에 몸을 맡"긴 시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나는 이제 시간을 벗어나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선언한다.
새로운 시세계에 대한 암중모색
이렇게 변화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의 바탕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을까. '난 이제껏 너무나 '범생이였다'라는 자신이 지나온 시 세계에 대한 반성이 아닐는지. 시인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이전에 삶이란 과거가 만들어낸, 견뎌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과거가 미래를 만들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기억의 되새김질보다는 생성의 순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오늘도 봄그늘에 앉아 기다린다, 또다른 나를.
― '시인의 말' 중에서
그는 정말 어디든지 갈 수 있을까. 우린 아무 염려나 회의 없이 시인의 변신을 기대해도 좋은가. 그러나 변신이란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 시집 속에 든 예전 시집에 수록된 시들보다 더 길어지고 산문화된 경향이다.
자신을 너무 자유롭게 풀어놓다보니 오히려 산만해진 것인지 모른다.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이 과도기가 지나면 바로잡아 질 테니까. 어쨌든 일단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뗀 셈이다. 독자로서 앞으로 그의 변신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일이다.
시집에 수록한 2007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받았던 시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를 읽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방이 너무 좁아서"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던 아름다운 화가 이중섭의 이야기가 너무나 아름답게 형상화된 시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 시 '섶섬이 보이는 방 - 이중섭의 방에 와서' 전문
* 아고라와 발가락군은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를 부르던 애칭
덧붙이는 글
야생사과/ 나희덕/ 창비/ 값 7,000원/ 2009.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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