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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마침표에 근접했구나

등록|2009.05.21 14:16 수정|2009.05.21 14:16

▲ 싱싱하고 탱탱한 딸기, 내 남편 얼굴이 겹쳐지드만요. ⓒ 조명자





남편이 채 출근도 안 한 이른 시간에 이웃사촌인 '서울 댁'이 전화를 했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더니 딸기 하우스 밭을 갈아엎을 예정이니 얼른 딸기를 따가라는 이야기였다.

실은 며칠 전에도 전화를 했었는데 내가 하루 종일 전화를 안 받아 좋은 딸기를 딸 기회를 놓쳤단다. 딸기밭 갈아엎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단 두 시간. 전화를 끊자마자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남편 아침밥도 차려주지 않고 냅다 딸기하우스로 튀었다.

▲ 작은 박스에도 한가득 채웠습니다. ⓒ 조명자




그 사이 동네 사람들이 몇 차례 훑었는지 딸기줄기가 제 멋대로 어질러져 있는 게 좋은 딸기 따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러나 딸기 포기를 제치니 그 사이 숨어 탱글탱글 익어가는 딸기들이 여기저기 얼굴을 내비치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빛 좋은 초여름 햇살에 앞 다투어 익어가는 딸기들의 향연, 두 시간만 있으면 저 예쁜 것들이 트랙터 발아래 짓이겨질 텐데 아까워서 어떡하나. 급한 마음에 바로 딸기밭에 엎어져 딸기를 따는데 마음은 급하고 손은 더디고. 손가락이 슬쩍 스쳐만 지나가도 농익은 딸기는 금방 짓물러지기 일쑤였다.

▲ 박스뿐일까요? 플라스틱 들통에도 꽉꽉 채웠습니다. ⓒ 조명자




내리 두 시간을 허리 한 번 못 펴고 딸기를 따는데도 힘든지를 몰랐다. 아니 사실은 허리가 '뽀개'지도록 아팠지만 그 아픔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보람. 바로 우리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 딸기, 그것도 밭에서 바로 딴 싱싱한 딸기를 먹으며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할 남편 모습을 상상하자니 이만한 고통쯤은 일도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 스텐다라이에 꽉 채운 딸기는 꼬부랑 할머님들 나누어 드리느라 허룩해졌습니다. ⓒ 조명자




지금은 이 사람 먹일 욕심에 허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고됨도 '암시랑토' 않다며 견디지만 스물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이 남자 때문에 속을 끓이고 부아를 삭이느라 만신창이가  되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 성에 차지 않아 내 욕심이 지나쳐 남편을 원망하고 괴롭히느라 너도 지치고 나도 지쳤던 지난 세월. 돌이켜 생각하니 결과는 마찬가지였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하는 자책도 들지만 그때는 내 성질을 나도 어쩌지 못 하는 나이였던 것 같다.
손가락 쪽쪽 빠는 한이 있더라도 제 것 아니면 곁눈질도 안 하는 못 말리는 결벽증. 떡을 가로 챌 능력이 없으면 떡고물이라도 탐내야할 텐데 어쩌자고 있는 건 약발 안 받는 '자존심'뿐이란 말인가.

덕분에 처자식만 구차해졌다. 대책 없이 착하고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넌덜머리를 내면서 성장했던 나는 성질이 지랄 맞은 것도 봐줘도 무능한 것은 절대 용서 못한다는 철칙을 갖게 됐고 자연히 바라는 남편상의 첫째 조건도 '유능한 인간'이었다.

무능과 유능 사이. 기준을 경제력으로 놓지 않는다면 우리 남편은 무능한 사람이 아닐게다. 책임감 있고 명분을 금과옥조로 중요시하며 제 잇속을 채우자고 남을 이용하지 않는 고지식함. 남의 서방 같으면 그 사람 인품 참 됐다고 칭찬하겠지만 하필 그 인사가 내 기준에 맞지 않은 답답한 인간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언젠가 국립공원 관람료를 받을 때 두 아이 앞세우고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네 식구 관람료를 들이미는 남편을 향해 매표소 직원이 "어르신은 그냥 들어가셔도 됩니다" 하며 관람료 일부를 돌려주는데도 남편이 기어이 전액을 내는 것이었다.

아빠의 그 모습을 보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딸아이가 "아빠 바보~~" 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돌이켜 보건데 아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덕분에 아이들이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한참을 헷갈리게 하는 제 아빠 우습게 생각 않고 변함없는 사랑과 존경을 보내는지도 모르겠다.    

남남으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 서로 원하는 잣대가 다른데 표주박 맞춘 것 같이 한 마음 한 뜻을 욕심낸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짓일 게다. 애증을 수없이 반복하며 때로는 이해하고 때로는 미워하며 마침내 체념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 이것이 부부의 마침표 아닐까.

싱그럽고 탱탱한 자태와 새빨간 미소로 만인을 유혹하는 딸기만 보면 자동으로 남편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는 못 말리는 '열부 근성'(?). 문득 든 생각, 지금 내 모습을 보자니 비로소 우리 부부가 마침표에 근접했구나 하는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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