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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99)

'초록색 옷의 여자아이', '앞날의 통일한국', '일사천리의 기세' 다듬기

등록|2009.05.21 17:07 수정|2009.05.21 17:07
ㄱ. 초록색 옷의 여자아이

.. 그때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서 방 한구석에서 울고 있는 초록색 옷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저는 초록색 옷을 입은 아이가 마음에 걸려서 .. <토토의 눈물>(구로야나기 데츠코/김경원 옮김, 작가정신, 2002) 31쪽

'녹색(綠色)'이라 말하지 않고 '초록색(草綠色)'으로 쓴 대목을 반갑게 생각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적어도 '녹색'이라는 말은 일본 빛이름인 줄 안다는 소리이니까요. 그렇지만 '녹색' 앞에 '초-'만 붙인 '초록색'도 썩 내키지 않습니다. 우리한테는 "풀 빛깔"을 가리키는 빛이름으로 '풀빛'이 있어요.

 ┌ 초록색 옷의 여자아이 (x)
 └ 초록색 옷을 입은 아이 (o)

보기글을 보면 앞엣글에서는 "초록색 옷의 아이"라 하고, 뒤엣글에서는 "초록색 옷을 입은 아이"라 합니다. 이 글을 쓴 분 스스로 토씨 '-의'가 '-을 입은'을 넣어야 할 자리에 끼어들었음을 보여준 셈입니다.

 ┌ 초록색 옷의 여자아이
 │
 │(1)→ 초록색 옷을 입은 아이
 │(2)→ 풀빛 옷을 입은 아이
 │(2)→ 푸른 옷을 입은 아이
 └ …

아이는 '푸른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가리킬 때에는 "푸른 옷을 입은 아이"라 하면 됩니다. "초록색 옷의 아이"도 "초록색 옷을 입은 아이"도 아닌 "푸른 옷을 입은 아이"로.

ㄴ. 앞날의 통일한국

.. 만일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해결한다면 한국정치는 해방 이후의 수많은 역사적 후진성을 극복할 수 있을 뿐더러 앞날의 통일한국에 대해서 비로소 설득력 있는 정치유산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와 상상력>(최인훈, 민음사, 1976) 147쪽

"합리적(合理的)으로 해결(解決)한다"는 일은 어떤 일일까 생각해 봅니다. 슬기롭게 푸는 일일지, 올바르게 푸는 일일지, 알맞게(알뜰하게) 푸는 일일지 알기 어렵습니다. 좀더 쉽고 풀어낼 수 있다면, 한결 또렷이 알아듣도록 다듬어 낸다면 얼마나 반갑고 즐거우랴 싶습니다. "역사적(-的) 후진성(後進性)을 극복(克服)한다"는 일은 뒤처진 역사라든지, 역사가 뒷걸음질 치는 일을 딛고 일어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 싶습니다. "참여(參與)할 수 있을 것이다"는 "함께할 수 있으리라"나 "손을 맞잡을 수 있으리라 본다"로 손봅니다.

 ┌ 앞날의 통일한국
 │
 │→ 앞날에 맞이할 통일한국
 │→ 앞으로 하나될 한국
 │→ 다가올 통일한국
 └ …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보기글에서는 "未來의 통일한국"처럼 쓰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앞날'이라는 토박이말을 잘 살려서 썼습니다. 그렇지만, '앞날'과 '통일한국'을 어떻게 이어 놓아야 하는가는 찬찬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 앞으로 맞이할 하나될 나라
 ├ 앞으로 이루어 나갈 하나될 나라
 ├ 앞으로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할 우리 나라
 └ …

글을 다 쓰고 난 다음에라도 한 번 더 읽고 두 번 거듭 읽었다면 좀 다르게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세 번 네 번 되읽는다 하여도 토씨 '-의'에 오래도록 길들어 있다면 안 달라졌을지 모르겠구나 싶습니다. 글쓴이는 예부터 토씨 '-의'에 길들어 있었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새삼스레 토씨 '-의'에 길듭니다. 글쓴이는 제 말투를 돌아보거나 보듬지 못하는 가운데, 이 글을 읽는 분들 또한 당신들 말투를 돌아보거나 보듬지 못합니다.

 ┌ 하나될 우리 나라
 ├ 하나로 어깨동무할 우리 나라
 ├ 한마음 한뜻이 될 우리 나라
 └ …

아쉬운 모습이 되풀이됩니다. 안타까운 말씀씀이가 끊이지 않습니다. 서글픈 매무새가 이어집니다. 쓸쓸한 글씀씀이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복돋우는 우리 말은 자리잡지 못하고, 우리 깜냥껏 일으켜세울 우리 글은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ㄷ. 일사천리의 기세

.. 이리하여 슈베르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저 일사천리의 기세로 마구 썼다 .. <슈베르트>(폴 란돌미/김자경 옮김, 신구문화사, 1977) 37쪽

'기세(氣勢)'는 '기운'이나 '흐름'으로 다듬어 줍니다.

 ┌ 일사천리(一瀉千里) : 강물이 빨리 흘러 천 리를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을 이르는 말
 │   - 그는 회의를 10분 동안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
 ├ 일사천리의 기세로
 │→ 거침없는 흐름으로
 │→ 거침없이
 │→ 거센 물결처럼
 │→ 힘찬 물결처럼
 │→ 힘차게
 │→ 쉴새없이
 └ …

이 자리에서 네 글자 한자말 '일사천리'를 살리고 싶으면 "일사천리라는 흐름"이나 "일사천리 같은 몸짓으로"로 손질합니다. 아니면, "일사천리로 마구 썼다"로 손질해 봅니다.

우리는 먼저, 토씨 '-의'가 얄궂게 달라붙은 대목을 살피면서 덜어냅니다. 그러고 난 다음, '일사천리'가 얼마나 알맞게 쓰인 낱말인가를 돌아봅니다. 사람들이 두루 쓰니 이런 자리에서도 넉넉히 쓸 만하다고 느낀다면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두루 쓴다 하여도 이와 같은 낱말을 꼭 써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낀다면 털어냅니다. 또는, 이런 낱말을 자꾸 쓰면서 사람들 말과 글을 죽이거나 무너뜨린다고 느끼면 고쳐 줍니다. 왜냐하면, 네 글자 한자말 '일사천리'란 그예 '거침없이'를 한자로 나타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땅에서 우리 이웃과 우리 말을 나누면서 살아야 한다고 느끼는 가슴이라면 시나브로 '거침없이'를 쓰리라 봅니다. 그러면서 이 낱말뜻과 쓰임새를 고이 살피는 가운데, '힘차게'나 '야무지게'나 '온힘 다해' 같은 말로 새롭게 가지를 치리라 봅니다. 또는, "힘찬 물결처럼"이라 할 수 있고, "거센 물결처럼"이라 할 수 있으며, "거침없는 물결처럼"이라 할 수 있어요.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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