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에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려 진영 공설운동장에 차를 내려놓고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 삼거리에 내렸습니다.
빈소까지 이어진 1km 정도의 길이 검은색 상복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삼거리까지 쉽게 왔지만,
진영읍내에서 빈소까지 수 킬로미터를 걸어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유모차를 포함하여 가족들이 모두 나선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지긋이 나이드신 분에서부터 아빠 품에 안긴 아기까지
봉하마을로 향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보통 국민들이었습니다.
제가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요.
비통한 표정인 것은 한결 같았습니다.
하지만 검은 양복, 검은 티셔츠, 검은 넥타이를 매고 봉하마을로 향하는
그 얼굴에 서린 분위기는 단순히 슬픔, 분노, 안타까움이란
몇 마디 형용사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무엇이었습니다.
5월 24일 봉하마을을 찾은 분들이 13만명이라고도 하고 20만명이라고도 하더군요.
그 놀라운 인원수만큼 각자의 마음 속에는 대통령 노무현뿐 아니라
각자 인간 노무현에 대한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봉하마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서 여러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마침내 버스가 마을이 멀리 보이는 길 모퉁이를 돌자
옆자리의 할머니가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아이고, 고향에 내려와서 잘 살아볼라캤는데 이기 무슨 일이고."
그 한마디에 참았던 제 눈에서도 사정없이 눈물이 번져나왔습니다.
오후 4시경에 도착해서 7시 넘어 마을을 나왔는데,
오가는 길에 아는 얼굴을 여럿 보았습니다.
우리 과 젊은 선생님이 어린 아들딸 데리고 오셨고,
새벽 일찍 가족들과 함께 대전을 출발했다가 돌아가는 충남대 이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붉어진 눈으로 빈소에서 나오는 김근태 의원을 보았습니다.
유시민씨와 안희정씨가 여당의원들 출입 막아서는
노사모 회원들을 설득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선 서갑원 의원의 황망한 얼굴을 보았고,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두운 얼굴로 엇갈려 지나쳐갔습니다.
삼거리에서 마을 입구까지 자동차 통행이 차단되었으니
권세 있는자나 없는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평하게
그저 두 발로 걸어서 빈소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길 위 하늘에는 KBS와 MBC의 취재 헬기가 떠나니면서
수킬로를 걸어 빈소로 향하는 사람들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습니다.
지칠 법도 한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봉하마을을 향해 이어진 행렬 중에
거리가 멀다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묵묵히 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심중에 차오르는 복잡한 마음들이야 다양하겠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지요.
생전에 아무 인연이 없었던 한 자연인을 추모하러
이렇게 많은 이들이 먼길 마다 않고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빈소에서 떡 한 조각 얻어 먹으며 들리는 주위 이야기로는
가까운 부산은 물론 서울, 전라도, 충청도에서도 많이 오신 것 같더군요.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먼길 재촉하게 했을까요.
한발짝이라도 고인의 가까운 곳에서
그저 국화꽃 한 송이라도 바치고 싶은 절실한 마음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티브이에서 속보를 들은 지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미안함인지 비통함인지 분노인지
제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심정을 잘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나이 오십 된 남자가 자주 눈물이 납니다.
특히 오늘 아침 연구실에 나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권양숙 여사가 휠체어 타고 입관식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한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뒷모습 속에 2002년 12월에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당선된 밤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신임 대통령과 영부인이 손 맞잡고 군중들 환호에 답하던 그 모습 말입니다.
그때 제 마음을 채운 것은
"아 이제 조금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겠구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사정없이 물어뜯는 정글의 세상이 조금은 변하겠구나"라는
작지만 강렬한 가슴두근거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취임 이후에 그가 걸어간 길은 제 개인적으로는 실망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집권 중기 이후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마침내 한미FTA에 올인하는 모습은 결정적으로 제 마음을 떠나가게 했습니다.
그의 인간미를 사랑했고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신뢰한만큼,
거꾸로 그를 밀어주었던 수많은 민초들의 기대에 어긋난 갈짓자 행보에 실망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개인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무현의 순수함을 믿는 제 마음은 여전했던 모양입니다.
영욕의 5년을 보내고 봉하마을로 돌아온 그의 모습이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으니까요.
밀짚모자를 쓰고 씨익 웃음짓는 그의 모습.
사진찍는 소녀들 키 맞추기 위해 무릎 굽혀주는 천진난만한 표정.
일찍이 시인 신동엽이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라고 읊었던 바로 그 모습을
내 살아 이 땅에서 보는구나 싶은 소망을 가졌었지요.
제가 부산에 내려온 둘째 해인 2000년 4월,
부산 북, 강서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가 낙선한 날 밤이었습니다.
소주라도 한잔 사고 싶어 낙선 사무실로 전화를 했었던
시간으로부터 1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애증의 굴곡이 적지 않았지만,
봉하마을로 내려와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갈 그의 미래가
곧 순환적 민주주의 시스템 착근의 상징이 될 것이라 저는 믿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저만이 가진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제 오늘 봉하마을로 향하는 저 수많은 상복의 행렬.
국화꽃 한 송이 영정 앞에 바치고
때로는 통곡으로 대부분은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보내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을 채우는 이 회오리는 왜일까요.
퇴임 후 시민의 사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통령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
아니 지켜주지 못한 뒤늦은 비통함과 후회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제 마음이 이렇게 아픈 모양입니다.
헌화를 마치고 부엉이 바위를 보러 갔습니다.
사저 뒷편에 곧바로 보이는 높지 않은 바위였습니다.
인간 노무현이 육십삼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곳.
저 바위 위에서 그는 자신을 현대사의 거목으로 키워냈고
마침내는 극한의 외로움과 절망 속에 그를 내팽개친 사람들과 세상을 뒤로 하고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어둑해져가는 바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수개월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온갖 풍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십년의 정치 후원자였던 박연차와 관련된 제반 정황이
한국적 정서에서 이해할만한 수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순간 제 마음에 섬광처럼 떠오른 것은,
인간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어떤 가치를 지키려 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양심에 대한 처절한 자기 확인이었을 것입니다.
퇴임 이후 1년 3개월 동안 한 인간의 영혼을 갈갈이 물어뜯은 파시즘 권력과 그의 주구들,
하이에나 언론에 대한 자존심 지닌 인간으로서 마지막 항변이었을 것입니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가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그토록 관대한 인간들이 포말처럼 부글거리는 세상.
이런 사바의 땅에서 부대끼며 살기에
그는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부디 환한 웃음으로 극락왕생하시기를 빕니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마을 어귀 삼거리에 내렸습니다.
빈소까지 이어진 1km 정도의 길이 검은색 상복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삼거리까지 쉽게 왔지만,
진영읍내에서 빈소까지 수 킬로미터를 걸어 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유모차를 포함하여 가족들이 모두 나선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지긋이 나이드신 분에서부터 아빠 품에 안긴 아기까지
봉하마을로 향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보통 국민들이었습니다.
비통한 표정인 것은 한결 같았습니다.
하지만 검은 양복, 검은 티셔츠, 검은 넥타이를 매고 봉하마을로 향하는
그 얼굴에 서린 분위기는 단순히 슬픔, 분노, 안타까움이란
몇 마디 형용사만으론 설명이 부족한 무엇이었습니다.
5월 24일 봉하마을을 찾은 분들이 13만명이라고도 하고 20만명이라고도 하더군요.
그 놀라운 인원수만큼 각자의 마음 속에는 대통령 노무현뿐 아니라
각자 인간 노무현에 대한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봉하마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서 여러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마침내 버스가 마을이 멀리 보이는 길 모퉁이를 돌자
옆자리의 할머니가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아이고, 고향에 내려와서 잘 살아볼라캤는데 이기 무슨 일이고."
그 한마디에 참았던 제 눈에서도 사정없이 눈물이 번져나왔습니다.
오후 4시경에 도착해서 7시 넘어 마을을 나왔는데,
오가는 길에 아는 얼굴을 여럿 보았습니다.
우리 과 젊은 선생님이 어린 아들딸 데리고 오셨고,
새벽 일찍 가족들과 함께 대전을 출발했다가 돌아가는 충남대 이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붉어진 눈으로 빈소에서 나오는 김근태 의원을 보았습니다.
유시민씨와 안희정씨가 여당의원들 출입 막아서는
노사모 회원들을 설득하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선 서갑원 의원의 황망한 얼굴을 보았고,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두운 얼굴로 엇갈려 지나쳐갔습니다.
삼거리에서 마을 입구까지 자동차 통행이 차단되었으니
권세 있는자나 없는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평하게
그저 두 발로 걸어서 빈소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길 위 하늘에는 KBS와 MBC의 취재 헬기가 떠나니면서
수킬로를 걸어 빈소로 향하는 사람들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습니다.
지칠 법도 한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봉하마을을 향해 이어진 행렬 중에
거리가 멀다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묵묵히 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심중에 차오르는 복잡한 마음들이야 다양하겠지만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지요.
생전에 아무 인연이 없었던 한 자연인을 추모하러
이렇게 많은 이들이 먼길 마다 않고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빈소에서 떡 한 조각 얻어 먹으며 들리는 주위 이야기로는
가까운 부산은 물론 서울, 전라도, 충청도에서도 많이 오신 것 같더군요.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 먼길 재촉하게 했을까요.
한발짝이라도 고인의 가까운 곳에서
그저 국화꽃 한 송이라도 바치고 싶은 절실한 마음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티브이에서 속보를 들은 지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까지도 미안함인지 비통함인지 분노인지
제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복잡한 심정을 잘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나이 오십 된 남자가 자주 눈물이 납니다.
특히 오늘 아침 연구실에 나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권양숙 여사가 휠체어 타고 입관식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한참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녀의 뒷모습 속에 2002년 12월에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당선된 밤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신임 대통령과 영부인이 손 맞잡고 군중들 환호에 답하던 그 모습 말입니다.
그때 제 마음을 채운 것은
"아 이제 조금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겠구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사정없이 물어뜯는 정글의 세상이 조금은 변하겠구나"라는
작지만 강렬한 가슴두근거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취임 이후에 그가 걸어간 길은 제 개인적으로는 실망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집권 중기 이후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마침내 한미FTA에 올인하는 모습은 결정적으로 제 마음을 떠나가게 했습니다.
그의 인간미를 사랑했고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신뢰한만큼,
거꾸로 그를 밀어주었던 수많은 민초들의 기대에 어긋난 갈짓자 행보에 실망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개인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 노무현의 순수함을 믿는 제 마음은 여전했던 모양입니다.
영욕의 5년을 보내고 봉하마을로 돌아온 그의 모습이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으니까요.
밀짚모자를 쓰고 씨익 웃음짓는 그의 모습.
사진찍는 소녀들 키 맞추기 위해 무릎 굽혀주는 천진난만한 표정.
일찍이 시인 신동엽이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라고 읊었던 바로 그 모습을
내 살아 이 땅에서 보는구나 싶은 소망을 가졌었지요.
제가 부산에 내려온 둘째 해인 2000년 4월,
부산 북, 강서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가 낙선한 날 밤이었습니다.
소주라도 한잔 사고 싶어 낙선 사무실로 전화를 했었던
시간으로부터 1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애증의 굴곡이 적지 않았지만,
봉하마을로 내려와 "아름다운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갈 그의 미래가
곧 순환적 민주주의 시스템 착근의 상징이 될 것이라 저는 믿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저만이 가진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제 오늘 봉하마을로 향하는 저 수많은 상복의 행렬.
국화꽃 한 송이 영정 앞에 바치고
때로는 통곡으로 대부분은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보내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을 채우는 이 회오리는 왜일까요.
퇴임 후 시민의 사랑 받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통령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
아니 지켜주지 못한 뒤늦은 비통함과 후회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제 마음이 이렇게 아픈 모양입니다.
헌화를 마치고 부엉이 바위를 보러 갔습니다.
사저 뒷편에 곧바로 보이는 높지 않은 바위였습니다.
인간 노무현이 육십삼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곳.
저 바위 위에서 그는 자신을 현대사의 거목으로 키워냈고
마침내는 극한의 외로움과 절망 속에 그를 내팽개친 사람들과 세상을 뒤로 하고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어둑해져가는 바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수개월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온갖 풍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십년의 정치 후원자였던 박연차와 관련된 제반 정황이
한국적 정서에서 이해할만한 수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순간 제 마음에 섬광처럼 떠오른 것은,
인간 노무현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어떤 가치를 지키려 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양심에 대한 처절한 자기 확인이었을 것입니다.
퇴임 이후 1년 3개월 동안 한 인간의 영혼을 갈갈이 물어뜯은 파시즘 권력과 그의 주구들,
하이에나 언론에 대한 자존심 지닌 인간으로서 마지막 항변이었을 것입니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가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스스로에게는 그토록 관대한 인간들이 포말처럼 부글거리는 세상.
이런 사바의 땅에서 부대끼며 살기에
그는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부디 환한 웃음으로 극락왕생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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