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한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서와 황보인 외 안평대군까지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은 이후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조선왕조의 일곱 번 째 왕이 되어 '세조(世祖)'로 불리운다.
이러한 '쿠데타'에 대하여 세조 자신은 시대적 상황이
그리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강변하고 아울러 그같은
자신의 과오를 상쇄할 목적에서 가급적이면 선정(善政)을 베풀려 노력했다.
세조는 목표를 왕권의 강화에 두었고 신하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도 골몰했다.
허나 세조의 등극엔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勳舊派)의 절대적 충성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훈구파 등의
공신들을 정리하지 못 하여 후대 왕들은 다시금
왕권이 다시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당시 수족으로 부렸던 인물들의
거개가 세조의 재임 내내 부정축재와 호의호식으로
잘 먹고 잘 살았음은 이같은 반증의 귀결이겠다.
아무튼 세조가 생전에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였던
대목은 아마도 숙부인 자신이 남도 아닌 조카 단종을
죽인 일로 인하여 평생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야 했을 거라는 유추가 쉬 가능하다.
그러니 세조는 생전에 그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나날을 보냈을까!
그러했음에 세조는 온천을 자주 찾았던 건 아니었을까?
지난 주 금요일은 조부님의 제사가 있어 아산 온양온천의 숙부님 댁에 갔다.
기왕지사 온양에 간 김에 약간의 짬을 내어 온양관광호텔의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지난 1984년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29호로 지정된 신정비(神井碑)도 보였다.
이는 세조가 충청도 지역의 정치와 민심을 살핀 후 속리산 복천사를 거쳐
돌아가던 중에 온양에 머물렀는데 온천 옆에 있는 냉천을 발견하여
이를 '신정(神井)'이라 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한다.
하지만 숱한 세월의 흐름에 부식된 탓인지
이 비문은 많은 부분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온양온천은 이렇게 세조 뿐만 아니라 세종과 현종, 숙종 외
영조와 정조 임금 등도 즐겨 이곳을 찾아 심신의 피로를 씻어내고
아울러 휴양이나 병의 치료를 위해서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고로 이같이 유명한 온양온천에 가서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문득 느껴지는 것이 바로
'나도 이 순간만큼은 왕이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온양온천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건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대중탕의 목욕비가 고작 2천원대의
매우 착한 가격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목적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한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서와 황보인 외 안평대군까지 사사(賜死)되었다.
수양대군은 이후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조선왕조의 일곱 번 째 왕이 되어 '세조(世祖)'로 불리운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강변하고 아울러 그같은
자신의 과오를 상쇄할 목적에서 가급적이면 선정(善政)을 베풀려 노력했다.
세조는 목표를 왕권의 강화에 두었고 신하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도 골몰했다.
허나 세조의 등극엔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勳舊派)의 절대적 충성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훈구파 등의
공신들을 정리하지 못 하여 후대 왕들은 다시금
왕권이 다시 약화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당시 수족으로 부렸던 인물들의
거개가 세조의 재임 내내 부정축재와 호의호식으로
잘 먹고 잘 살았음은 이같은 반증의 귀결이겠다.
아무튼 세조가 생전에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였던
대목은 아마도 숙부인 자신이 남도 아닌 조카 단종을
죽인 일로 인하여 평생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야 했을 거라는 유추가 쉬 가능하다.
그러니 세조는 생전에 그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 나날을 보냈을까!
그러했음에 세조는 온천을 자주 찾았던 건 아니었을까?
지난 주 금요일은 조부님의 제사가 있어 아산 온양온천의 숙부님 댁에 갔다.
기왕지사 온양에 간 김에 약간의 짬을 내어 온양관광호텔의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지난 1984년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29호로 지정된 신정비(神井碑)도 보였다.
이는 세조가 충청도 지역의 정치와 민심을 살핀 후 속리산 복천사를 거쳐
돌아가던 중에 온양에 머물렀는데 온천 옆에 있는 냉천을 발견하여
이를 '신정(神井)'이라 칭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한다.
하지만 숱한 세월의 흐름에 부식된 탓인지
이 비문은 많은 부분을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이다.
온양온천은 이렇게 세조 뿐만 아니라 세종과 현종, 숙종 외
영조와 정조 임금 등도 즐겨 이곳을 찾아 심신의 피로를 씻어내고
아울러 휴양이나 병의 치료를 위해서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고로 이같이 유명한 온양온천에 가서 뜨거운
온천수에 몸을 담그면 문득 느껴지는 것이 바로
'나도 이 순간만큼은 왕이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온양온천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건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대중탕의 목욕비가 고작 2천원대의
매우 착한 가격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 아주 착한 가격을 자랑하는 모 대중탕 ⓒ 홍경석
▲ 이 건물 지하에 아주 커다란 대중탕이 있다 ⓒ 홍경석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29호로 지정된 신정비(神井碑) ⓒ 홍경석
▲ 온천은 역시 물이 좋아야 한다! ⓒ 홍경석
덧붙이는 글
sbs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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