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강남도 '숙연'... "노무현 손가락질한 우리 업보"

[현장] 참여정부 대립한 강부자들, "안타까운 일"

등록|2009.05.27 22:15 수정|2009.05.27 22:15

▲ 27일 낮 강남역 부근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분향소에 직장인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김환


"다 국민들 탓 아니겠어요? 노 대통령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했으니까…."


27일 오후 송파구청 앞에서 만난 최아무개(54·풍납동·자영업)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안타까운 일"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전직 대통령이 자살까지 하게 되는 이 나라가 부끄럽죠. 살아계실 때 좀 더 예절을 갖춰야 했는데…."

최씨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뽑았다고 했다. 참여정부 때 강남이 '투기지역'으로 몰리면서 자신과 같은 중산층도 '투기꾼'으로 몰린게 억울해서라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괜한 반발심"이었다고 후회하는 중이다.

"사실 돌아가시고 나니까, '저만한 대통령도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썩 잘하는 것 같지 않고." 최씨는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재촉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닷새째인 이날 돌아본 강남은 그의 서거 소식에 침울해하고 있었다. 참여정부 내내 부동산과 세금(종부세) 문제로 대립각을 세워온 곳이지만, 전직 대통령의 급작스런 죽음은 강남 사람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노무현 욕했던 이웃들, 서거 소식에 말을 잃었다"

강남구 대치동에서 만난 김영숙(45·주부)씨도 "이웃들이 변했다"는 반응을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생전에 아파트 주민들과 만나면 대부분 대통령을 욕하고 그랬죠. 아파트도 안 팔리고, 팔려고 해도 세금이 무서워서…. 대선 때도 이명박 찍어야 된다고 그랬거든. 근데 노 전 대통령이 죽었다고 하니까 다들 말이 없데요."

김씨는 "심지어 어떤 친구는 울기도 하더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을 싫어한 나도 뉴스 보고 충격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느냐"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김씨는 "살아계실 때는 살아계실 때고, 지금은 돌아가셨으니까 좋은 데로 가시기만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낮 12시께 직장인들이 많이 몰려 있는 강남역 부근 분향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23일 '강남 촛불'이라는 단체가 자발적으로 마련한 이 분향소에는 이날까지 약 1만여 명이 찾아와 조문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20~30대 직장인 200여 명이 강남역 6번 출구를 따라 30여 미터 가량 길게 줄을 서기도 했다. 일부 조문객들은 길가에 놓인 환하게 웃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문이 끝난 후에도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고 한참동안 노 전 대통령의 영정 사진을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

직장동료와 함께 나온 김아무개(32)씨는 "노 전 대통령 지지자는 아니지만 마음이 너무 아프고 공허한 느낌이 들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분의 진실성이 끝없는 추모 행렬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면서 "이명박 정권이 시민들을 대하는 모습과 비교해 보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보험설계사 심아무개(35)씨도 "그 동안 받았던 고통은 모두 잊고, 많은 국민들의 사랑만 안고 좋은 곳으로 가시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심씨는 "지난 2002년 대선 때 노 전 대통령을 뽑지 않았지만, 퇴임 후 인간적인 모습이 반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슬프고 참담하다"고 말한 정무교(20·대학생)씨는 "나흘이 지나도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언론의 보도태도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정씨는 "일부 언론에서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는데, 돌아가신 분에게 해를 끼쳐서야 되겠느냐"고 쓴소리를 했다.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도 추모행렬에 끼어 있었다. 이순태(63·송파구 거주)씨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재임기간 동안 그의 정책을 믿지 않고 손가락질을 해온 우리의 업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씨는 또 "또한 전직 대통령을 편히 고향에서 살 수 없게 한 현 정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이씨는 "국민들의 욕을 겸허히 받아들인 진정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 강남역 분향소. ⓒ 김환



"노무현, 대통령 욕할 권리를 돌려준 대통령"

다른 추모객도 이씨처럼 노 전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분향소 한켠에 마련된 메모지에는 "외로운 대통령 생활. 우리 국민은 욕을 많이 했지만, 대통령을 욕할 수도 있는 권리를 국민에게 가장 많이 돌려주신 대통령입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이날 강남역 분향소에는 회사원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그냥 마음에 걸려서"라는 짧은 말만 남긴 채 돈 3만 원을 운영진에게 건넨 뒤 사라기지도 했다. 또 분향소를 연 뒤로는 한 권에 320명이 쓸 수 있는 방명록이 25권이나 쌓였다.

이렇게 강남 주민들의 추모 열기가 높지만, 송파-서초-강남 3구에서 분향소는 강남역 딱 한 곳밖에 없다. 그것도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곳이다.

송파나 서초, 강남구청은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조차 없다. 서대문, 양천, 강동구청 등 강북지역 구청들이 분향소를 설치한 것과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참여정부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한 앙금이 아직 남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분양소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게 각 구청의 설명이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구청 여건상 장소가 없어 분향소를 설치하지 못했다"며 "구청장과 간부들은 강동구청에 있는 분향소에서 이미 조문을 했다"고 설명했다.

서초구청도 "서울지역에 6곳의 분향소가 마련됐기 때문에 별도로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박성중 서초구청장도 이날 오전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에서 조문을 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