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웃지 못할 '동원'의 기억

사랑하는 우리의 대통령을 보내며

등록|2009.05.28 15:37 수정|2009.05.28 15:37

노무현 전 대통령님벌써 그대가 그립습니다. ⓒ 김선호


우리가 감히 사랑하던 전직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해야 마땅하겠지만 아직도 그분이 어딘가에 살아 계실지 모른다는 이 얼토당토한 착각은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께서 돌아가신지 엿새 째,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베란다 창문을 열고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본다. 정상 께가 바위로 이루어진 그 산을 바라보노라니 또 울컥 마음으로 눈물이 차오른다. '돌아가셨다' 사실을 인정할 수 없으면서도 이렇듯 나는 울고 또 운다.

퇴근하고 밤 늦게 가까운 분향소에서 조문행렬에 참여하고 왔다. 여기 남양주시도 하나 둘 임시분향소가 마련되었다. 금곡동에 있는 민주당 최재성 의원 사무실 앞에 마련된 임시분향소는 아주 소박했다. 소박했으나 엄숙한 분위기가 가신 님의 명복을 빌어드리기 충분했지만노대통령의 영정사진이 너무 작아 아쉬움이 있었다.

임시로 차려진 분향소를 확인하고 울컥 눈물이 치솟았는데 담담하게 분향을 하고 나올 수 있었다.  분향소를  다녀옴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조의를 표할 수 있어서 마음의 짐을 다소 덜어 냈지만 애도의 마음은 하나도 누구러지지 않는다. 아마도 오래 오래 그분을 기억해야 할 숙제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영결식이 내일로 다가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조문행렬은 끝없이 이어져 벌써 3백만 인파가 다녀갔다고 한다. 더 많아도 좋으리라.

김구 선생 영결식에 2백만 인파가 몰렸던 게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고 한다. 국장으로 치뤄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결식엔 천만에 비하면 적은 숫자인 듯싶지만 이 숫자엔 자발적 참여자 뿐 만이 아닌 '동원' 인파가 있었으니 이 경우 숫자의 단순 비교는 무의미 할 것이다.

당시 초등학생 이던 나 역시 '동원'된 그 한 명이었다.

초등학생, 당시는 국민학생이던 우리들까지 분향소를 강제 동원했으니 전국적으로 그렇게 동원된 숫자는 과연 얼마가 될 것인가.

그날(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날) 전국에 사이렌이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으니 엄마가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가 했다.  나는 그 사이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시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요즘이야 정보가 발달되어 초등학생도 나라 돌아가는 꼴을 어른 못지않게 인지(그냥 아는 게 아닌) 하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라디오가 가장 발달한 정보 통신 수단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마저도 아버지 차지가 되기 일쑤였고, 정부에 의해 언론이 철저히 통제되던 시절이었으니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내가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알 도리가 없었다.

영결식을 며칠 앞둔 날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교가 끝나고 어느 날 오후 갑작스런 선생님의 호출이 있었다.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분향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자세한 말씀이 없었고, 선생님이 그래야 한다고 하셨기에 당연히 따라야 했다.

분향소가 있는 목포시청까지 가려면 목포에서 조금 떨어진 섬에서 배를 타고 가야했다. 마땅하게 배편이 없었는지 우리는 작은 통통배를 타고 가야했다. 우리를 인솔하신 당시의 교감선생님과 담임선생님 하에 대여섯명이 함께 갔던 것 같다. 모든 게 분명하지 않지만 다만 어른들인 선생님의 표정이 매우 어두워 우리도 덩달아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내 작은 배에서 내려 시청까지 걸어갔던가, 버스를 탔던가도 불분명 한데 분향소가 차려진 시청에 당도했을 시청의 하얀 건물을 배경으로 양 옆에 나란히 늘어선 엄청난 국화꽃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국화꽃이 양쪽에 늘어선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긴장이 극에 달했고 마침내 향불이 피워진 건물 안으로 선생님의 뒤를 따라 들어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두 번절하고 나오기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조문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 채 조문을 끝내고 나오니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문을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그 작은 통통배를 탔다. 작은 모터보트 였던 것 같은데 배에 오르자 제법 으슥해진 밤이었다. 그때가 보름에 가까웠는지 달빛이 제법 밝았다.

달빛은 밝고 바다는 잔잔했다. 달빛은 받은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작은 배를 타고 가는 일은 수상한 시절과 무관하게 꽤 낭만적이었다.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깊은 의미를 모르는 우리는 조금 전의 긴장을 잊고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달빛아래 작은 배를 타고 가는 낭만(?)에 못 이겨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자 아이들 모두 함께 동요를 따라 불렀다. 설마 하니 선생님의 제재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우리가 무슨 동요를 불렀는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우리는 선생님의 한 마디에 뚝, 노래를 그치고 말았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는데 노래나 부르고 있다니' 그러셨다.

대통령이 돌아가셔서 슬픔에 잠겨 있어야 할 판에 노래를 부른 우리들은 죄인이 되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래도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고 다만 노래를 못 부르게 한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야 하는가, 선생님이 설명을 좀 길게 하셨더라면 우리가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최소한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노래를 부르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분향소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었을지 지금도 의문이다. 사상 초유의 천만 인파가 조문행렬에 참여 했다는 79년 그때, 나는 동원된 국민학생 중 한명이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