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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지를 누비는 소련제 탱크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소장된 한국전쟁 사진(1)

등록|2009.06.04 09:50 수정|2009.06.06 11:12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 새벽, 먼동과 함께 북위 38선에서 울려 퍼진 포성과 소련제 탱크의 캐더필러소리로 시작하였다. 3년 1개월 동안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한국전쟁으로 애꿎은 겨레를 외제 총알받이로 만들고 한반도를 초토화시키고는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구불구불한 새로운 원한의 휴전선에서 포성이 멎었다. 3년 동안 38선을 오르내리면서 지루하게 계속된 한국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끝나지 않은 전쟁' '잠시 쉬는 전쟁'으로 일단 그 막을 내렸다.

이 전쟁으로 빚어진 피해는 국군 유엔군 인민군 중국군 등, 피아 약 150만 명의 전사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을 낳았다. 그리고 그 포성이 멈추자 한반도 전역은 도시와 마을은 온통 잿더미였다. 그리고 반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그때 길거리를 헤매던 전쟁고아들은 그새 노인이 되고, 혹독한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전쟁을 체험한 일부세대에게만 가물가물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 나는 여섯 살 난 소년이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길고도 무더웠다. 하늘에서는 전투기의 굉음과 폭격소리로, 산과 들에서는 멀리서 가까이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와 기관총소리로 귀청이 멍멍했다. 논이나 밭, 들길에는 뽕나무 채반에 누에처럼 널브러진 시체들, 전투기들의 융단폭격으로 온전한 건물 하나 없이 온통 폭삭 주저앉은 도시와 마을…, 이런 장면들이 또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여태 기억 속에 남아있다.

2004년 2월 2일, 나는 <오마이뉴스> 여러 누리꾼들의 성원으로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갔다가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 War' 파일을 들치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이것이다'하고서. 여기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들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난민 모습,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난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 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난민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NARA 자료실에서 스캔이 가능하여 동포의 스캐너를 빌려 한국전쟁 사진들을 부지런히 담아왔다.

귀국 후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연재 기사로 오마이뉴스 누리꾼들에게 보여드린 뒤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한국전쟁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매스컴에서 대서특필해 주고, 독자들의 성원도 커서 2005년 11월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NARA에서 제2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을 한 뒤 귀국하여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 2>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 장면>을 펴냈다. 이 사진집 또한 반응이 좋아 2007년 2월에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 길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NARA에 머무는 동안 수백만 파일의 기록물이 보관된 자료실에서 마치 광맥을 찾는 탐사자로 연일 눈에 핏발을 세우며 문서 상자를 훑었다. 영어에 어둔한 내가 감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곁에서 도와준 재미 동포 박유종 선생의 덕분이었다. 그분은 조부 백암 박은식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탓으로, 한국전쟁 역사자료 복원의 일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2007년 2월에는 제3차로 방미하였다. 제3차 한국전쟁 기록물 리서치 작업에서는 앞선 제1차, 제2차 작업과는 달리 NARA에 소장된 북한 측 노획문서를 입수한 점과 맥아더 장군의 고향 버지니아 남쪽 항구도시 노폭(Norfolk)까지 달려가서 맥아더 기념관의 자료도 수집해 왔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오듯, 이 한국전쟁 사진자료를 3차에 걸쳐 70여 일 동안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NARA에 출근하여 수십년 묵은 먼지를 마시며 한 장 한 장 겨레의 자산이라는 신념으로 소중히 내 컴퓨터에 저장해 왔다.

2009년 6월, 한반도에는 다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남북의 매파 지도자들은 한반도의 화해나 평화보다는 긴장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벼랑 끝 작전으로 백성을 이끌고 있다. 나는 전쟁을 체험한 한 우국지사로서 백 마디 말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소장된 사진을 온 겨레에게 보여드림으로써 이 땅에 전쟁을 물리치고 평화가 깃들기를 눈물로 호소한다.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없기를 거듭 기원하면서 첫 회 기사를 보낸다. 매 회 사진 한두 장에 포토에세이 형식으로 사진 수집 뒷이야기나 간단한 사진 설명을 할 셈이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시가지를 누비는 북한군의 소련제 탱크 이 사진은 미군이 북진하여 수거한 북한군 노획문서에서 나온 것이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필자에게 노획문서 파일 번호를 특별히 가르쳐 줘서 입수한 사진으로 'RG 242 Box 47'에서 나왔다. 귀한 정보를 제공해 주신 방 박사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 박도


1950년 6월 28일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포성이 뜸해지기에 밖을 내다보니 낙산 위에 늘어섰던 포좌(砲座)가 간 곳이 없고 멀리 미아리고개로 자동차보다도 크고 육중해 보이는 것이 이곳을 향하여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것이 대포알을 맞아도 움쩍하지 않는다는 이북의 탱크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돈암동 거리엔 이미 사람의 나다니는 양이 보이고 전찻길엔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떼지어 행진하고 있다. ……………

저녁 무렵엔 이미 붉은 완장을 차고 거리를 왔다갔다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어제까지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 완장을 차고 자전거를 달리던 청년도 섞여 있었다.
- 김성칠 지음 한 사학자의 6‧25 일기 <역사 앞에서> 창작과 비평사 68~69쪽

밧줄에 끌려가는 시신들1951년 5월 24일, 중부전선에서 적군의 시신을 묻고자 노무자들이 운반하고 있다. 천금보다 귀한 아들도, 하늘 같은 지아비도, 바위 같은 아버지도, 전쟁 터에서는 한낱 쓰레기더미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에서 2등은 없다. 패전은 포로 아니면 죽음뿐이다. 전쟁기간 중에는 군사기밀상 이 사진을 보도할 수 없는 '보도관제' 스탬프가 왼편 아래쪽에 찍혀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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