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얘들아 고개 들어라, 여기 슬픈 교수가 왔다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을 토대로 재구성한 '비정규 교수' 이야기

등록|2009.06.04 10:35 수정|2009.06.05 09:48
다음 글은 책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의 내용을, 대한민국의 어떤 시간강사의 눈으로 재구성한 비정규직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주>

▲ 비정규 교수, 정규직 교수, 학생, 변호사, 학부모, 언론인 등 32명이 대한민국 대학 강사 문제에 관하여 쓴 글을 모았다. ⓒ 이후

난 시간강사다. 학교에서 '교수님'이라고 불리지만 바깥에서는 '보따리 장수'라고 불린다. 서른이 넘어 박사학위를 땄고 마흔이 넘었는데도 12년을 강사로 보냈다. 공부가 좋아 마음먹은 일이지만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언젠가는 교수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를 온몸으로 체화했다.

유학은 외롭고 모진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미래를 기대하며 묵묵히 견뎌냈다. 하지만 결국 내 앞에는 보따리 싸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해야 하는 현실만 남았다. 학생들이 '교수님'이라 부를 때마다 속으로 오만가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맴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의 교수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둘로 나뉘어 있다. 정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를 정규직이라 하고, 나머지 외래 강사니 겸임 교수니 하는 사람들은 몽땅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나 같은 시간강사는 의문의 여지 없이 당연한 비정규직이다. 심지어 법을 따르자면 나는 교원도 아니다. 박정희 정권 때 개정된 고등교육법이 강사의 교원 지위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아는 학생들이 이따금씩 '강사님'이나 '선생님'으로 부른다.

보험도, 연구비도, 휴게실도 없다. 그리고 시간당 4만 원의 강의료를 받는다. 간혹 최고 대우를 받으면 5만5천 원이다. 많은 돈이라 생각하겠지만 마음대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시간씩 두 군데 대학에서 모두 네 시간을 가르친다.

대략 한 달에 80만 원을 번다. 원래 세 군데에서 강의했는데 한 군데에서는 별안간 과목이 없어져서 해촉 당했다. 그나마 대학이 하나는 서울에 있고 다른 하나는 인천에 있어 버스값과 밥값을 빼면 눈물 나는 액수만 남는다. 그러니 굶어 죽지 않으려면 책 보따리 싸들고 더 많은 대학을 돌아야 한다.

나도 '학진'형 인간이 될까?

미국과 일본의 교수사회도 벽이 높지만 한국 수준은 아니다. 대한민국 시간강사에게 '고용 계약' 따위는 없으니 역시 '연줄'이 문제가 된다. 연줄을 총동원해야 간신히 강의를 구할 수 있다. 보따리로 연명하며 임용 기회만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 방학이 오면 눈앞이 캄캄하다. 강의가 없으니 수입도 없다. 책과 싸우며 다음 강의를 준비하는 고통의 기간이다. 마누라와 자식 걱정이 태산이다. 종강 무렵에 나는 또 조교에게 걸려오는 전화 한 통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전화 한 통으로 이루어지는 구두계약이 다음 학기 강의 여부를 결정한다.

▲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김동애 교수가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32년 전 개정된 고등교육법으로 대학 강사들은 '교원 지위'를 박탈당했다. ⓒ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시간강사 문제는 누누이 들렸고 텔레비전 전파도 탔지만 그다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가히 희망으로 고문당하는 기분이다. 얼마 전에 또 시간강사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벌써 일곱 번째다. 남의 일이 아니다. 지방으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다 보면 독한 자기연민과 한탄에 빠진다. 그러면 나도 강사 일을 때려치우고 '학진형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른바 '학진'으로 불리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기초연구비가 나오기 때문에 일단 밥을 걱정하는 신세에서 조금 숨통이 트인다. 시간강사 일에 지쳐 '학진 체제'에 편입되는 강사들이 많다.

이 바닥에서 학진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냉혈한 교수사회에서 일단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회를 잡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리를 맡는다고 해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나도 내가 공부한 지식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다. 허나 학진이 벌이는 사업이 요구하는 글쓰기가 따로 있다. 때문에 자기 전공이나 적성, 의도와는 상관없이 쓰는 글쓰기가 무수하다. 대학에 다양한 학문이 꽃피기보다 거대 사업에 예속된 '기업형' 학문이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결국 마지막으로 피해를 보는 이들은 학생들이다.

전국 사립대학이 가진 돈을 다 합치면 대략 7조 원에 달한다. 시간강사는 전국을 통틀어 약 7만 명이 있다. 전국의 모든 시간강사가 받는 평균연봉을 지금의 두 배로 올려줘도 충분하고도 남는 엄청난 돈이다. 정규직 교수들은 대략 시간강사의 스무 배에 이르는 임금을 받는다. 단지 사람의 위엄을 지켜주는 데 그렇게 많은 수고가 필요한지, 정말 궁금하다. 외려 대학은 박사급 전문 인력을 착취하는 교육 서비스를 만끽하고 있다. 생활고와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대학 강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 교수가 맡고 있지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다. 수요자의 경제논리를 따르자면 당연하다.

늘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만나지만 학생들은 이 문제를 무시하거나 아예 모를 것이다. 혹 문제의식을 느끼는 교수나 학생이라도 위험이 무서워 선뜻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교수와 강사와 학생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학 사회에서 섣불리 나서기가 어려운 것이다. '학보'에는 뒷산에 개나리가 피었다는 기사는 실려도 비정규 교수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학기마다 만나고 헤어졌던 짧은 인연의 제자들은 도서관에 틀어박혀 토익 문제집에 열을 올리고 있을 테다. 이렇게 점점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교원'이 아니라는 '비교육적'인 모순이 현실로 박제되고 있다.

교수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서라도, 과연 시간강사가 '교원 지위'를 '회복'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잡념이 많다. 시계를 보니 어이쿠, 강의 시간이다.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쓰게 비우고 강의실 문을 연다. 얘들아, 고개 들어라. 수업하자. 여기 너희들의 슬픈 교수님이 왔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