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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35)

[우리 말에 마음쓰기 661] '그들 존재 자체', '상상력이 존재' 다듬기

등록|2009.06.06 14:19 수정|2009.06.06 14:19

ㄱ. 그들 존재 자체가

.. 그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그들의 고향이라고 정해진 곳들로 그들을 돌려보내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  《자케스 음다/윤철희 옮김-곡쟁이 톨로키》(검둥소,2008) 164쪽

 '자체(自體)가'는 '바로'로 손보고, "그들의 고향이라고 정(定)해진"은 "그들한테 고향이라고 하는"으로 손봅니다. '열심(熱心)이었다'는 '부지런했다'나 '힘을 쏟았다'나 '마음을 기울였다'로 손질합니다.

 ┌ 그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기
 │
 │→ 그들은 모두 불법이었기
 │→ 그들은 그저 불법이었기
 │→ 그들은 이곳에 살고 있어도 불법이었기
 │→ 그들이 그곳에 있기만 해도 불법이었기
 │→ 그들 목숨이 바로 불법이었기
 │→ 그들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불법이었기
 └ …

 '살갗 하얀 사람'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땅과 자원과 사람을 빼앗았습니다.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한편, 같은 겨레끼리 서로를 안 믿게 길들였고, 어느 한쪽한테 힘을 주어서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굴면서 자기 힘을 탄탄히 지켜 나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리하여, 처음부터 제 고향이며 터전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살갗 검은 사람'들은 '살아 있음 = 불법'이 되고 맙니다. 제 나라 어디고 제 고향이건만, 어디에 발을 붙이든 불법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땅이 '살갗 하얀 사람'이 살아가기에 알맞지 않아서 내다 버리는 땅이 아니라면 '불법이라도 눈감아 준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 땅이 예부터 살갗 검은 사람이 지내던 곳인지 아닌지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운데.

 ┌ 그들은 어찌 되었든 불법이었기 때문에
 ├ 그들은 뭘 하든 불법이었기 때문에
 ├ 그들은 어느 누구라도 불법이었기 때문에
 ├ 그들은 착하건 부자이건 그저 불법이었기 때문에
 └ …

 하기는. 저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두말 없이 불법인' 사람이 많습니다. 공장 임자가 두들겨패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집회를 하건, 여러 달이나 여러 해에 걸쳐 일삯을 못 받아 더는 참지 못하고 집회를 하건, 오로지 불법입니다. 두들겨팬 사람은 불법이 아니요, 일삯을 떼어먹어도 불법이 아닙니다.

 이와 달리, 잘못된 정보로 잘못된 이야기를 글로 적어 사람들한테 내놓아도 불법이 아닙니다. 자율과 보충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붙잡아 가두어도 불법이 아닙니다. 머리길이며 소지품이며 옷차림이며 다그치고 닦달하다가 손찌검을 해도 불법이 아닙니다. 공무원이 개발계획을 짜서 동네 하나를 싸그리 밀어없애려 하여도 불법이 아니며, 비오는 날 쓰레기물을 냇물이나 바다로 흘려보내도 불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엉뚱한 말을 엉터리로 쓰는 일도 불법이 아닙니다. 얄딱구리한 말투로 우리 글을 어지럽혀도 불법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을 쓰든, 어줍잖은 일본 번역투를 쓰든, 지식자랑이 철철 흘러넘치는 말을 하든, 영어 잘한다며 갖은 서양말을 마구 섞어서 쓰든 불법이 아닙니다.


ㄴ. 상상력이 존재한다

.. 사실 과학에는 예술가의 상상력과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종류의 상상력이 존재한다 ..  《리처드 파인만/정무광,정재승 옮김-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승산,2008) 37쪽

 '사실(事實)'은 '알고 보면'이나 '가만히 보면'으로 손봅니다. "재미있는 종류(種類)의 상상력(想像力)"은 "재미있는 상상력"이나 "재미있는 생각"이나 "재미있게 생각하는 힘"으로 고쳐 주고, "예술가의 상상력과는"은 "예술가가 품는 상상력과는"이나 "예술가들 생각과는"으로 고쳐씁니다.

 ┌ 재미있는 종류의 상상력이 존재한다
 │
 │→ 재미있는 상상력이 있다
 │→ 재미있는 생각을 즐긴다
 │→ 재미있게 즐기는 생각이 있다
 │→ 재미있게 생각한다
 └ …

 생각(상상력)이 있다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야 올바르지 싶습니다. 재미있는 생각이 있다기보다는, 재미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야 알맞지 싶습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생각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테지만, 여러모로 재미있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야지 싶습니다.

 그나저나, 이 보기글은 옮김말이 좀 얄궂지 않느냐 싶은데, 곰곰이 살펴보면 오늘날 번역책은 으레 이런 말투로 되어 있습니다. 좀 낯설다고 해야 할까, 어설프다고 해야 할까, 덜 다듬었다고 해야 할까, 뜻은 얼추 헤아릴 수 있으나 입에 찰싹 달라붙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싶은 말투입니다. 글로는 이런 글이 제법 넘치지만, 입으로는 이런 말을 잘 안 한다고 할까 싶은 말투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과학이라는 갈래에서는 예술 갈래와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라든지, "곰곰이 살펴보면, 과학하는 사람은 예술하는 사람과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생각을 하곤 한다"처럼 다듬어 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과학'과 '예술'을 맞대든지 '과학자'와 '예술가'를 맞대든지 하면서 글머리를 풀어야 올바르리라 봅니다. 서양사람한테는 서양말을 담아내는 알맞는 말투가 있다면,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말을 담아내는 알맞는 말투가 남달리 있으니, 옮겨적는 글에서는 이런 말투를 좀더 헤아려야 한다고 느낍니다.

 ┌ 과학에는 예술가 생각과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있다
 ├ 과학에는 예술가 생각과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생각이 넘친다
 ├ 과학에는 예술가 생각과는 달리, 아주 재미있게 즐기는 생각이 있다
 └ …

 우리는 영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우리 말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문법에 따라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 우리 글법에 따라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나라밖 글을 우리 글로 옮겨적으려 하는 분들은 나라밖 글을 꼼꼼히 살피고 샅샅이 돌아보는 매무새와 함께, 우리 글로 올바로 적어내고 알뜰히 풀어내는 몸가짐을 야무지게 길러야 한다고 느껴요.

 우리 말을 찾고 우리 글을 붙잡으며 우리 생각을 키우고 우리 삶을 북돋운다고 할까요. 우리 말을 매만지면서 우리 넋을 보듬고 우리 마음을 다독이면서 우리 삶자락을 일군다고 할까요. 어느 말이든 한 마디 말로 그치는 법이 없습니다. 짧은 말이든 기나긴 말이든 우리 문화이고 예술이고 사회이고 삶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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